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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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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12월 11일 (금) 23:33:07
최종편집 : 2020년 12월 11일 (금) 23:34:23 [조회수 : 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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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완성한다

코로나 시대를 사는 지식인의 예수찾기

 

안치용 저 | 마인드큐브 | 2020년 11월 30일

정가 17,000원

 

책소개

이 책은 명징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빈틈 없는 논리를 전개하며 성경의 진면목을 발견하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줄기를 세워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예수의 모습을 입체화하는, 결국엔, 막무가내식으로 시대와 예수를 역행하며 보수화한 현대 한국교회를 향해 일갈하는, 진실을 앞에 두고서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은 진보주의자 안치용의 치열한 신앙고백을 담았다.

이 책은 예수와 모세를 각각 다룬 1ㆍ2부와 보론 성격 3부로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1부와 2부는 내가 행한 예수찾기 또는 ‘예수 해방’의 기록이고, 3부 보론은 작금의 개신교 상황을 눈감을 수 없어서 위기의 유래와 현상 등을 정리하여 보았다. 1부 ‘예수’는 부활, 죽음, 탄생 순으로 시간을 소급하는 방식을 취했고, 2부 ‘모세’는 기독교인이 흔히 직면하는 모세5경 상 신앙의 난관을 포인트 식으로 정리했다.

 

저자 소개

저 : 안치용

개를 키운다. 개 이름은 ‘스콜’과 ‘걸리버’이다. 셰틀랜드시프도그 종이다.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 사회에선 보통 한국CSR연구소 소장으로 소개된다.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KSRN) 집행위원장, 지속가능청년협동조합 바람 이사장 등으로도 활동한다. 시민사회를 무대로 크게 두 방향의 일을 한다. 언론?연구 운동을 통해 지속가능 및 사회책임 의제를 확산하고 관련 정책을 수립하는 데 힘을 보태는 한편 지속가능바람청년학교, 대한민국지속가능청소년단(SARKA) 등을 운영하면서 대학생?청소년들과 지속가능성을 비롯한 미래 의제를 토론하고 공유하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가천대 저널리즘 MBA 주임교수,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대우교수, 한국외대와 경희대의 겸임교수(경영학)를 지냈고, 대학, 산업계, 시민사회, 공공 등 여러 논의의 장에서 사회적 책임과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문학 신학 등을 공부하고 관심 있는 분들과 토론한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 오마이뉴스 등의 매체에 고정코너를 운영하고 영화 문학 페미니즘 현실정치 문화 등에 관한 글을 이곳저곳에다 쓴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원이다.

경향신문에서 22년을 경제부·산업부·문화부·국제부 기자로 활동하였고, 2007년부터 2013년 퇴사까지는 사회책임 전문기자를 지냈다.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을 1991년 졸업하고, 서강대에서 경제학 석사(2009), 경희대에서 경영학 박사(2013)를 받았다. 현재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 중이다.

역서로는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저서로는 『블루오션의 거상』, 『10년후 당신에게』, 『지식을 거닐며 미래를 통찰하다』, 『대한민국행복지수』, 『트렌치 이코노믹스』, 『한국의 보노보들』, 『내 인생을 바꾼 한번의 만남』, 『청춘은 연대한다』, 『내 아들 내 딸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회적기업 49』, 『세상에 희망을 일구는 사회적기업 63』, 『착한 경영, 따뜻한 돈』, 『청춘을 반납한다』, 『내 청춘의 힐링캠프』, 『아프니까 어쩌라고』, 『바보야, 문제는 권력집단이야』 등이 있다.

 

책 속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기쁨 중에 가장 큰 기쁨은 당연히 예수를 통한 인간과 세상의 구원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부수적으로는 역사에 드러난 인간 예수와 그의 사유를 성찰하며 그와 대화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지 싶다. 기독교인이 되는 이러한 기쁨을 확인하면서 다른 기독교인은 물론 비기독교인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는 것이 애초에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였다. 뒤늦게 기독교에 입문한 어느 진보주의자의 예수찾기 정도를 목표로 했다.

