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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공산주의라면 저도 공산주의자이고 싶습니다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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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11월 30일 (월) 23:46:59 [조회수 : 1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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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을 전후한 시대에 강성갑이라고 하는 특출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나 주로 김해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그분은 저로선 성함조차도 어딘가에서 들었던 기억만 희미할 뿐 생소한 것이 사실이지만, 특출한 인물임이 틀림없습니다. 아니 걸출한 인물이지요.

물론 크게 유명하신 분은 아니지만, 꼭 유명해야 특출하거나 걸출한 인물은 아니지요. 세상의 스포트라이트가 미치지 않는 조명의 사각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할 일을 하다가 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래서 저는 지금 그런 인물 중의 한 분 강성갑을 여러분께서 어렴풋이나마 보실 수 있도록 미력한 필력으로이지만 조명의 불을 켜 볼까 합니다. 물론 그분을 알지 못한 분들께 한한 것이지만 말이지요.

1912년생인 강성갑 그는 어린 시절 한학을 공부하다가 신학문을 위해 열세 살 때 의령보통학교에 들어가 졸업, 마산상업학교에서 수학한 뒤 일본에 건너가서 얼마간 체류 하다 귀국하여 김해군 장유금융조합에 취직했습니다.

당시의 금융조합은 다들 부러워하는 그런 직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농민수탈 앞잡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조국 조선 농민의 참혹한 현실을 직시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가슴에 각인해 가게 되었습니다.

신학문에 발을 들여놓음에 따라 얻게 된 또 하나의 은총은 하나님을 영접함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그는 기독정신으로 농촌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농사개량, 부업장려, 협동조합설립과 그에 관한 서적 출판 등과 함께 문맹퇴치와 계몽을 통해 사회개혁을 이루려 했지요.

1936년, 그는 뜻하는 바를 좀 더 효과적으로 이루고자 5년간 근무하던 장유금융조합을 사직하고, 그 이듬해(1937년) 4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41년 3월 졸업하자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 신학과에 입학했고, 43년에 졸업하자 귀국하여 목사 안수를 받은 뒤, 그해에 김해 초량교회 부목사로 부임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가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순조롭게 공부를 한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경성에서고 일본에서고 막노동에 행상까지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연희전문대학 시절에는 소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정학처분을 받기도 했지요.

초량교회를 섬기던 시절에도 그는, 그러니까 강성갑 목사는 일제의 우리의 민족정신 말살정책에 항거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다들 아시는 대로 일제는 그 말기가 되자 혈안이 되어 우리민족을 탄압하는 데 더욱 열을 올렸습니다. 그러며 내선일체(内鮮一体), 동조동근(同祖同根) 운운하며 우리의 민족혼까지 지우려 안달복달하였습니다.

내선일체(内鮮一体)라면 내지 곧 일본과 조선(鮮)이 한 몸이라는 말인데, 뭐, 개 풀 뜯어먹는 소리라는 말 있잖아요, 그와 비슷한 게 아니겠어요? 그리고 또 동조동근(同祖同根)이란 저희 왜인과 우리가 조상이 같고 근본이 같다는 말인데, 저들은 그때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게지요.

그런데 우리의 선조들은 그 같은 저들 왜의 꼴을 보며 울분을 꼬박꼬박 삼키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지요, 목숨 걸고 항거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강성갑 목사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강 목사는 저들의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강요에도 코웃음을 치며 개무시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1945년 나라가 빛을 되찾자(光復), 그는 교육에 대한 자신의 염원을 이루기 위한 일환으로 부산대학교 설립운동에 참여했고, 대학이 설립되자 독일어 교수로 출강했습니다. 그러기에 앞서 연세대학교 채플 강사 출강도 시작했지요.

광복 이듬해(1946) 초, 강 목사를 찾아온 손님들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진영에 오셔서 저희 교회를 위해 일해 주십시오.’ 진영교회에서 목사청빙을 위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가게 되면 농촌운동도 같이 해도 좋겠습니까?’ 그들은 좋다 했습니다.

강 목사의 활동은 교회만을 위한 것일 수가 없었습니다. 목회활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농촌이 고르고 평등하게 살기 위한 목자(牧者)활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강 목사는 1947년 8월, 진영교회와 겸직하고 있던 부산대학교 교수직을 내려놓았습니다.

진영교회에 부임하고 바로 그해 8월, 그는 그 지역에 중등공민학교를 세웠습니다. 그곳 학생들이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부산, 마산, 진해 등지로 가야 했기에 어려움이 많았고, 따라서 진학률은 많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기에 한 사람이라도 더 진학하게 하기 위해서였지요. 아니 그보다는 올바른 민족교육을 하기 위해서였지요.

