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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혐오가 없는 세상을 향한 신약성경의 가르침
조경철  |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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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1월 20일 (수) 16:33:18
최종편집 : 2021년 01월 30일 (토) 20:32:36 [조회수 :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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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혐오가 없는 세상을 향한 신약성경의 가르침

 

   
▲ 조경철

일부 기독교인들이 차별을 금지하는 법 제정에 반대한다는 말은 신약성서학자로, 목사로 살아온 내게는 참으로 기이하게 들린다. 그렇게 반대하는 이들의 생각과 주장에도 그 나름의 절실함이 있겠지만, 어쨌든 차별과 기독교, 나는 이 두 단어를 연결해서 생각하는데 큰 어려움을 느낀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차별금지를 반대한다면, 그래서 차별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좋은 차별도 있다는 말인가? 어떤 차별이든 차별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다. 기독교는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라고 믿는 신앙이다. 그러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따르며 실천해야 할 예수의 가르침을 가장 간단히 줄여서 말한다면, 특정한 성경구절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원수사랑”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으리라. “원수”가 누구인가? “원수”는 어떤 식으로든 규정해서 제한할 수 없는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의 대상을 뜻한다. 그러므로 원수사랑은 대상을 차별하지 말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국제질서적인 차원에서나, 정치적인 차원에서나, 사회경제적인 차원에서나, 윤리도덕적인 차원에서나, 민족적인 차원에서나, 종교적인 차원에서나 어떤 식으로든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규정하는 순간, 그래서 차별해야 할 대상이 있다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몸으로 보여주신 원수 사랑과는 반대의 길로 가는 것이다.

 

1.

마태복음은 이러한 예수의 사랑에 담긴 깊고 넓은 차원을 복음서 서두의 족보를 통해서 분명히 드러낸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족보에는 5명의 여인들이 나온다. 유대인의 족보에 여인들이 나오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는 일이다. 더구나 그 여인들은 모두 치명적인 하자를 가진 이들뿐이다. 다말은 시아버지와의 근친상간을 범한 여자이고, 여리고 성의 이방인 창녀 라합, 동성애의 도성 소돔을 벗어난 롯과 딸들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모압 족속의 후손인 룻, 다윗과 간통하고 발각될까봐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에 보내 죽게 한 여인, 그리고 결혼하기 전에 처녀로서 아이를 잉태한 여인 마리아. 우회적인 해석을 통하여 이들을 미화시켜보려는 시도는 기독교 역사에서 끊이지 않지만, 그러나 그들이 출생에서부터 행실에 이르기까지 도저히 부끄러워서 말하기조차 싫은 여인들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에는 이러한 부정한 여인들의 피가 흐르고 있다. 예수의 피 속에는 민족적-정치적인 차원에서나 도덕적, 종교적인 차원에서나 조화되기 어려운 다양한 피가 섞여 있다. 유대인의 율법에 의거해서 쳐 죽여야 할 동방의 점성술사들은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헤롯이나 율법학자 등은 예수를 죽이려고 한다. 예수의 탄생은 인간이 만들어 지키고 있는 기득권 세력의 모든 가치척도를 뒤흔든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하는 부활 예수의 유언의 말씀으로 마무리된다(28:19).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사람을 이러저러한 이유로 나누고 차별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차이와 차별, 그로 인하여 이들이 받고 흘렸을 모든 혐오와 눈물을 감싸 안고 스스로 그 아픔을 십자가 죽음으로 치유하고 극복하였다. 예수 자신이 유대종교와 사회, 그리고 로마에 의해서 차별과 배척, 혐오의 대상자가 되어 십자가에서 죽었다. 하나님은 그러한 예수를 부활시키심으로써 차별받고 배척된 자의 아픔을 치유하시고, 새로운 삶, 새로운 세상을 여셨다. 예수 안에서 그렇게 차별이 치유되고 극복되는 삶과 세상을 구원, 하나님의 나라라 했다.

 

2.

