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The Devil All the Time, 2020)

마치 무거운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의 영화. 영화는 음습하며 메마른 이율배반적 분위기 속에서 잔혹함과 절망으로 뒤틀린 인간의 추한 내면과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미국 남부 고딕문학이 지니는 특징이 대체로 이런 것이라면 영화는 미국 고딕문학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셈이다. 더 나아가 영화는 소위 바이블 벨트라 불리는 근본주의적 신앙 지역을 그 배경으로 삼는다. 인간 내면의 추한 모습에 광신적 공포까지 더한 것이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들리는 건조한 내레이션은 앞으로 시작될 이야기의 본질을 담담히 전한다. 실타래처럼 엉켜 버린 운명을 지닌 이야기 속 인물들이 겪게 될 비극은 우연일까, 신의 뜻일까?

2차대전 참전 중 일본군에 의해 십자가에 잔인하게 처형당한 전우를 목격한 월러드는 큰 충격을 받는다. 전쟁이 끝나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월러드는 전쟁의 참상으로 인한 상흔으로 어린 시절의 신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다. 그러던 중 한 식당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여 아들을 얻은 월러드는 마침내 조물주와 화해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리하여 월러드는 집 뒤편 숲에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고 자기만의 예배처소를 꾸민다. 그리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조물주에게 기도한다.

그렇게 매일 간절히 기도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아들 아빈의 마음을 영화는 이렇게 표현한다. “아들에겐 아버지가 사라지지 않는‎악마와 싸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신앙을 떠났던 바이블 벨트의 청년에게 행복은 보장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아내가 암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둔 후 절망한 남자는 신에게 더욱 더 애절하고 간절하게 매달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삶이 늘 그러하듯 간절함이 항상 보상을 받는 것은 아니다. 마침내 절망은 파국을 낳는다. 그리고 이 파국은 월러드의 아들 아빈에게도 씨를 내린다. 언젠가 월러드는 아들 아빈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교훈을 남긴 적이 있었다. 이 세상은 쓰레기 같은 인간들로 가득 차 있으며 이 쓰레기들은 신중하게 때를 잘 골라 처단해야 한다고. 아버지의 본을 따라 쓰레기를 처단하는 아들은 아버지와 비슷한 운명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나의 밖과 나의 안에서, 악마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탐욕과 살인,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광신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악마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 둘이 그렇게 우연히 자신을 응대하게 된 웨이트리스와 각각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그 모든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악마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던 것일까? 무의미한 가정은 그 어떤 위로도 주지 않으며 그 무엇도 합리화시키지 않는다. 악마는 결코 틈을 놓치지 않는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영화의 제목은 영어 원제인 ‘The Devil All the Time’을 번역한 말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아빈의 마음을 묘사한 구절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표현이었다. “아들에겐 아버지가 사라지지 않는‎악마와 싸우는 것 같았다.”(It seemed to his son that his father fought the Devil all the time.) 내 밖으로부터 나를 공격하는 악마와 항상 싸우지만 사실 나를 파멸시키는 악마는 내 안에 있었다는 이야기, 그렇게 각각의 인간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들이 문득문득 나타난다는 이야기, 그리하여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야기, 영화는 자신의 제목과 함께 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보였다. 악마의 가장 큰 계획 중 하나일 전쟁과 주인공의 불운한 미래를 암시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역시,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시야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일 수는 있겠지만 결코 사라지지는 않는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은 영화가 과연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놀랍게도 영화 속 내레이션을 담당한 인물은 바로 그 소설의 작가였다. 크레딧을 읽으며 어쩌면 그래서 영화가 더 소설처럼 느껴졌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이 소설을 꼭 찾아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악마는 이렇게 여러 가지로 유혹해 본 끝에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를 떠나갔다.” (눅 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