그 후로 그의 교육사업은 그 범위를 넓혀 갔고, 그에 수반된 난관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나 이는 이 글의 본령이 아니니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다만 그 교육의 성과가 대단했다는 것만은 첨언해 둡니다.

그의 교육에 대한 열의와 그 방식은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를 보기 위해 연희전문 총장 언더우드 2세(원한경), 강 목사의 스승 외솔 최현배 선생, 백낙준 박사 등이 방문하기도 했지요. 이규호 전 문교부장관도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이고, 김동길 전 연세새 교수는 ‘그리스도 정신으로 사신 강 목사님에게 큰 감명을 받았으며 아마 살아계셨으면 내가 그 학교에 취직을 했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가 부산대학교를 사임하려 하자 주위에서는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학 교육을 할 사람은 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있지만, 농촌사회 개혁사업을 할 사람은 많지 않’다며 듣지 않았습니다. 오늘을 사는 출세지향의 우리로서는 극난의 일이지요. 아니 그 시대라고 다를 게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골고루 잘 살며 평등한 사회, 이는 그의 기독교적 신념이었습니다.

그는 농가를 방문지도할 때면 어김없이 감나무 한 그루씩을 심어 주며, ‘미래를 기대하자’ 했습니다. 그런 그는 학교의 심부름꾼, 이발사, 토목공 등 잡다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렀고, 그들의 월급도 교장인 자신과 같은 액수를 지급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일들은 후에 그를 사지로 내모는 데에 일조했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의 공세로 인해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되자 당국은 이른바 요시찰 인물에 대한 예비검속에 들어갔습니다. 경남경찰국과 김해경찰서가 산하의 각 지서에 이의 시행을 지시했고, 따라서 진영지서의 김 아무개 지서장은 지역의 극우 토호세력과 함께 죄 없는 양민들에게까지 요시찰 인물이라는 딱지를 붙어 250-300명을 체포해서는 진영금융조합 창고와 한얼중 등에 감금했습니다.

거기에 강성갑 목사도 들어 있었습니다. 학생들을 낙동강전선에 투입한다는 징집명령을 거부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어린 중학생들을 전쟁에 참가시킨다는 것은 법에도 위배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적 감정이 작용했던 것이지요.

김 지서장은 전쟁의 혼란 가운데 김 목사가 교장으로 있는 여교사를 성폭행한 뒤 불순분자로 몰아 죽이기까지 한 인물인데, 강 목사가 이를 파고들어 진실을 밝히려 하자, 그로 인한 원한이 깊었던 것입니다.

강 목사에게 지워진 징집명령거부라는 죄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지 지서장 일파는 몇 가지의 죄를 더 덧씌웠습니다. 골고루 잘 사는 평등사회, 상하구별 없는 동액의 임금, 그런 것들이 다 공산주의자라는 증거라 했습니다.

그 같은 것들이 정말 공산주의자들이 하는 일이라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도 공산주의자이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러한 강성갑 목사에게 공산주의자라는 올가미를 2중 3중으로 씌워 죽이고 말았습니다. 50년 8월 2일 밤의 일로 낙동강 수산교 아래에서였습니다. 그 날 밤 거기에서 동족의 총부리에 의해 희생된 인명은 200여명이나 됐는데, 누구의 말마따나 ‘시대의 타살’이지요. 보통 ‘김해지역 양민학살 사건’이라고 하는 그 사건입니다.

총살 직전 강 목사는 기도할 시간을 좀 달라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인들을 용서해 주옵시고, 이 겨레를 가난과 재앙에서 건져 주옵소서. 한얼을 축복해 주옵소서. 이 죄인 주의 뜻을 받들어 당신의 품에 육신과 혼을 맡깁니다.’ ‘한얼’은 강 목사가 운영하던 학교 이름인데, 같이 끌려갔으나 다리에 총상을 입고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돌아온 한얼학원 최갑시 이사장의 증언입니다. 그때의 강성갑 목사는 인생의 최절정기라 할 수 있는 38세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강 목사의 비보에 접한 김동길 교수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신 예수를 떠올린다’ 했고, 그의 스승 언더우드 2세, 한국명 원한경은 훗날 ‘연희가 낳은 가장 훌륭한 졸업생이 죽었다’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가 가고 4년 뒤(1954.5.14.),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한얼중학교(현 진영여중)에서 그의 흉상제막식을 겸한 추도식이 열렸는데, 함태영 부통령, 훗날 대통령이 된 김영삼 씨를 비롯한 각계 인사 3,0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승이 죽으면 텅텅 비어 썰렁하다는 옛말이 있는데, 강성갑 목사 그는 그렇게까지 대단히 유명한 인사도 아닌데, 이 어인 까닭이었을까요.