마가복음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면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처음으로 고백한 사람은 유대인도 아니고, 예수의 제자도 아니고, 예수의 처형을 현장에서 지휘한 로마인 백부장이다(15:39).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갈등과 저주, 차별과 싸움을 온 몸으로 안고 치유하려는 예수의 마지막 몸부림이다. 마가복음을 읽어보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마귀들이 더 먼저, 더 자주했다(1:25.34; 3:12). 그러므로 마귀도 할 수 있는 그러한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고백만으로 예수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에서 그런 고백을 한 후, 예수의 십자가를 가로막았을 때, 예수는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꾸짖었다(8:32-33). 입으로는 고백하면서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는 행위는 사탄의 행위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사람만이 예수의 제자라고 한다(8:34). 십자가에 달린 예수 앞에서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제자들이냐 아니냐, 율법을 아느냐 모르느냐, 도덕적이냐 아니냐 하는 차별적인 물음은 모두 상대화되어 버린다. 누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길을 가는 사람이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고백하면서, 삶에서는 예수의 십자가와는 달리 사람들을 이러저러한 이유로 차별하고 혐오하여 배척한다면, 그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삶이 없는 고백은 마귀도 할 수 있다. 다수 권력의 사회에서 소수자의 후견이 되어주는 것,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길을 가는 것이다.

 

3.

누가복음은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노래한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이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1:51-53) 그리고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는 취임설교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함이라”(4:18-19). 그런 후에 다시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했다(4:21). 비천한 자, 주린 자,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가 누구인가? 이들은 당시 다수 사회로부터 배척되어 차별과 혐오의 설움으로 눈물짓는 이들, 요즘 말로 하면 각종 소수자들이 아니겠는가?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예수는 오셨고, 살았고, 죽으셨다. 그들에게 예수가 선포한 복음과 자유는 차별과 혐오가 없는 평등하고 공정한 삶이다. 어느 복음서보다도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여자와 과부, 어린이, 병자, 장애인, 이방인과 사마리아인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도 그들이 그 사회에서 차별과 혐오의 눈물을 삼키고 사는 소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 안에서 실현되었다. 승천하면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나가서 차별과 혐오 없는 세상을 만드는 과제를 맡기며 부탁하였다. 사도행전 첫 부분에 나오는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재산공유공동체였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의 부탁을 얼마나 진지하게 실천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한다면, 바로 이러한 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일 게다.

 

4.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와 관련하여 내세우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 그것도 로마서 1:26-27이다. 사도 바울이 동성애가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하나님이 내린 형벌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이 본문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도 어쩔 수 없는 그 시대의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본문을 그 앞과 뒤의 맥락에서 읽어야 하고, 더 나아가서 로마서 전체의 흐름 속에서 읽어야 한다.

로마서를 시작하는 1:18-3:20에서 사도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를 고발하며, 죄인들에게 하늘로부터 형벌이 임할 것을 예고한다. 이 형벌은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받는 현재적인 형벌과 종말에 받게 된 미래의 형벌로 나뉠 수 있다. 현재적인 형벌에는 동성애를 포함하여 온갖 도덕적인 범죄 행위가 속해 있다. 존재의 왜곡은 왜곡된 행위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고, “예외”도 없다.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졌다(3:23). 여기서 바울은 특별히 동성애만을 “차별”하여 천형(天刑)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왜곡된 행위를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주어진 동등한 형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동성애가 하나님의 형벌이라면,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자기자랑, 악의 도모, 부모 거역, 우매함, 배약, 무정과 무자비까지도 모두가 하나님이 죄에 빠진 인간에게 내린 동등한 천형이다(1:29-31).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점에서는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린 형벌을 말하는 1:18-3:20로 로마서가 시작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도는 인간의 죄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형벌을 말하기 위하여 로마서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더더구나 인간의 행위들을 차별적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행위들에 덜 혹은 더한 형벌이 주어진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로마서 1:18-3:20에서 사도가 말하는 죄인으로서 인간이해는 3:21부터 말하게 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말하기 위한 서막, 전제일 뿐이다. 하얀색을 더욱 하얗게 드러내기 위해서 검은 색을 그리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모든 죄, 모든 인간을 휩쓸어버리는 거대한 파도다. 로마서 5:6.8.10에서 사도는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원수였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무차별적으로 용서하시고 안아주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아담의 후손인 인간이 예외 없이 모두가 죄인이라는 점에서 어떠한 “차별”도 없다면, 그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도 어떠한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어떤 죄가 더 무거운 것이고, 어떤 죄가 덜 무거운 것인가는 세상의 형법에서는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도토리 키 재기처럼 무용한 논란일 뿐이다.