여전히 예수가 ‘참신이자 참인간’임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나에게 있는 건 그가 그일 것이라는, 믿음보다는 희망에 가까운 마음이다. 믿음은, 의심과 미망 속에서 행하는 그를 향한 나의 말걸기가 끝내 외면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마침내 어느 순간 응답받으리라는, 두려움과 긴장 위에서 작동하는 희망을 통과하여 만나게 된다.

신은, 인간이 단박에 파악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뒤 내용과 행태를 제시할 수 있는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신은 그를 찾고자 하는 사람 앞에 그에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을 기꺼이 보여주지만, 내 생각에 그 길은 항상 미로이다. 성서라는 인간의 언어로 된 텍스트 또한 그 미로의 한 형태다. 그중 계시의 가장 유력한 가능성의 하나로 제시된 현존 성서에서조차 해석의 무한한 다층성이 발견되며 그 속에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 아래 자신에겐 적합한 경로를 찾아 나선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꼭 성서를 통해서만 나에게 말을 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세계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성서로 그는 세계를 통해서도 나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다.

동일인이든 아니든 예수가 하나님의 기획 전체를 알고 있었다면, 부활하여 승천할 것까지 미리 계획하고 인지하고 있었다면, 그 십자가 사건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할리우드 액션’이 된다.

큰 걱정거리는 “우리는 신천지가 아니고, 우리는 전광훈 교인이 아니다.”라는 말속에 있다. 예수의 더 큰 우환은 신천지와 사랑제일교회를 뺀 한국의 기독교이지 않을까.

하나님의 ‘너’가 왜 자신이 하나님의 ‘너’인지 알 수 없듯이, “하나님의 ‘너’가 아닌 이”들도 왜 자신들이 하나님의 ‘너’가 아닌지를 마찬가지로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우리는 또 다른 논란과 마주치게 된다. 이 논의를 진행하기 전에 짚고 넘어갈 것은 언제나 인간이 문제라는 점이다. 하나님과 예수에겐 문제가 없다. 위로부터 전부를 보여준다고 하여도 인간은 아래로부터 볼 수 있는 것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볼 수 있는 것’의 범위는 또 다른 신학적 논의의 주제로 여기서 다루지는 않는다. 지금의 또 다른 논란은 어쩌면 ‘범위’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는데, 십자가의 사건에 혹시 편한 말로 ‘할리우드 액션’이 개입한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다.

심층적이고 전문적인 연구를 거쳐야 할 영역이지만, 신학자가 아닌 일반인의 눈높이에서 예수의 죽음을 고찰해보면, 일단 ‘할리우드 액션’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수는 진짜로 끔찍한 고통 속에서 인간처럼 죽어갔다.

예수가 이중인격이라는 성격장애를 겪었을까.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또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그런 판단을 내릴 개연성이 없지는 않다. 그런 판단은 예수에게서 신성을 완전히 배제했을 때 가능하다.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정신병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같은 인간적인 관점 아래에서도―사실 ‘인간적인 관점’이란 표현은 무의미하다. 우리에겐 신적인 관점이 불가능하기에 그렇다면 당연히 인간적인 관점만이 주어진다. 다만 그것이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를 확인할 수 없다는 한계 아래에서 우리가 신적인 관점을 상상할 수는 있다―인간 예수에게 당연히 존재할 인성 외에 어떤 식으로든 신성이 함께 존재한다는 전제를 수용하는 순간 이중인격 논의는 무용해진다.

