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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벨의 선교 사역
권지영  |  평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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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11월 12일 (목) 19:27:16
최종편집 : 2020년 11월 19일 (목) 23:23:49 [조회수 :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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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벨의 선교 사역

 

권지영(기독교대한감리회 평동교회)

 

   
▲ 권지영 목사

Ⅰ. 들어가는 말

 

우리 선교본부가 은자의 왕국[한국]에 선교 사역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을 때, 중국에서 성공적인 사역을 했던 캠벨 선교사가 그 중요한 선교사역을 조직하는 일에 만장일치로 선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또한 그녀를 한국으로 부르는 교회의 소리를 들으면서, 그녀는 대답했습니다.“다음 도시로 나아가게 해주십시오. 저는 그 곳에서도 복음을 전파하겠습니다. 그것이 내가 나아가는 이유입니다.”

 1887년 4월 중국에서 선교의 첫 발을 디딘 캠벨은, 상해(上海)와 소주(蘇州)에서 주목할 만한 적응력을 보이며 언어 연구, 음악 교사, 학교 교장, 병원 어시스턴트, 여성 선교부 본부 관리자 등 다양한 분야의 사역을 담당했다. 남감리회 해외 여성 선교부(Woman's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에서 한국 선교를 개척하게 되었을 때, 본부는 만장일치로 캠벨을 이 일의 담당자로 세웠다. 캠벨 역시 이 새로운 사역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여기고, 주저함 없이 한국으로 향했다. 캠벨의 전기를 담은 글인 ‘한국에 복음을 심다 - 조세핀 캠벨의 이야기(Planting the Gospel in Korea ; Story of Josephine Peel Campbell)', '한국의 개척자(Pioneering in Korea)’의 제목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한국 선교를 통해 캠벨은 ‘개척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또한 중국에서의 선교 경험을 바탕으로 캠벨은 한국에서 다양한 분야의 선교 사역을 시작하고 펼쳐나갔다.

이 글에서는 캠벨 선교사의 중국과 한국에서의 다양한 분야의 선교 사역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예정이다. 교육 선교와 의료 선교, 복음 전도 및 전도부인 사역과 후진양성에 관한 부분을 중국과 한국에서의 활동 기록, 연회보고 내용 등을 바탕으로 조명해 볼 것이다.

 

 Ⅱ. 본론

 

1. 교육 선교

 

캠벨은 고통을 통해서 인류의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영성은 매우 담대했고, 그리스도적이었기 때문에 비탄에 빠지지 않았지요. …… 결단력 있는 행동이 특징이었던 그녀는 즉시 선교사로 헌신했으며 동양으로 향했습니다.

 

   
▲ 1880년대 중국 클럽튼 학교(Clopton School)의 모습

미국 남 감리회 해외 여성 선교부 기록담당 서기관이었던 프린스(Mrs. A. E. Prince)는 캠벨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한다. 남편과 아들, 딸을 모두 잃은 캠벨은 ‘즉시’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결단했으며, 1년여 후 간호사 교육 및 교직이수를 마친 뒤 남 감리회 해외 여성 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되었다.

캠벨은 1886년 미국 남감리회 해외 여성 선교부의 서기였던 맥개복(Mrs. D. H. McGavock) 부인에게 ‘중국 선교를 바로 출발할 수 없으므로, 다음해 봄에 출발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편지의 내용 가운데에는 자신이 선교지 중국에서 학교를 운영할 수 있도록 교직 과정을 밟고 있으며, 이 과정이 마치는 이듬해 1월에 이수증명서를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캠벨의 선교 사역에서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과 관심이 높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1898년 연회보고에 수록된 캠벨의 사진