‘나에게는 빨갱이고 노랭이고가 없다’ 말한 그의 그교육목표 애토(愛土) 애린(愛隣) 애천(愛天)에 그 답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라와 이웃,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데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데,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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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1.54.116.232)
2020-12-01 08:18:45
6.25 당시 빨갱이에 의해 대한민국 양민 13만 명이 학살되었다!
1. 북한이 먼저 도발한 양민학살

반동분자, 비협력분자, 도피분자를 적발하여 무자비하게 숙청하라! (1950년 6월 26일, 서울 시내에 뿌려진 김일성 호소문)

국군장교와 판검사는 무조건 사형에 처하고, 면장, 동장, 반장 등은 인민재판에 부친다! (1950년 6월 30일, 布告文)

악질반동에 대해 복수하려는 것은 극히 정당한 일입니다! (1950년 노동당 중앙위에서의 김일성 연설)

2. 양민 13만명 학살 양태

붉은 완장을 차고 다니던 바닥빨갱이들은 대개 총이 없었으므로 죽창이나 도끼, 쇠스랑, 괭이 곤봉 등으로 무장했고 곡괭이와 삽으로 우익인사들을 찔러 죽이는 원시적 학살행위를 자행했다.

경남 남해군에서는 경찰관들을 살해해 배를 갈라 간을 꺼내 씹거나 절명한 경찰관의 배에 1척이나 되는 소나무 말뚝을 박기도 했다. 

경기도 양평군 에서는 반공인사 600여 명이 철사줄로 묶어져 휘발유를 끼얹어 지고 웅덩이에 생매장됐다. 

전주형무소에서는 감옥에 있던 우익인사들이 살해된 후 도랑에 던져졌고 도랑이 시체로 가득 차자 우물에 던져졌고 우물이 차자 뒤뜰에 버려졌다.

대전형무소에서는 수감돼 있던 1,742명의 우익인사와 가족들이 모두 학살됐다. 

바닥빨갱이들에 의한 가장 큰 피해자집단 중 하나는 종교인들이었다. 지금까지 정리된 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6.25 당시 인민군과 바닥빨갱이들에 의해 학살당한 목사, 신부, 장로, 수녀들은 신원이 밝혀진 사람만 174명에 달한다. 또한 인민군이 퇴각하며 납북된 종교인들도 184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기독교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전남 영암읍 교회사건 등 3개월 이하의 인공치하 동안 조직적으로 전개됐다. 전남 영압읍 교회에서는 신도 24명이 집단 학살됐고, 옥구에서도 20여 명의 신도가 학살됐다.

전남 서쪽 바다에 있는 임자도에서는 150여 명이 구덩이를 파고 양민과 교인이 학살됐고, 충남 논산 병촌교회에서는 한 살짜리 어린아이부터 육순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60여 명의 교인들이 학살됐다.

3. 북한이 먼저 도발한 양민학살에 맞대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부의 몰지각한 행태를 빌미로 빨갱이를 옹호하려는 행태는 지양되어야한다

연합군이 한시바삐 나치를 굴복시키기 위해 드레스덴 공습을 감행했다. 도시 전체가 완전 쑥대밭이 되었다. 나치의 만행에는 눈을 감으면서 연합군의 무지막지한 드레스덴 공습만을 ‘똑 따서’ 연합군은 인간백정이라고 공격하는 건 외눈박이이다. 물론 드레스덴 공습은 너무 過했지만, 히로시마 원폭 投下와 마찬가지로 군사작전의 일환이었다는 측면도 반드시 강조하면서 드레스덴 공습을 거론하지 않으면 그 底意를 의심받기 마련이다.

일시 轉向했던 보도연맹이 김일성이 불법남침하자 돌변하여 죽창을 들고 양민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에 빨갱이들에게 맞아죽지 않기 위해 맞대응하는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몇몇을 침소봉대하여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건 무리이다.

