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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읽기에 도움이 되는 문학 상식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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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11월 12일 (목) 20:28:46 [조회수 :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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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에서 작품에는 시작, 중간, 마지막이 있다고 말했다. 아주 평범하게 보이는 이 말은 시작과 중간과 마지막이 서로 잘 어울려서 하나의 작품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이 셋 중에서 하나만 빠져도 작품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상식적인 말처럼 들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이 20세기에 와서 신비평(New Criticism)이라는 문학 비평의 이론으로 발전했다. 신비평가들은 훌륭한 작품이라면 그 작품의 어느 부분도 전체 작품을 이루는 데에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명작을 읽을 때 독자는 작품의 어느 부분을 제외하고 그 작품에 대해서 말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 제외된 부분도 그 작품을 이루는 데에 한 몫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을 제외한다면, 그 작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신비평의 이 기본 원칙은 지금 문학 작품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상식이 되어 있다.

이 상식은 성경을 읽는 데에도 적용될 만하다. 성경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이 명작에는 어느 부분도 불필요한 부분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어느 부분을 등한시하거나 건너뛰어서는 안 된다.

복음서뿐 아니라 서신서도 요한계시록도 중요하다. 복음서 중에서는 공관복음도 중요하고 요한복음도 중요하다. 서신서들 중에서는 바울의 서신도, 베드로의 서신도, 요한의 서신도, 야고보의 서신 등도 중요하다. 따라서 신약을 올바로 읽으려면 그 중의 어느 한 부분도 제외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이 상식을 외면하는 수가 많다. 믿음을 중시하는 루터의 추종자들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같은 바울서신을 즐겨 읽고 행위를 중시하는 야고보서나 요한계시록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로마서에서도 믿음을 강조한 1-11장은 열심히 읽지만, 행위를 언급하는 12-16장은 외면한다. 갈라디아서에서는 1-4장은 좋아하지만, 5-6장에는 관심이 없다. 어느 목사는 에베소서를 가지고 강해 설교를 하다가 믿음에 대해서 기록한 3장까지 설교하고 나서 삶에 대한 4장에 이르자 에베소서 강해를 그만두고 히브리서로 옮겼다.

이렇게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은 중시하고 그 외의 부분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성경을 올바로 읽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작품의 처음 부분은 제외하고 중간 부분만 열심히 읽거나 그 작품의 10장까지는 열심히 읽고 11-15장은 건너뛰고 그다음 장들을 읽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어느 부분을 읽지 않거나 소홀히 한다면, 그 독자는 그 작품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게 마련이다. 

성경에서 행위에 대한 구절이나 부분을 제쳐놓고 믿음에 관한 부분만을 골라서 읽는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편중되게 마련이다. 그런 경우 그의 신앙을 성경적이라고 볼 수 없다. 우리의 신앙은 성경 전체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예수님은 믿음과 행위 중에 어느 하나만 중요하다고 가르치시지 않았다.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는데, 여기서 하나님 사랑은 믿음의 영역이고 이웃 사랑은 행위의 영역이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를 온 율법과 선지자들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중에서 하나에만 치중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일이다. 

우리가 작품을 읽을 때 어느 한 부분도 제외하지 말아야 한다는 문학 상식을 성경을 읽는 데에 적용한다면, 성경의 내용을 왜곡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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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1.54.116.232)
2020-11-14 18:49:29
불의의 사망사건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이모저모!
Or those eighteen who died when the tower in Siloam fell on them-do you think they were more guilty than all the others living in Jerusalem? I tell you, no! but 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눅13:4~5)
실로암에서 工事 중에 타워(望臺)가 무너져 18명이 죽었다. 죽은 이들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罪가 더 많아서 죽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말하건대 그렇지 않다. 너희가 悔改(repent)치 아니하면 너희 역시 모두 非命橫死(perish)할 것이다.