그러므로 “죄인”이요 “원수”였던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으로 변화되는 은혜를 받았다면, 의인이 된 그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든 불문하고- 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렇게 은혜로 변화된 사람은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긍휼히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질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롬 11:31). 많은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자신의 윤리도덕적인 혹은 교리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러한 차별과 혐오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여기며, 그러므로 그러한 차별과 혐오가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까지 여긴다. 바리새인 시절 바울이 잘못된 지식과 믿음에 근거하여 교회를 혐오하고 박해함으로써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여겼던 것과 유사하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사람들을 보면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한 것이로다.”라고 탄식어린 충언을 하고 이어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라고 책망한다(롬 11:33-34).

 

5.

에베소서 2:14이하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노래한다. 그리스도께서 원수 된 것,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써 곧 십자가에 달리셔서 허물어버리고 원수 된 둘을 하나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둘을 원수 되게 만든 중간에 막힌 담을 구체적으로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이라고 한다(2:15).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조문으로 된 법에 매달리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이해는 사라지고, 서로를 향하여 손가락질만 하게 된다. 정치와 성 등의 각종 이데올로기, 종교적인 규율과 배타성, 민족주의적인 적대감, 윤리도덕적인 규범 등등.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의 얼굴은 다양할 수 있다. “교리와 장정”을 내세워 재판하고, 교리조항을 내세워 정죄하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이미 허물어버린 담을 다시 쌓는 잘못이다. 선교는 단순히 교회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다. 타종교를 부정하고 공격하여 교회 제국주의를 만드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이룩하신 평화를 온 세상, 만물에게 전파하고 실현하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시는”(엡 1:10) 거룩한 평화사역에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

 

일부 기독교인들이 차별금지법을 극렬하게 반대하는 것은 주로 동성애 문제 혹은 전도와 타종교와의 관계 때문으로 보인다. 이를 둘러싼 각종 유언비어가 난무하기도 한다. 그러나 차별금지법에는 단순히 동성애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 사회에는 그 외에도 여러 종류의 소수자들이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초대교회 시절에 스스로 소수자로서 당시 사회로부터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기독교는 오늘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이 흘리는 눈물을 결코 남의 눈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스스로 용서받을 수 없는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들을 용납하고 포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동성애 문제만을 놓고 보더라도 성경주의적이고 교조적인 입장에서 정죄하고 차별하고 혐오하는 태도를 보일 것이 아니라, 좀 더 열린 자세로 문제를 들여다보고 토론하며 신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진실에 접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성경의 관련된 언급은 현대의 신학적, 과학적, 윤리적인 접근과 토론을 통해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해 가야 한다. 지금부터 1600여 년 전에 살았던 중국의 시인 도연명의 歸去來辭에 昨非今是라는 말이 있다. “예전에는 그르다고 여겼던 일들이 지금에 이르러 보니 옳게 여겨진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첨예하게 다투었던 일들이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리 다툴 일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는 말이리라. 기독교 역사에서 이혼과 재혼, 낙태, 여성, 노예해방 등의 문제가 昨非今是가 아니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일부종사(一夫從事)와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외치는 듯 하는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바리새인들의 율법해석에 맞서고, 사두개인들의 성전제의에 맞서고, 열심당원들의 로마증오에 맞서서 “원수사랑”을 외쳤던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성경의 가르침과 역사의 교훈 앞에서 지금 우리가 첨예하게 다투고 있는 문제와 관련해서 진솔하고 합리적인 토론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이해와 포용의 폭을 넓혀가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문제를 법을 제정하여 그 법의 강제력을 동원해서 해결해보려는 것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법의 강제력은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법의 강제력은 항상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어느 경우에도 이러한 토론과 노력의 기독교적인 기본 방향과 원리는 “우리의 평화”이신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십자가에서 몸소 보여주신 “원수사랑”이어야 한다.

 

조경철 목사(감리교신학대학교 신약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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