김일성이가 우리 양민을 학살하는 데 정신이 팔려 서울에서 며칠 지체하다가 전국의 공산화 기회를 놓쳤다. 만일 김일성이 서울에서 양민을 학살하느라고 금쪽 같은 시간을 지체하는 대신 쭉 파죽지세로 南進했더라면... 낙동강 전선에서의 北進도 없었을 것이고... 양민학살에 치를 떤 민중이 反共으로 똘똘 뭉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분문 글에 나오는 김영삼 학생은 學徒兵으로 입대했다. 김일성을 때려잡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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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일봉성도 (122.101.20.169)
2020-12-01 07:30:05
공산주의가 좋으시면 이북으로
난 공산주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고 공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대한민국에 서
같이 살아야할 필요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들어 공산 사상을 가진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게 마치 진리
인양 꼴값들을 떨어대고 있는데 정말 못봐주겠습니다.
임종석 목사님은 지금 문재인 정부가 적폐를 양산하고 국정을 농단하고 있는데
이것에 대한 비판은 전혀 없으시네요.
예전 박근혜 정부시절 임종석 목사님이 쓰신 비판의 글이 엄청 많았는데 왜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 침묵을 하고 계신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공산주의가 좋다면 공산국가로 이민을 가서 사시는 방법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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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
김경환 (211.54.116.232)
2020-12-01 08:37:55
더는 기댈 곳이 없다. (퍼온 글 : 탈북자 김태산)

연이어 종교에 대한 글을 쓰니 이상하게 여길 분들도 있겠으나 할 말은 마저 해야겠다.
.
김씨 가문을 섬기던 내가 북한을 떠난 후에 종교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눈에 보이는 실체를 일생 믿었다가 실패한 사람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50년 동안을 받아온 반 종교교육은 나를 종교로부터 더 멀어지게 했던 것이다.
.
그러나 미국에가서 몇 달 동안 머물면서 기독교 국가들의 발전상을 직접 보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지인의 권고로 성경교육을 6개월 정도 받고  “문정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다. 그래서 나에게는 “대부”라는 새로운 아버지가 생기고 “모세”라는  이름도 생겼다.
.
그런데 나의 성당 생활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자유를 찾아온 나에게 “천주교 신자” 라는 명칭뒤에 따라오는 크고 작은 통제는  나의 자유를 구속하는 시끄러운 존재였다.
.
무엇보다 나를 천주교를 멀리하게 한 것은 한국의 천주교 조직을 깔고앉은 종북들이다. 천주교 안에는 친북 단체가 “하느님”의 가면을 쓰고 버젓이 반국가적 활동을 일삼고 있었지만  누구도 이를 다치지 못한다.
.
임수경이 3.8선을 넘어  남으로  올 때에 "사제단" 사람들이  자유롭게 동행하는 것을 목격한 나는 그들의 실체를 모를 리가 없다.
천주교 신부들이 나라의 군사기지 건설을 앞장서서 반대하는 곳이 바로 이 대한민국이고 대한민국의 천주교다.
.
그러니 그 아래 성당들이야 더 말해 뭣하겠는가?
위로는 교황에서부터 아래로는 작은 성당들까지 변질이 되어 오히려 인간들을  정신적으로 병들게 하는 곳이 천주교라고 나는 단언한다.
.
그래서 나는 영세를 받던 날부터 10년 넘게 목에 걸고 다니던 "십자가"를 풀어버리고 천주교와 인연을 끊었다.
................
그러나 나는 나를 안전하게 자유 대한민국으로 인도하였고 부럼 없이  살게 해주신 하나님을 믿고 항상 두려워한다. 또 성경을 드물게나마 읽고 가르침을 받기도 한다.
.
단지 하나님을 나 혼자 믿고 의지할뿐 성당이나 교회를 찾지는 않는다.  다른 글에서도 썼듯이 목사나 신부의 가면을 쓰고 역적 짓을 하는  자들에게 나의 신성한 믿음을 이용당하기 싫다.
.
물론 애국적인 목사님이나 신부님들도 많다. 그러나  애국적 목사나 신부들이  더는 살수 없게  탄압하고 박해하는 곳이 바로 현 정부다.  정부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는  애국적인 교회나 성당은 살아남을 수가 없는 사회주의 독재시대가 도래 하였다.
.
나는 90년대 초에 쏘련과 동유럽을 다니면서 레닌의 동상을 내리고 그 자리에 십자가를 세우던 동유럽사람들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
내가 살아서 내 고향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평양에서 제일 큰 대학의 명칭을 “평양신학대학” 으로 바꾸고 진짜 하나님께 충실한 목사 ,신부들을 길러내는데 혼심을 다 할 것이다.
..........................
2020,11,29
 
탈북자 김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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