1887년 4월 중국 상해에 도착한 캠벨은 2~3주 만에 상해 클럽튼 학교(Clopton School)의 음악 교사가 되었다. 이 시기의 캠벨에 대하여, 상해의 중서서원(中西書院)을 설립했던 알렌(林樂知, Young J. Allen)은 ‘캠벨은 매력적인 여성이며, 어디에서나 어떤 선교에서나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입니다.’라고 기록했다. 또한 남감리회 문헌 서기인 프린스(A. E. Prince)는 ‘캠벨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캠벨은 1888년 10월 25일에 소주 여성 병원을 여는 사역에 보조자로 옮겨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캠벨은 소주의 여학생 기숙학교인 램버드 학교(Lambuth School)를 운영하게 되었는데, 이는 소주에 설립된 남 감리회 해외 여성 선교부의 첫 번째 학교였다. 이 학교는 캠벨을 중국 선교로 인도한 로라 헤이굿(Laura Askew Haygood) 선교사가 설립한 학교이기도 했다. 병원의 일과 병행하면서 학교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많이 할애되지는 못하였으나, 캠벨은 1893년의 연회보고에 ‘가능한 모든 최선을 다해’ 학교의 일을 담당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소주의 남 감리회 여성 선교부 산하 매일 학교(day school) 8개가 운영되고 있었는데, 동료 앳킨슨(Jennie M. Atkinson)을 도와 이 일 역시 담당했다. 앳킨슨은 캠벨이 가르치고 있었던 매일학교(School No.1.)의 학생들이 캠벨을 매우 사랑하고 있고 이들은 캠벨의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으며, 학생들이 기독교의 원리와 구약성서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갖고 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1897년 남 감리회 해외 여성 선교부에서 한국의 여성 선교 사역을 개척하기 위하여 캠벨을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중국에서 10년간 지속된 선교 사역으로 갖추어진 전문성이 있었기에 서두에 언급된 것과 같이 선교본부는 만장일치로 이 일을 결정했으며, 캠벨 역시 망설임 없이 이 일을 감당하기로 했다. 1897년 10월 9일 캠벨은 수양딸인 도라 유(余慈度, Dora Yu)와 함께 서울에 도착하여, 남감리회 선교부의 리드(C. F. Reid) 선교사와 윤치호의 환영을 받았다. 한국에 도착한지 7개월이 지난 후, 캠벨은 남감리회 선교부가 위치한 남송현과 고양읍에서 작은 매일학교를 열었다. 학교는 몇 달 만에 두 배로 늘어날 정도로 호응이 좋았으나, 캠벨이 자골로 옮겨가면서 리드 부인에게 맡겨졌다.

   
▲ 캠벨이 ‘Woman's Missionary Advocate’지 1901년 4월호에 개제한 캐롤라이나(배화) 학당의 사진

1898년 8월, 캠벨은 남 감리회 선교본부가 위치한 남대문 안 남송현에서 여성 선교부를 분리하여 장흥동(長興洞) 고가나무골 혹은 자골로 불리던 곳(현 서울지방경찰청 위치)으로 이전하였다. 이 지역은 더 높은 계층의 사람들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에 교회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1898년 10월에 본격적으로 여학생 기숙학교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그 수가 적었고 낮은 계층의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후 다양한 계층의 학생들을 수용하게 되었으며 1904년에는 50명, 1911년에는 90명, 1920년에는 742명으로 점차 늘어났다. 학교의 이름은 ‘배화 학당’ 또는 ‘캐롤라이나 학당’으로 불렸다. 다음은 이에 대한 프린스의 기록이다.

처음의 학생 중 한 명은 리드 박사 댁 문지기의 딸이었습니다. 다른 아이들 역시 부모가 하인이어서 그 집에 있길 원하지 않았던 아이들이거나 평민들이었는데, “하층계급의 소녀들이 교육을 받아 겉보기에 ‘종’으로 보이지 않았으며, 곧 지적으로도 뛰어나게” 되었습니다.

학당의 학생 수가 증가함에 따라, 캠벨은 1900년 봄에 2층짜리의 벽돌 건물인 기숙사를 완공하였고, 1901년 루이스워커 기념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1907년 캠벨은 배화 학당을 위해 새로운 필운동 부지를 확보했으며, 이 부지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건재하다. 캠벨의 사역에 있어서 장래에 대한 비전은 학교 사업 안에서 계속 드러났고, 사역은 계속 확장되어 갔다. 배화 학당이 매우 잘 운영되고 있을 때, 캠벨은 니콜스(Lillian Nichols)에게 실권을 넘겨주고, 세브란스 병원 일과 복음 전도 사역에 집중하였다.

