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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비루함이냐, 소박한 숭고함이냐” 나훔1장 1절~15절
김명섭  |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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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12월 02일 (수) 14:06:18 [조회수 : 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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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비루함이냐, 소박한 숭고함이냐” 나훔1장 1절~15절

 

1.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지혜

 

① (1절~2절)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 요나서보다 약 백년 후에 기록된 나훔서는 요나의 후속편에 해당한다. 요나가 ‘니느웨에 대한 회개와 구원’을 전했다면, 나훔은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와 심판’을 전하고 있다. 요나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전했다면, 나훔은 ‘하나님의 투기와 보복’을 전하고 있다. 한마디로 요나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반면, 나훔은 ‘하나님의 공의’를 증거 한다. 무엇보다 요나가 ‘이방인’ 니느웨 구원의 패러독스(paradox, 逆說)를 통해 ‘선민’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했다면, 나훔은 용서 받은 ‘이방인’ 니느웨가 구원에 합당한 삶을 유지하지 않은 결과로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을 예고한다. 이를 통해 ‘선민’ 이스라엘도 택하신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으면 니느웨의 비참한 전철을 밟게 될 것을 엄중하게 경고하면서 선민 이스라엘에게 ‘타산지석’의 지혜를 촉구하고 있다. 나아가서 요나와 나훔은 구원의 조건이 ‘이방인이나 선민이냐’가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삶에 달려 있으며, 회개와 구원이 끝이 아니라 회개와 구원에 합당한 삶을 지속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동일하게 증거하고 있다.

 

② (3절~6절)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

▶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까닭은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다. 하지만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회개치 않는 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여호와의 길은’ 하나님께서 회개치 않는 죄인을 심판하시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리킨다. ‘회리바람과 광풍, 구름과 티끌’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모든 피조물은 바람 앞에 한낱 등불 같고 한줌의 재와 같이 사라지는 연약한 존재일 뿐이다. ‘바다와 강을 말리우시나니’ 홍해와 요단의 기적처럼 바다와 강으로 심판하신다.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바산은 요단동편의 비옥한 토지이고 갈멜은 요단서편의 요충지다. ‘레바논의 꽃이 아우는도다’ 화려한 과수원과 울창한 백향목이다.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지진과 화산이다. ‘그의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솟아 오르는도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사람들이 의지하던 땅과 바다, 산과 강 등 사람이 의지하던 온 세상 만물들이 모두 한순간에 함께 무너져 내릴 것을 경고한다.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자도 당할 자도 없다.

 

③ (7절~8절)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그가 범람한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 (메시지성경) ‘하나님은 선하시다. 힘겨울 때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도움을 구하는 자는 누구든, 딱한 사정에 처한 자 모두를 기꺼이 맞아 주신다. 그러나 사람들이 도피처로 삼는 곳은 모조리 쓸어버리신다. 누구도 하나님을 피해 도망칠 수 없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는 그가 의지하던 것과 함께 멸절되지만 이와 달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긍휼로 구원하시는 심판의 양면성을 증거 한다. (시103:13~15)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성공도 영원한 실패도 없다. 국가의 흥망성쇠나 인생의 성패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 앞에서 무력한 인생

 

① (9절~10절) “너희가 여호와를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대적으로 인한)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이 마른 지푸라기 같이 다 탈 것이어늘”

▶ (메시지성경) ‘하나님을 거슬러 꾀를 쓰느라 왜 시간을 낭비하느냐? 그런 계략은 무엇이든 끝장나고 만다. 말썽을 피우는 자들, 두 번 다시 기회는 없다. 기름을 흠뻑 먹인 마른 장작더미처럼, 활활 타서 재가 될 것이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난 앞에서 ‘다양한 의견수렴을 통한 집단지성의 힘’을 모색하는 등의 인간적인 대책이나 세속적인 방법은 무력할 뿐이다. 재난을 통해 철저한 회개와 성찰을 요구하시는데 이를 만회하려고 알량한 해법으로 기량을 펼쳐서 원상복귀를 모색하는 일은 헛되고 어리석은 짓이다.

 

