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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사회, 더 답답한 교회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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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12월 31일 (목) 04:12:03 [조회수 :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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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윤석열 사태를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답답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윤석열을 검찰총장에 임명하면서 살아 있는 권력에게도 칼을 대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조국을 법무부 장관 후보로 내세우자, 신임 검찰총장은 대통령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려는 듯 그의 배후를 수사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는 조국이 법무부 장관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때 조국이 가르친 서울대생들을 비롯해서 여러 대학의 학생들이 조국의 이중성을 지적하면서 그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평소 강연에서 혹은 수업시간에 도덕적인 말을 많이 해서 주목을 끌었는데, 알고 보니 그의 말과 행동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조국에게 도덕적인 흠은 있지만 법적인 하자는 없다고 말하면서 조국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했다. 글쎄 공직자에게 특히 법을 집행해야 하는 법무부 장관에게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어도 좋다니 납득할 수 없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도덕성은 아주 중요하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죄를 도덕적인 죄(sin)와 법적인 죄(crime)로 나누고 도덕적인 죄를 아주 중시한다. 예수님이 남을 미워하는 것은 그 사람을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은 도덕적인 죄가 법적인 죄의 씨앗이 된다는 점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러니 법무부 장관에게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다면, 그것은 결격 사유임이 분명하다.

대통령일 뿐 아니라 가톨릭 신자인 문 대통령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은 정말 실망스러운 일이다. 아마도 그는 조국을 그의 후계자로 키우려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떤 일이나 사람에게 집착하면 문제점이나 흠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조국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서 문 대통령의 분별력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윤석열이 조국의 비리를 들추어내자 문 대통령의 심기가 몹시 불편했던 모양이다. 살아 있는 권력에게도 칼을 대라고 부탁한 대통령이 추미애를 시켜서 윤석열을 총장직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초록이 동색이라고 대통령도 그가 키우려던 조국도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위선자들임이 드러났다.

결국 조국의 부인이 실형을 받게 되자 검찰총장에 대한 대통령의 처사가 잘못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다. 더구나 사법부가 거듭해서 검찰총장의 손을 들어준 것을 보면, 대통령이 두 가지 실수를 저지른 것이 분명하다. 하나는 조국을 바로 보지 못했다는 점이고, 다음은 성실하게 일하는 윤석열을 믿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동안 정치권을 뒤흔든 검찰총장 사건은 전적으로 대통령에게 그 책임이 있다. 윤석열을 임명한 사람도 대통령이고, 조국을 민 사람도 대통령이고, 추미애를 내세워서 윤석열을 몰아세운 사람도 대통령이다. 이제 대통령은 진솔하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 한다.

그가 그동안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면서 검찰개혁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검찰개혁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 울산 시장 사건이나 월성원전 사건 같은 권력형 비리를 열심히 수사해 온 소신 있는 검찰총장을 몰아내려고 한 대통령이 검찰개혁을 내세우다니! 그러면 검찰을 개혁해서 검찰을 권력의 시녀로 만들겠다는 말인가? 

사법부에서 현 정권의 처사에 무리가 있었다는 것을 연이어 밝히자 일부 여당 사람들은 그 결과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런 판결을 내린 판사의 자질을 거론하면서 사법부의 개혁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들은 분별력을 잃은 것이 분명하다. 대통령의 호위 무사들에게는 영혼이 없어 보인다. 

이제 사법부에도 손을 대고 싶다는 말인가?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판결을 했다고 해서 판사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소위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이란 말인가! 5공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든다. 참으로 답답하다. 

이런 무분별한 행태가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문 대통령이 도덕성을 무시한 것처럼, 교회에도 윤리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재해석하면서 윤리적인 죄를 법적인 죄 못지않게 중시하셨는데, 일부 교회에서는 도덕 무용론을 내세운다. 

그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행위를 무시한다. 혹은 우리가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고 의인으로 간주되었으니 어떻게 살더라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때 구원파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해진 일이 있었는데, 그 구원파가 도덕 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서 나왔다. 

어떻게 성경의 내용과 맞지 않는 이런 교리가 나올 수 있을까? 이것은 한 가지에만 집착하는 데서 나왔다. 개혁자들은 행위를 중시하는 가톨릭에 반대하면서 믿음을 내세웠다. 믿음에 집착하다 보니 그들의 눈에는 행위를 언급하는 성경의 기록이 보이지 않았다. 행위 무용론을 밀고 나가다 보니 도덕 무용론이 나왔다. 문 대통령도 그랬지만, 어느 한 가지에 집착하면, 분별력이 흐려진다.

그리고 조국이나 문 대통령의 언행이 다른 것처럼, 목사들이 강단에서 말하는 것과 그들의 삶이 다르다. 지금 많은 한국교회의 목사가 위선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이 강단에서 말해야 하는 성경의 내용이 육신을 지닌 인간으로서 따라가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들의 위선은 도를 넘는 경우가 많다. 