캠벨은 배화 학당 뿐 아니라 송도와 원산의 교육사업에도 관여하였는데, 그녀가 사역을 감독하면 언제나 만족스러운 결과가 있었다고 한다. 안식년 휴가 중 여성 선교회의 본부 서기 일을 맡으면서, 캠벨은 몇 해 동안 남 감리회 해외 여성 선교부 한국 지부의 일을 담당했다. 배화 학당의 일 외에도, 송도의 호수돈 학교(好壽敦女學校, Holston School), 원산 루씨 여학교(樓氏女學校, Lucy Cunningham School)의 건설을 도왔다. 안식년 휴가 기간 중에도 한국을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 의료 선교

 

남 감리회 해외 여성 선교부는 1888년-1889년에 걸쳐 중국 소주에 여성 전문 병원인 메리 블랙 병원(Mary Black Hospital)을 설립하였다. 이 일에 필립스 박사(Dr. Mildred Phillips)가 ‘병원과 제약소의 관리자’로 파송되었고, 상해에 있던 캠벨이 함께 일하게 되었다. 필립스 박사가 소주에 강력한 보조자를 긴급히 요청했기에, 시카고에 있는 간호사 양성소에서 교육을 받은 바 있던 캠벨이 이 일의 적임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병원에 함께 있던 필립스 박사의 건강이 좋지 않았고, 펀 박사(Dr. Anne Walter Fearn)가 이 일을 이어갈 때까지 한동안 캠벨이 병원의 운영을 담당해야 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하여 1893년 연회보고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소주 여성 선교부의 일을 총괄 지휘하는 캠벨은 특별히 자기 자리에 잘 적응하여, 모든 일을 마찰이나 불안함이 없이 진행합니다. 그러나 병원에 의사와 훈련된 간호사가 부재하여 그녀에게 심히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국에서 가능한 한 빨리 의사를 파견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위의 요청에 따라 1893년 펀 박사가 소주로 오게 되었는데, 그 전 2-3년의 공백 기간 동안 캠벨은 병원을 운영할 수 있도록 활성화 시켰다. 정식 의학 공부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었기에, 캠벨은 당시 남 감리회 소속으로 있었던 파크 박사(Dr. W. H. Park)의 문하에 의학 공부를 하기도 했다. 이는 캠벨의 요청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남 감리회 소주 여성 선교부는 이 추가적인 업무들에 대하여 캠벨의 건강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당부했다. 당시 선교부의 일과, 램버드 학교의 교장 직, 매일학교 관리, 전도부인 양성 등의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많은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이 일 또한 감당했다.

캠벨은 병동에서 환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과 대화했으며, 성경을 나누어주고 또 읽어주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캠벨의 보고 내용이다.

병동에 입원한 몇몇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 전해주는 복음을 기쁜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몇 년 동안 시력을 잃었다가, 파크 박사님의 수술과 세심한 치료로 시력을 되찾은 한 노파는 교회와 기도 모임에 정기적으로 출석하고 있으며, 아픈 이들을 병원으로, 친구들을 교회로 데려오고 있습니다. 또 하나, 열아홉 살의 아주 예쁘고 총명한 소녀는 우리의 믿음에 대해 언제나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프던 어느 오후에, 내가 그 아이를 보러 들어갔을 때, 그 아이가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며 기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종종 그 아이를 만날 것과 예수님에 대해 말해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 아이는 죽기 전날 저녁에 나를 불렀습니다. 그래서 내가 갔고, 그 아이는 친언니보다 더 나를 반가워했습니다. 그 아이는 내가 그 곳에 있는 동안 “내가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분명히 희망이 있습니다.

 

   
▲ 캠벨이 사감으로 있었던 세브란스 간호사 양성소의 1918년 졸업식 사진. 중앙에 앉은 사람이 캠벨이다.

캠벨이 한국의 여성 사역을 위하여 파송된 뒤에, 배화 학당과 자골 교회의 일들로 직접적인 의료선교 사역은 없었지만, 기록에 따르면 캠벨 선교사의 일상이 ‘배화 학당의 교장 직과 한국 사역의 관리자, 병든 선교사들을 곁에서 돌보는 자, 그녀의 집으로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주는 어머니’로 채워졌다고 한다. 선교사들 중 아픈 이들이 발생할 때마다 의료 지식과 경험이 있는 캠벨이 주로 돌보았던 것이다.

