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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을 잃은 사람들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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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1월 18일 (월) 01:05:56 [조회수 : 3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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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은 우리가 세상에 온 것은 참 얼굴 하나 보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 나를 잊게 되는 얼굴. 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아지고, 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마음 파도처럼 일어나는 얼굴, 마주앉아 그저 바라보고 싶은 얼굴 말이다. 때로는 햇빛처럼 환하게 빛나고, 풍랑 속에서도 태산처럼 평안히 잠이 들고, 세상의 온갖 아픔을 짊어진 듯 통곡할 줄도 아는 얼굴이야말로 참 사람의 얼굴이 아니던가?

신산스런 삶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들끓던 욕망이 잦아들어 담담함에 이른 얼굴과 마주칠 때가 있다. 세월이 그의 얼굴에 새겨놓은 흔적을 바라보며 우리는 안쓰러움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낀다. 그러나 희노애락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은 오히려 낯설기만 하다. 절대적인 부동의 세계에 갇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운명의 타격이 그에게서 생기를 빼앗아 간 것일까? 그 앞에 서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마치 죄인이 된 것 같아 몸둘 바를 몰라 한다. 생때같은 자식들을 잃은 부모의 얼굴이 그러하고, 지속적인 폭력에 시달린 이들의 얼굴이 그러하다.

나찌의 절멸수용소에서 살아남아 평생 증언자로 살았던 엘리 위젤의 책 <벽 너머 마을>에 등장하는 마이클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이다. 그는 고향인 헝가리에 갔다가 비밀경찰에게 잡혀 투옥되고 고문을 당한다. ‘기도’라는 고문인데,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모습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문자들은 원하는 대답을 할 때까지 마이클을 벽 앞에 며칠이고 세워둔다. 잠도 잘 수 없고, 벽에 기댈 수도 없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의 공포를 견디기 위해 마이클이 붙드는 것은 ‘기억’이다. 그는 동료를 지키기 위해 극심한 고통을 감내한다. 그것만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나중에 감방으로 옮겨졌을 때 그는 표정을 잃은 한 소년과 만난다.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얼굴이 마치 벽처럼 느껴졌다. 그는 소년의 얼굴에 표정이 떠오를 때까지 춤추고, 웃고, 손뼉치고, 더러운 손으로 제 몸을 긁고, 혀를 내밀어도 본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기에. “어느 날이고는 얼음은 깨어질 거고 그리고 나면 너는 미소 짓기 시작하게 되겠지. 내게 있어 그 미소는 우리의 힘, 우리의 약속의 증거가 될 거야.“ 한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오게 만드는 것, 그를 부동의 세계에 가두던 얼음을 녹여주는 것, 세상을 더 이상 고향으로 인식할 수 없어하는 이들에게 고향이 되어 주는 것, 바로 그것이 인간이 된다는 말이 아닐까?

양부모로부터 학대 받다가 결국 죽음에 이른 정인이 이야기를 들으며 말문이 막혔다. 그 무고하고 연약한 생명에 가해진 무자비한 폭력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만든다. 사진 속의 정인이는 점점 표정을 잃어가고 있었다. 심지의 불꽃이 스러지듯 생기를 잃은 그 얼굴은 모든 것을 체념한 것처럼 보였다. 그 얼굴이 우리의 양심을 고발한다. 무정하고 사납고 교만하며 자기애에 사로잡힌 우리 문명의 본질을 돌아보라고. 정인이의 양부모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잊는다.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종교 특히 개신교회는 사회 통합을 저해하는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가장 잘 믿는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이들이 오히려 시민적 상식으로부터 멀어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고, 가름의 저편에 있는 이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일이 다반사다. 성찰적 자세를 잃어버리는 순간 종교는 허위의식이 되고 만다. 허위의식으로 변한 종교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무능력하다.

엘리 위젤은 <벽 너머 마을> 말미에 일체의 인간적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소년을 깨우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마이클을 사로잡고 있던 영혼의 어둔 밤이 물러갔다고 말한다. 그 소년의 이름은 엘리에젤이었다. ‘신은 내 기도를 이루셨도다’라는 뜻이다. 한 소년의 얼굴에 인간적 표정을 돌려주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경향신문, 2021/01/09, '사유와 성찰' 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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