人夫 18명이 안전 불감증 또는 안전관리 미비 등으로 사망했다. 예수님은 事故死의 원인을 죄가 커서라기보다는 회개치 않아서라고 진단했다. 요즈음 건설현장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하면 공사인부가 회개하지 않아서 사망했다고 하는가? 아니면 공사인부 본인의 안전 불감증 또는 관리회사의 안전관리 미비로 사망했다고 하는가?

1. 예수님이 죄와 회개를 상호 비교하여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때마침 일어난 공사인부의 떼죽음을 비유로 들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2. 예수님이 공사 중 불의의 사망사고에 대해 안전 불감증 또는 안전관리 미비에 대한 호된 질책 없이 단순한 사건사고를 하나님의 진노로 보는 측면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印泥에서 지진해일이 발생하여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자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그런 재앙이 닥쳤다고 설교하는 목사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이들은 사건사고에 대한 예수님의 感性的 비유 측면에 과잉하여 주목한 목사들이었다. )

3. 공사 중의 사망사건에 대해 주무관청에 찾아가서 항의를 하지 아니한 예수님의 소극적인 태도에 실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는 知人 중에 이런 사람도 있다. 그는 일하다가 多數가 죽었는데 조의를 표하지는 못할망정 회개하지 않으면 전부다 비명횡사시킬 것이라고 겁까지 주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4. 比喩라는 건 사람의 가치관이나 이념에 따라 천차만별의 해석이 가능하다. 어디에다 중점을 두는가에 따라서! 성경이 比喩天國이다보니 천차만별의 해석이 나오게 되는 것이므로 믿음에 중점을 두는 사람더러 “너는 틀렸다!”라고 똑 부러지게 단정 짓기는 뭣하다.

5. 예수님이 참된 회개(입으로만이 아닌 행위를 수반한 悔改)를 요구하였다고 (눅13:4~5) 비유를 해석한다면, 나의 경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입으로만 회개를 하였고 이마저도 作心三日! 행위를 수반한 회개를 할 만한 그릇이 안 되는 데... 합격 기준이 너무 높다. 예수님의 눈높이에 맞추기 참으로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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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1.54.116.232)
2020-11-14 08:52:27
요즈음 리모콘으로 TV를 켜려고 하지 어디 다이얼을 돌려서 TV를 켜려고 하는가?
믿음과 행위, 한글과 漢字... 어느 한쪽을 배제해서는 안 되고 양쪽 다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데 실제로 그렇게 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

<성경 = 믿음과 행위>를 동시에 요구하는 데... 사람에 따라 믿음에 置重하기도하고 행위에 치중하기도 한다. 성경을 읽는 데 있어서 믿음과 행위를 동시에 추구하는 完全體를 이루기는 하늘의 별따기 보다도 더 어렵다. 믿음과 행위를 동시에 추구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으로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Impossible Dream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설사 어떤 사람이 하늘의 별을 땄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理念에 따라 다양한 별빛이 나오기 마련이다. 高度의 完全體는 각자의 이념과 각자의 믿음과 각자의 행위로 이루어진다고 본다면 붉은 안경을 끼고 믿음과 행위를 추구하는 것과 검은 안경을 끼고 믿음과 행위를 추구하는 것은 또 다를 것이다. 성경을 기계가 읽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읽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읽기의 完全體 추구보다도 수천 배 더 쉬운 올바른 한국어 사용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할진대... <한국어 = 70%는 漢字이고, 30%는 한글>... 배우기에 귀찮다고, 배우기에 힘들다며, 비뚤어진 애국심을 고취한다며 漢字를 포기하고 30% 비중밖에 안 되는 한글로 한국어를 요리조리 표기하고 있는 마당에 한국어 사용보다 수천 배 더 고차원적인 성경을 인간이 자기 便宜대로 읽어 제치는 걸 어떻게, 무슨 수로 말릴 것인가?

한국어 사용조차도 편의대로 하는 마당에 한국어 사용보다도 수천 배의 노력이 필요한 성경 제대로 읽기는 緣木求魚라고 본다. 便宜性을 추구하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많은 기독교종파가 생기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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