1912년 8월 안식년 휴가에서 돌아온 뒤, 캠벨은 수표교 교회와 광희문 교회의 전도사역을 담당하는 동시에, 세브란스 병원과 간호 본부 일을 맡았다. 세브란스 병원과 의대는 20만 달러 규모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는데, 6개의 교단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남 감리회 여성 선교부는 매년 간호사 양성소의 유지와 간호사의 지원에 매해 후원금을 지급했다. 캠벨은 생애를 마치기 전 몇 년간 세브란스에서 복음 전도자로, 간호사 양성소 사감으로 지냈다.

 

3. 복음전도 및 전도부인 사역

 

캠벨의 남편이었던 알론조 캠벨(Alonzo M. Campbell)은 미국 에모리 대학(Emory College)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목회자였다. 1872년 조지아 연회에서 로스엔젤레스 연회로 이동해온 뒤 1873년 트리니티 교회를 설립했다. 4년 동안 8명에서 170명까지 교회가 성장했고, 우아한 예배처소를 건축하기도 하였다. 1876년 건강이 악화되어 한동안 목회를 지속할 수 없었으나, 이듬해 애리조나 주의 프레스컷(Prescott)에서 다시 목회를 시작하여 1878년 캠벨과 결혼한 후에도 1881년 이전까지는 목회를 지속한 것으로 보인다. 1885년 8월 9일 건강의 악화로 남편을 여의었지만, 남편과 함께 했던 복음 전도의 사명은 곧 캠벨을 선교지로 이끌었다.

다음은 1890년 중국 소주에서 기록한 캠벨의 연회보고 내용이다.

저는 교회 일에 참여할 만큼 많은 언어를 구사하려고 노력합니다. 이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친구 여러분, 여러분은 결코 모를 겁니다. 무지와 미신,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들은 모두 그 길에서 큰 산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강연을 준비하고, 문장을 암기하고, 삽화들을 배열하는데 꼬박 시간을 들입니다. 오후 1시에 예배실에 들어가면 주위에 여성들을 모아놓고, 많은 경우 외국인들을 처음 보는데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호기심 많은 질문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곤 했지요. 그 때 저는 대화를 의도된 방향으로 흘려보냈지만, 매일 매일 스스로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열 명 중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예수, 구원자 하나님, 주님이라는 복된 이름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 그러나, 때로, 우리는 영혼들이 십자가 아래 엎드리는 것, 그들의 영혼을 복된 구원자께 드리는 것에 굶주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셨고, 그 분은 신실하십니다. 우리가 이 약속들을 더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중국과 한국에서의 캠벨의 사역은 다양한 분야로 채워졌지만, 모든 사역에 있어 목적은 한 가지였다. 선교지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들의 영혼을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학원 사역, 의료 사역 등 모든 부분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에 캠벨이 가는 곳에는 늘 교회의 부흥과 사역의 확장이 일어났다.

특히 효과적인 복음전도를 위하여, 캠벨은 협력할 수 있는 ‘전도부인(Bible Women)’들을 양성하고 길러내는 일에 힘썼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당시의 중국,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선교사들이 선교를 개척해나가는 시기에, 선교사들은 ‘전도부인’이라고 불리는 현지 여성들을 위촉하여 조력자로 삼았다. 기독교 복음을 처음 접하는 현지 여성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세운 전도부인에게 선교사들은 사례를 지급하였고 집집마다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기도를 소개했다. 선교사들은 주로 전도부인들과 함께 다녔다. 서양인 여성의 등장은 군중들을 몰려들게 했고, 전도부인은 현지인들에게 익숙한 언어로 말하였으며 모여 있는 여성들을 가르쳤다. 또한 전도부인들은 서양 여성들이 갈 수 없는 곳으로 찾아가거나 성경을 전달하기도 했다. 아직 언어의 기술을 습득하지 못한 선교사들에게는, 전도부인이 성경을 전하고 교육할 수 있는 좋은 통로였다.

선교사들은 대체로 2~5명의 전도부인과 함께 일하였으며 전도부인은 자신을 고용한 선교사의 지시에 따라 관할 지역에 파송되어 전도 사업을 수행하였고, 선교사의 통제를 받았다. 선교 초기에는 전도부인 양성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이 미비한 상황에서 선교사가 한글을 깨친 여성들에게 개별적으로 성경과 단순한 교리를 가르쳐 전도 사업에 종사하게 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성장과 함께 전도부인 양성을 위한 전문적인 교육이 필요해짐에 따라 전도부인 양성을 위한 성경 공부 반, 성경 학원 등이 설립, 운영되었다. 전도부인은 바깥출입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안방의 여성들을 찾아다니며 성경, 찬송가를 팔고 한글을 가르쳐주며 기독교복음을 전했던 권서인(勸書人)이자 복음전도자였다.