② (11절~12절상)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 나와서 사특한 것을 권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장하고 중다할찌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 (메시지성경) ‘하나님께 맞서려는 악한 음모들이, 니느웨에 개미 떼처럼 바글거린다. 유혹과 배신, 온갖 거짓말들을 지어내는 원산지다. 이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너, 지금 세상 꼭대기에 있다만 곧 바닥으로 고꾸라져, 모든 박수와 갈채를 잃어버릴 것이다’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왕하18장~19장’에 등장한다. 남유다 히스기야시대에 앗수르왕 산헤립의 대군을 거느리고 말로 심리전을 펼쳤던 술 맡은 관원 ‘랍사게’다. ‘너희 중에 나와서’ 그가 유다방언을 유창하게 구사한 것으로 보아 그는 앗수르에 전향한 유대인, 친일파 같은 배신자로 예측된다. 랍사게는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이라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 것과 여호와는 예루살렘을 앗수르왕의 손에서 건져낼 능력이 없다고 조롱하며 항복을 종용했다. (왕하19:6~7) ‘이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고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바 나를 능욕하는 말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저의 속에 두어 저로 풍문을 듣고 그 본국에서 저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위기의 순간에 선포된 이사야의 예언대로 하나님을 의지했던 남 유다는 마침내 대승을 거두게 된다. 예나지금이나 대적자 사단은 마치 랍사게처럼 ‘너희 중에 나와서’, ‘사특한 말’로 미혹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훼방하는 수법을 즐겨 쓴다.

 

③ (12절하~13절)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게 하였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너희 결박을 끊으리라”

▶ ‘나훔’이라는 이름의 뜻은 ‘위로자’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고 경외하던 이들에게는 ‘멍에와 결박’을 끊는 해방과 위로의 소식이다. 나훔은 니느웨로 대표되는 앗수르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노아의 홍수, 출애굽의 열 가지 재앙과 같은 ‘심판과 구원의 양면성’을 전한다. 나훔을 비롯한 모든 예언자들은 열국의 흥망성쇠를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 되심을 나타냄으로 모든 인생들에게 인생무상(人生無常)의 지혜를 선포하고 있다. 전대미문의 재난은 인생의 무력함을 깨닫고 삶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만 하나님으로 경외하는 삶으로 돌이키는 회개와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3. 비루함 VS 숭고함

 

① (14절)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예비하리니 이는 네가 비루함이니라”

▶ 참된 신앙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오직 하나님만’ 하나님으로 섬기는 삶이다. 우상숭배는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모든 행위를 통칭한다. (롬1:22~23) ‘스스로 지혜 있다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인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썩지 않을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바꾸는 죄악을 끊임없이 자행해왔다. 나훔은 이제 천하를 호령하던 대제국 ‘앗수르(니느웨)’에 대한 철저한 멸망을 선포하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단언한다. ‘이는 네가 비루함이니라’ 비루하다는 단어는 ‘가볍고 천박하고 무가치하다’는 뜻이다. 대제국 앗수르의 영토와 재물, 힘과 권세가 대단해 보이지만 역사의 이슬로 사라져버릴 비루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물질’, ‘건강’, ‘자녀’에 최고의 가치로 두고 산다. 모두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변하는 것, 사라지는 것, 내 맘대로 안 되는 것, 두고 가는 것’이다. 예언자들이 전하는 요지는 물질, 건강, 자녀가 소중하지만 결코 섬김의 대상이 아니고 오직 물질의 주관자, 건강의 주관자, 자녀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야 한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우상숭배는 ‘화려하지만 비루한 삶’을 살게 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소박하지만 숭고한 삶’을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소박하지만 숭고한 삶의 가장 뚜렷한 ‘표본(標本)’이시다.

 

② (15절) “볼찌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찌어다”

▶ 오직 하나님만 하나님으로 섬기는 삶,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아름다운 소식’, ‘화평을 전하는 자’의 복음이다. 나훔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모습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네 절기를 지키고’ 절기는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척도는 예배다. ‘네 서원을 갚을찌어다’ 서원은 의뢰와 간구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가리킨다. 기도는 단지 요청으로 끝나면 안 되고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감사와 찬송까지 나가야 한다. 기도는 신앙의 본질이다. 신앙생활은 예배생활이고 기도생활이다. 수능만점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전하는 ‘교과서를 중심으로 학교수업에 충실했다’는 단순하고 평범한 고백처럼 신앙생활은 ‘예배와 기도’로 충분하다.

 

③ (15절하)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 앗수르와 애굽의 패권다툼이라는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었기에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전란이 그치지 않았다. 이런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평화를 회복하는 길을 ‘절기와 서원’ 뿐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증거하고 있다. 외적인 환경과 상황이 아니라 내적인 신앙,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답을 찾았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흡사하다. 임진왜란의 명분은 일본이 명나라를 치고자 하니 조선은 일본에 투항하여 길을 내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였다.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은 전통강자 미국과 신흥강자 중국의 패권다툼 속에서 줄타기외교를 할 수밖에 없는 위태로운 현실이다. 무엇보다 오늘 우리는 전대미문의 재난 속에서 ‘방역’과 ‘경제위기’라는 두 마리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직면하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선지자 나훔은 어찌 할 수 없는 외적인 변수(變數)에 휩쓸려 요동하기보다 삶의 주관자로 믿고 고백하는 내적인 상수(常數),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돌이키고 어려울 때일수록 신앙의 기본기에 집중하고 충실해야 한다는 단순하고 평범한 지혜를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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