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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비록 모호하다 해도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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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11월 25일 (수) 23:51:07 [조회수 : 6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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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코로나19가 대유행 조짐을 보이면서 당국은 방역단계를 상향 조정했다. 불길한 안개가 스멀스멀 우리 삶에 스며드는 느낌이다. 전파력은 강하지만 치명율은 높지 않다는 판단에 ‘그까짓 것’ 하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불안감과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에게 불안은 숙명이라지만 이번 경우는 조금 다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선에 서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가시적인 적이라면 경계태세라도 갖추어 대비할 수 있지만, 은폐 엄폐할 장소조차 허락되지 않기에 불안감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많은 이들이 당연하게 누리던 일상을 그리워한다. 북적거리던 시장거리를 걷고, 마음 내키면 가판대에 걸터앉아 거리 음식도 먹어보고 싶다는 것이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 흥청거리던 여행지의 풍경도 아슴푸레하게 떠오르고, 가까운 벗들과 어울려 실떡거리던 시간도 마치 꿈속의 기억인 듯 아득하기만 하다. 교회의 형편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뜨거운 찬양도, 기도도, 친교도 여의찮다. 병자들이 있어도 찾아가 위로할 수 없다. 낯모르는 이가 다가오면 경계부터 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응대를 하더라도 찜찜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마음에 고황이 든 듯 먹먹하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공허하고 쇠잔한 무력감이 우리를 사로잡을 태세다.

함민복 시인의 ‘나를 위로하며’라는 시를 읽었다. “삐뚤삐뚤/날면서도/꽃송이 찾아 앉는/나비를 보아라”. 짤막한 네 행을 한 호흡으로 노래한 시인은 잠시 호흡을 고르듯 한 행을 띈 후 마지막 구절을 내놓는다. “마음아“. 덧거친 세상에 지친 탓이었을까? 시인은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처럼 나부끼는 마음을 다독이며 어떤 경우에도 지향을 잃지 말자고 다짐한다. 삶은 일직선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뜻밖의 장애물도 만나고, 방향감각을 상실하기도 하고, 권태라는 섬에 갇히기도 한다. 지체할 수도 있고, 에돌아 갈 수도 있지만 기어코 가야 할 곳을 지향하는 것이 삶의 지혜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꾸 멈추어 서야 하고, 더 큰 시간의 관점에서 우리 삶을 살펴야 한다.

엘살바도르의 순교자인 로메로는 ‘초월이란 포위망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초월이란 스스로 사물에 갇히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이고, 우리를 얽어매려는 일체의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어려운 시대이기에 그의 통찰이 더욱 빛난다. 믿음이란 하늘에 길을 여쭙는 과정이 아니던가. 우리가 그 발자취를 다 알아차릴 수는 없다 해도 바다에도 길을 내시는 분을 신뢰할 때 삶이 쉬워진다. 나는 패배해도 그분은 패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신뢰할 때 자유의 공간이 열린다.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은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기억하는 날이다. 그리스도가 왕이 되신다는 말은 세상의 모든 존재들 위에 우뚝 선 지배자로 등극했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를 이루기 위해 세상의 모든 아픔과 슬픔까지도 부둥켜안으셨다는 말이다. 그는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예수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일체의 장벽을 당신의 몸으로 철폐하시어 서로 소통하도록 하셨다. 예수와 만난 이들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은 그 넓음과 높음, 깊음과 맑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교회력은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경축하는 주일과 대림절이 맞물려 있음을 보여준다. 올리움과 낮아짐은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미래를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대림절을 맞이한다. 카페에서는 이미 캐롤이 심심찮게 들려오지만 내 귀에는 다른 노래가 쟁쟁하게 들려온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이 음울한 시절, 예수는 우리 몸을 빌어 생의 가장자리에 내몰린 이들 곁에 다가서기를 원하신다. 그 멋진 초대에 응답할 때 모호한 삶은 오히려 중심에 이르는 길이 된다.

(2020/11/25일자 국민일보 '김기석의 빛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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