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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롬[9]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1)<강제징용 온 박병운 할아버지의 인생역정>
이승칠  |  gooneye7805 @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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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11월 13일 (월) 00:00:00 [조회수 : 3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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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1949년 6월1일 창간한 러시아 사할린주의 유일한 한글신문인 <새고려신문>에서 주님을 찾아보았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발행되는 조그만 벼룩신문이나 사할린 동포들의 소식은 물론이고 여러 민족이 등장을 합니다. 특히 사랑누리선교회 회장 이종열 목사의 신앙칼럼은 매주 실립니다.

1920년 충청남도 수상군에서 태어난 박병운 할아버지는 1943년 일제의 강제징용에 의해 고향을 떠남으로 한 많은 인생살이를 경험하게 됩니다. 새고려신문 배영숙 기자와의 만남을 간추려 봅니다. [*필자의 설명]

   
저와 함께 고향에서 4명이 강제모집 되었는데 부산항에서 배를 탈 때엔 그 수가 150명이 넘었지요. 우리는 일본을 걸쳐 사할린에 당도했는데 우글레고르스크토로(샤흐쵸르스크) 탄광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물론 고된 노동을 했지요. 저는 탄광에서 굴진공으로, 채관공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던 1945년 3월에 우리들을 나이부치(&#48680;코브) 탄광으로 넘겼어요.

[*사할린은 자원이 풍부한데 특히 석탄이 많았기에 일본이 에너지 확보 차원에서 이웃에 탐을 내었던 것입니다. 공산주의 체제가 끝나면서 탄광이 거의 폐업이 되었으나 지금은 원유와 천연가스가 이를 대신 하고 있습니다. 하얀 눈이 내리는 하늘과 검은 자원의 땅인 사할린, 흑과 백의 조화가 주님의 작품인 것 같습니다.]

거기에 와 보니 충청북도 사람들이 150여명, 충청남도 사람들이 100여명 되었고 평안도 사람들도 있었어요. 먼저 온 사람들은 계약이 끝났는데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계속 탄광에서 일하고 있더군요. 저희들도 얼마후 계약이 끝났으니 집으로 보내달라고 했더니 일본놈들이 1년만 더 일해야 된다고 하더라구요.

[*강제징용 온 사람들 중에 경상도 사람들이 제일 많고 특히 한국의 경상북도는 자체적인 시민단체를 만들어 사할린 고향 사람들을 초청하거나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지역감정이나 남북감정이 전연 없습니다.]

이때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배는 고프지, 일은 힘들지… 놈들은 우리들에게 현찰로 주지 않았어요. 집으로 가기 전에 다 쓴다고… 그러니 배가 고파도 상점에 사 먹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먼저 온 사람들은 계약이 끝난 후 얼마의 돈을 받았으니 상점에 갔다 올 수가 있어서 좀 자유가 있었으나 우리들에겐 그런 자유가 없었습니다.

허가 없이 기숙사에서 나가 상점에 갔다왔다 하면 매를 심하게 맞았죠. 그래서 매맞아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요… 대전에서 온 제 친구도 도망치려고 하다가 붙잡혀 매맞아 누운 채 먹지 못해 저 세상사람이 되었어요.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일본정부는 소극적이나 일본 시민단체는 사할린에 징용 온 한국 사람들을 위해 서류를 보관하며 적금이나 월급 미지급분에 대한 법적 투쟁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일본 국가라는 집단은 비이성적이나 소집단은 항상 정의의 편에 서고 있는 이상야릇한 민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해방이 되었으나 일본놈들은 우리를 팽개쳤고 고국에선 소식이 없어) 저는 자갈을 파는 일을 하였는데 이 자갈은 철도 건설에 이용되었어요. 나는 유즈노사할린 철도국으로 넘겨져 성실하게 일을 하여 얼마 후 철도국 목공브리가다를 지도하게 되었으며 1956년에는 상업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마리야라는 러시아 여성을 사랑하여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 ‘나 몰라’하는 일본과 관심도 없는 조국을 경험한 것이 사할린 동포들의 슬픔이며 한으로 맺히게 됩니다. 이 부분을 서로 잘 이해해야 진정한 포옹을 하게 됩니다.]

마리야는 나보다 2살 위였어요. 한번 출가 갔다 온 여성인데 유산 후 더는 임신하지 못한다 해서 남편이 마리야 곁을 떠나갔어요. 우리는 서로 사랑했지요. 마리야는 영리하고 착하고 속이 깊은 여자였어요. 우리는 41년 동안 행복하게 살았어요. 내가 오늘날까지 살고있는 것도 마리야 덕분입니다.

[* 50년 전에 한국 사람들은 입술로 사랑이란 표현조차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외국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사실은 모험이겠죠. 한국에는 비빔밥이란 음식이 유명하지만 러시아는 다른 민족끼리 피를 섞는 문화로 유명합니다.]

나는 목공브리가다로 일하고 있을 때 직장에서 몸을 다쳤는데 그때부터 자주 앓게 되었다. 의사들은 기후를 바꿔야 병의 차도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을 알게 된 마리야는 더운 지방 크라스노다르 변강 까&#48092;&#49761;스크 마을로 이주해 가자고 재촉을 하였다.

마리야는 크라스노다르가 휴양지이며 과일도 많기 때문에 건강이 회복되리라면서 저를 설복시켰어요. 그 당시 우리는 유지노사할린 프롭소유즈나야 거리에 4칸짜리 개인집을 짓고 살고 있었지요. 우리는 1961년에 집을 팔고 대륙으로 떠나가서 자그만한 개인집을 마련하고 채소농사를 하면서 조용하게 살았습니다. 실로 따뜻한 기후는 나의 건강을 회복시켰으며 항상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 대륙에선 55세부터 연금을 타나 기후가 좋지않은 사할린은 50세부터 연금을 탑니다. 한국에는 석유는 나지 않지만 좋은 기후를 가진 것을 축복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사막이나 빙판 속에서 석유를 뿜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는 걸작입니다.]

마리야는 1996년에 중병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가 없는 나의 생활은 의미가 없게 되었어요. 마리야는 살림도 잘했고 음식질도 잘 했어요. 내가 없으면 돌아올 때까지 밥을 먹지 않고 기다리곤 했어요… 어떻게 그를 잊을 수가 있습니까? 러시아 여인이었지만 나에게 한해서는 단 하나의 사랑하는 아내였습니다.

날이 가고 해가 가면서 나는 사할린 1세 노인들의 일시모국방문, 영주귀국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그때로부터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2000년도에 사할린을 찾아와 주이산가족회를 방문하여 그 당시 회장이었던 김명열씨에게 독신자로서 한국요양원에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거절을 당하고 말았는데, 나는 크라스노다르에 거주등록 되어있으며 또 영주귀국은 오직 사할린 자만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낙심천만한 80세 노인이 된 나는 주이산가족회 문을 나서서 정처 없이 시내를 떠돌았다. “어디로 가야 하나? 누가 도와주겠는가? 영주귀국은 나의 (헛된)꿈이었는가?”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 뒤늦게 시작을 한 1세 노인들의 귀국문제는 자식들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모순점을 안고 있기에 상당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좋은 방법이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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