한 예를 들면, 목사들은 십일조를 강조하면서 수입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교회에 바친 헌금은 모두 하나님의 돈이라고 한다. 재정이 부족한 교회에서야 그런 일이 별로 일어나지 않지만, 돈이 남아도는 교회에서는 올바로 재정을 운용하려는 재정부장이라면 교회 돈을 쓰려는 목사와 다투게 마련이다. 내 후배 장로 한 사람은 재정부장이 되어서 담임목사와 싸우다가 섬기던 교회를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한국의 개신교회는 목사의 권위주의가 판을 치는 곳이다. 루터가 만인제사장주의를 내세웠지만, 그것이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다. 물론 임원회나 기획위원회에서 교회 운영에 관한 안건을 토의하지만, 거기에 모인 위원들은 가급적 담임목사의 의견을 따르려고 한다. 목사가 마음만 먹으면 교회법에서 금하는 것도 임원회에서 통과시킬 수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대통령의 호위 무사들처럼, 목사의 영혼 없는 호위 무사들이 목사의 눈치를 보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여러 교회에서 자행되는 세습은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지금 정치권에서 여당이 숫자로 밀어붙이는 것보다 훨씬 더 무법적인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고 말하는 목사들이 이런 일을 자행하고 있으니 이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눈길이 느껴지지 않는단 말인가! 

그리고 목사들의 고집은 대단하다. 지금은 신대원이 생겨서 목사의 수준이 많이 높아졌지만, 한때 일반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신학대학에 갔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지금 지적 수준이 높고 소명의식이 투철한 목사가 많지만, 그들 중에는 지능이 낮은 사람도 많다. 그들로 인해서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 대부분이 일어나고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열등감에 시달리던 그들이 목사가 되면 영적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과시하면서 교인들 위에 군림하려고 한다. 그에게 선의의 조언을 하는 사람조차도 자기를 무시하는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자기방어 충동을 발동시킨다. 그래서 조언을 받아들이려고도 양보하거나 타협하려고도 하지 않고 매사에 고집을 부린다. 

요즘 가나안 성도들이 급증하고 있는 것은 교인들이 목사들의 이런 행태에 크게 실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들이 기독교 신앙 자체에 회의를 느끼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을 가나안 ‘성도’라고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은 신앙을 버린 것이 아니고 교회를 버렸다. 

그런데 자기가 오랫동안 다니면서 헌신하던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아주 힘든 결단이다. 누구나 웬만하면 자기 교회에 머물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 더구나 다른 교회로 가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아예 나가지 않기로 결심한다는 것은 그가 교회에서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처는 교인들과의 교제 가운데서 입을 수도 있지만, 목사로 인한 경우가 많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교회에 남아 있는 교인들 가운데에도 교회에 대한 실망을 안고 지내는 교인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교회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좋은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참고 견딘다.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고, 교회에서 무법적인 일이 일어나고, 목사가 지겨워질 때면, 하나님이 해결해주실 것으로 믿고 묵묵히 기다린다. 그런 그들의 교회 생활에는 기쁨도 열의도 없다. 

이렇게 일부 교인들은 떠나고 남아 있는 교인들은 열의를 잃기 때문에, 교회가 서서히 기울게 된다. 통계에 나타나는 것처럼,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인도는 해마다 낮아지고 교인 수도 급감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천국 문을 가로막고 서서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질책하신 일이 생각난다. 그들은 엄청난 죄를 지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은 교인들을 교회 밖으로 몰아낸, 교회를 기울게 만든 교회 지도자들을 호되게 질책하시지 않을까! 

목사들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그들이 세속화했기 때문이라고 교인들을 탓하고 싶을 테지만, 그들이 교회를 버리는 것은, 한국의 현 정국이 대통령에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대부분 그 책임이 지도자인 목사들에게 있다. 장로들이 분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목사이다. 

그리고 세상의 지식수준은 날로 높아지고 폭도 넓어지는데, 대부분의 목사는 항상 제자리걸음이다. 그들은 넘쳐나는 정보를 외면하고 성경 안에만 갇혀서 산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5백 년 전의 신학에 얽매어 있다. 그런데 교인들은 급변하는 사회 안에서 새로운 정보를 접하면서 살기 때문에, 목사와 교인들의 지식과 사고의 격차가 날로 벌어진다. 

그래서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는다. 지금은 무조건적인 충성이 미덕인 전제군주 시대가 아니고 민의를 중시하는 시대, 대화와 소통의 시대이다. 그런데 교인들을 이해시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목사는 교인들에게 자기주장을 우격다짐 식으로 주입시키면서 충성을 요구한다. 달리 말하면, 열린 시대에 닫힌 교육을 일삼는다. 

이런 상황에서 목사는 자기 나름대로 답답하고 젊은 교인들에게는 불만이 쌓인다. 그러면 그런 분위기에서 숨쉬기 어려운 젊은이들은 보따리를 싼다. 결국 교회에는 전통적 사고에 익숙해진 혹은 갈 곳이 없는 노인들만 남는다. 

어제는 나와 가깝게 지내던 안수집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 부인이 결혼 전에 성당에 나갔었는데, 이제 성당으로 가자고 해서 성당으로 나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부부는 그동안 열심히 주일학교에서 그리고 성가대에서 봉사하다가 한동안 교회에 나오지 않았었다. 

나는 그 부부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에 떠나지 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들이 가나안 성도가 되는 것보다는 성당으로 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거기 가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라고 격려했다. 

이렇게 교인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참으로 안타깝다. 그들의 이탈을 막을 수는 없단 말인가! 

정부에서 하는 일이 답답하지만,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더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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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봉성도 (122.101.20.19)
2021-01-04 07:37:36
최재석님의 칼럼을 읽으면서 막힌 속이 뻥 뚫리는듯 합니다.
구구절절 옳고 맞는 말씀이시니 흠을 잡을 게 없군요.
백퍼 공감을 합니다.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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