이스라엘이 선민이란 주장은 유대인이 ??구약성서??를 작성한 연유로, 즉 예수 이전 시대에 하나님의 흔적에 관한 아마도 유일한 기록을 남겼다는 이유로 인해 이스라엘 외의 다른 ‘너’들이 주목받지 못한 상황이라고 생각할 법도 하다. 그리하여 ??신약성서??에 이르면 ‘나와 너’의 구조는 마침내 하나님과 인류 전체 간에 성립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선포된다. 게다가 내가 생각하기에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방식은 진정한 ‘나와 너’로 바뀌었다.

다시 말하자면 모세는 염전이자 소금이다. 신적인 존재에서는 특수성과 보편성이 동시에 실현되기 때문이다. 상응하여 모세가 실존 인물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만일 실존 인물이었다면 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복수의 인물이었는데 그들의 이야기가 하나의 전승으로 만들어졌을까 하는 또 다른 의구심이 뒤따라온다.

--- 본문 중에서

 

동시에 정신분열적이고 가학적이며 폭력성에 사로잡혔다는 신(神)의 혐의 또한 벗겨진다. 신이 그런 신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런 인간이었던 것이다.

유대교를 현실 세계에 안착시킨 사람들은 아브라함·이삭·야곱과 모세를 현재 토라의 형태로 유대인 공동기억 안에 주조(鑄造)하느라 혼신의 힘을 다했고, 그 결과 어디로 갈지 어떤 모습으로 굳을지 짐작할 수 없던 끓어오른 용암 같은 액체성의 역사는 하나의 경로로 고체화하여 예수와 그의 동시대인 앞에 지반(地盤)으로 놓였다. 아무 때고 역사성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종교의 관점을 배제한 채 철저히 세속화의 관점을 취하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유대인들에 의한 역사의 날조처럼 보일 터이다. 내 생각은 다르다. 그것은 날조된 역사가 아니라 주조된 역사이다. 분명 진짜 역사가 아닐 가능성이 크지만 진짜 역사를 영원히 알 수 없기에 진짜로 믿어진 또는 더 정확하게 진짜로 주조된 역사 말고는 어떤 역사도 진짜 역사로 주어질 수 없다. 주조 과정에서 거품을 빼지 못해 형태의 결함을 노출할 수는 있겠지만 형태만은 결함 없는 ‘진짜’인 셈이다. 주조 행위와 주조 틀을 통하여 산출된 고유한 형태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이며 그것이 새로운 역사의 무대를 구성한다.

마르틴 부버가 말한 ‘나와 너(Ich und Du)’ 상호 호명에 근거한 거품 없는 직접성, 다른 누구 혹은 무엇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 배타적 연결을 뜻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불순물을 허용하지 않는 직접성의 연결의 주체가 언제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신이 “너희의 하나님이 되겠다.”라는 신의 결단이 선행한다. 하나님이 항상 ‘나(Ich)’이다. 하나님이 ‘너(Du)’가 되는 일은 없다.

그 전에 많은 교회가 죽어야 한다. 옛것은 죽고 새것이 태어나야 한다. 옛것이 아직 살아있고 새것은 온전하게 태어나지 못한 사이를 소망을 품고 견뎌내는 한편 옛 괴물과 막간에 등장하는 변용 괴물에 맞서 싸우는 것이 원래 기독교 정신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안타깝게도 주어진 확신 말고는 확신할 다른 어떤 방법도 없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그 확신은, 독단에 빠진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삶을 반성하고 신앙을 점검하는 길 위에서 이루어져야 올바른 확신에 다가갈 수 있다. 마침내 실존적 고독 안에서 스스로 신을 대면해야 하겠지만, 성서와 교회로부터 받는 감화와 소통이 자신의 대면과 그것에서 연유한 신앙을 점검하는 잣대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절대순종의 철칙 아래 불순종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온갖 재앙을 내리는 신. 이런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해한 하나님의 뜻을 표현했는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의심은 신에 대한 의심이라기보다는 신에 대한 신뢰를 지속하려는 자기보호기제일 수 있다. 즉 하나님이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의 발로이다.

