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2020)

지금이야 거의 모든 고등학생들이 대학으로 진학하고 있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 진학률은 그렇게 높지 않았다. 당시 고등학교는 인문계와 실업계로 뚜렷이 양분되어 있었고, 인문계와 실업계는 각각 대학진학과 취업에 그 목표를 두고 있었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바로 이 시대, 아직은 IMF의 혹독한 바람이 닥치지 않아 그나마 삶의 낭만이 살아있었던 1995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상고출신 여사원들의 직장 모험담이다. 일류 대기업 전자회사에 취직했으나 고졸이라는 경력으로 승진이 막혀있던 말단 여사원들은 아무리 업무 능력이 출중해도 여전히 커피를 타고 구두닦이 심부름을 한다. 그런데 그렇게 희망 없어 보이던 그녀들에게 꿈같은 기회가 주어진다. 고졸출신이라도 토익 600점만 넘으면 대리로 승진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리하여 주인공을 포함한 고졸 여사원들은 토익공부에 돌입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 기업의 공장 폐수 유출사건이 일어나고 주인공은 회사의 비리를 밝혀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1991년 실제로 일어났던 두산전자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을 모티프로 삼는다. 지금은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수를 사 먹고 있지만 더 이상 수돗물을 마시지 않고 돈을 주고 물을 사 먹게 된 것은 바로 이 사건의 여파로 생긴 영향이었다. 충격적인 실제의 사건을 모티프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함을 놓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유니폼으로 뚜렷하게 구별되는 고졸 출신 여사원들에 대한 공공연한 차별을 다루면서도 영화는 어둡거나 쓸쓸한 기운을 전하지 않는다.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으며 연대의 끈으로 똘똘 뭉친 여사원들의 좌충우돌을 보는 즐거움은 영화의 큰 재미다.

영화의 본 주제는 아닐 테지만 영화를 보던 중 자기가 일하는 기업이 생산해내는 제품에 대하여 주인공이 느끼는 자부심이 특별하게 눈에 들어왔다. 분업화된 산업사회의 노동자에게서는 일반적으로 느낄 수 없는 낯선 태도였기 때문이었다. 산업사회로 접어들기 전의 인간은 자신이 생산해낸 결과물로부터 소외되지 않았고, 자신이 만들어낸 생산물에 대한 자부심도 잃지 않았었다. 그러나 분업화된 산업사회의 노동자는 최종생산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고 말았고, 그와 동시에 노동에 대한 자부심 역시 함께 잃어버리고 말았다. 생존을 위해 일할 뿐 생산물로부터 얻는 기쁨은 사라진지 오래인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인공은 이 긍지를 잃지 않고 있었다. 사무직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자신의 기여로 제품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으며, 그녀는 그 생산품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자부심으로 삼는다.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인간을 보는 의외의 놀라움과 즐거움이 영화에 있었다.

노동은 저주로서가 아니라 축복으로서 인간에게 부여된 능력이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지금도 노동하시며 인간을 자신의 노동에 초대하신다. 우리는 노동으로 생겨난 결과물로 인한 기쁨으로부터 하나님의 창조의 기쁨을 짐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노동으로 지금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한다.

설교를 들을 때 간혹 주제로부터 벗어난 엉뚱한 곳에서 큰 은혜를 경험하기도 하는 것처럼, 영화의 엉뚱한 곳에서 의외의 사색거리를 발견하는 것 역시 영화를 보는 즐거움에 속할 것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등장하는 작은 삶의 조언 하나를 첨언하고자 한다.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어 사는 삶이 어렵다면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고 사는 삶을 살라는 것. 뭔가 더 선명해지는 느낌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