은과 금은 없더라도 일어나 걸으라고 할 권능을 지닌 베드로를 되찾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아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우리에겐 무엇보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필요하다. 극단적으로 말해 베드로는 없어도 되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그들이 납치한 예수, 과연 구해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 때가 있었을까마는 정말로 ‘진짜 예수’가 필요한 시대이다. 여기저기서 마치 자신이 예수인 양 예수의 대리인인 양 신도들을 현혹하며 예수의 이름을 욕보이는 거짓 선지자들이 넘쳐난다. 특히 코로나19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바야흐로 세계적인 재앙의 시대에 돌입한 이 때, 이들은 종교의 경계를 넘어 반사회적 행동을 일삼으면서 사회 질서를 위협하고 있다. 예견된 일이다.

『한국자본권력의 불량한 역사』, 『50대 인문학』, 『선거파업』 등의 저술과 사회활동을 통해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탐색하여 더 나은 세상의 비전을 찾고자 노력하는 진보주의자 안치용은 ‘기독교인임이 부끄러운 세상’을 반성하기 위해 ‘진짜 예수’의 진면목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지금의 현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보수주의 신앙이 입체적인 예수를 거부하고 ‘복음주의’라는 일면만 보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명징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빈틈 없는 논리를 전개하며 성경 속에 나타난 예수의 진면목을 드러내보인다. ‘예수는 역사적 사실을 뛰어넘는 신앙의 요체며, 믿음은 논리적인 게 아니’라고 말하는 복음주의의 논리조차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확고함을 통해 오히려 반박하고 있다. “예수가 잠자는 내 영혼을 힘차게 일깨웠음은 물론이고 내 사유의 강력한 근거가 되어주었다는 점은 적시한다.”는 신앙고백의 그의 진정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 천국’의 근시안적인 믿음이 아니라 거대한 흐름을 통해 역사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안치용은 철저한 자기 반성을 통해, 때로는 불경한 질문의 자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동일인이든 아니든 예수가 하나님의 기획 전체를 알고 있었다면, 부활하여 승천할 것까지 미리 계획하고 인지하고 있었다면, 그 십자가 사건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할리우드 액션’이 된다.” “예수가 이중인격이라는 성격장애를 겪었을까.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또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그런 판단을 내릴 개연성이 없지는 않다. 그런 판단은 예수에게서 신성을 완전히 배제했을 때 가능하다.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정신병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신앙의 존엄 앞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질문까지 차근차근 밟아들어간다. 거침없는 논리 전개로 이런 질문들에 하나하나 답을 찾는다. 질문을 멈추지 않는 힘은 결국 불경함을 파훼하는 단정한 논리로 승화한다.

이렇듯 예수와 하나님이 기독교인의 독점물이 아닌 모든 인류의 복음이 되기 위해 ‘교회, 교회정치, 교회관계, 교회네트워크’ 등을 넘어서 오직 예수에 집중한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인류 역사상 우리에게 명시적이고 확고하게 주어진 계시는 예수 외에 없다.”며, “있어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없어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원래 답의 정의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이 진술은 예수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싶다.”라고 진보주의자의 ‘예수찾기’의 치열한 결의를 전하고 있다. 그야말로 자신의 신앙을 논리적으로 이해해보고픈 진보적 기독교인에게 전하는 ‘복음’이다.

“신은, 인간이 단박에 파악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뒤 내용과 행태를 제시할 수 있는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신은 그를 찾고자 하는 사람 앞에 그에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을 기꺼이 보여주지만, 내 생각에 그 길은 항상 미로이다. 성서라는 인간의 언어로 된 텍스트 또한 그 미로의 한 형태다. 그중 계시의 가장 유력한 가능성의 하나로 제시된 현존 성서에서조차 해석의 무한한 다층성이 발견되며 그 속에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 아래 자신에겐 적합한 경로를 찾아 나선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꼭 성서를 통해서만 나에게 말을 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세계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성서로 그는 세계를 통해서도 나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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