1900년 부활절, 2층짜리의 벽돌 건물인 기숙사에서 캐롤라이나(배화) 학당 학생들과 교사, 전도부인 및 구도자들을 위한 예배를 드리면서 자골 교회가 시작되었다. 교회의 시작부터 이미 캠벨과 도라 유의 노력으로 세워진 여성들 70명가량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렸다. 하디(R. A. Hardie), 무스(J. R. Moose), 하운셀(C. G. Hounsell) 등 남성 목회자들이 담임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캠벨과 전도부인들의 영향력 아래 움직이는 교회였다.

자골 선교부가 위치한 지역은 높은 계층의 여성들, 한편으로는 가장 외딴 곳에 있는 여성들에게 더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었다. 1915년 캠벨이 ‘한국 여성들의 4가지 계층’을 통해 한국 여성들을 소개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양반이나 궁중의 높은 지위를 가진 여인들은 관습에 따라 속박당하며 격리당하여, 거리를 걸어보지 못한 채 생을 살아간다. 캠벨의 영향력 하에 전도부인들은 안방에 격리된 여성들을 방문하는 사역을 지속하였는데, 1902년과 1903년의 보고에 따르면 이들은 2,125번, 2,540번의 방문을 기록했다.

1910년~1912년에 걸친 안식년 휴가 이후, 캠벨은 자청하여 서울에 있는 수표교 교회(Water Mark Church)와 광희문 교회(Water Gate Church)의 복음 전도 사역을 맡게 되었다. 캠벨은 그곳에서 성경 공부 반을 운영하며, 성도들의 영적인 삶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 전도부인을 훈련시켰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비전을 갖게 하였다. 다음은 1915년 캠벨의 연회 보고 내용이다.

2월에 우리는 주간 성경 공부 반을 열었는데, 정규적으로 출석하지는 않았지만 93명의 여성들이 참석했습니다. 저는 25개의 가정을 매일 방문하고 또 방문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10명을 교리문답을 배웠는데, 많은 여성들이 흥미로워하고 있습니다. 이 학급을 섬기는 한 명의 전도부인은 두 명의 설교자들보다도 가치 있고 귀합니다. 그들이 설교자들의 설교를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우리가 그들의 집에서 그들의 생각과 소망을 끌어내어 그들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캠벨은 배움의 열정이 있는 여성 성도들을 성경 공부 반을 통해 가르치고, 또한 전도부인을 양성하여 이 일의 효율성을 더했다. 1917년의 보고에도 캠벨이 예년과 비슷하게 성경 공부 반과 전도부인 사역을 담당하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보고의 내용 속에 수표교 교회와 광희문 교회에서 온 전도부인들을 훈련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올해 광희문 교회와 수표교 교회의 사역은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예년들과 비슷하게 진행되었습니다. …… 2개의 교회들로부터 25명의 여성들이 참여하고 있고, 이들은 교회의 사역에 동참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독교인의 생명에 대한 폭넓은 견해를 가지고, 예배에서 영성생활에 동력이 되는 힘을 공급받았습니다. 전도부인들은 올해 너무나도 멋진 일을 했습니다. 그들이 방문한 가정은 비기독교도 3,352 가정, 기독교도 4,843 가정입니다.

캠벨의 양육으로 영성과 지성이 함양된 전도부인들은 한 해 동안 8,195번 가정들을 방문하여 교회의 사역에 동참하였다. 이러한 사역은 한국 여성들을 향한 사랑에서 이루어졌다. 프린스의 증언에 따르면, 언제나 캠벨의 마음은 한국 여성들로 인하여 아픔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캠벨은 일제의 식민 통치 하에서 압제와 가난 속에 허덕이는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였다. 마지막 안식년 휴가에서도 한국을 위해 강연을 하러 다니고 선교 자금을 모으면서, ‘단 한시도 한국을 잊을 수 없었다’는 가족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4. 후진양성

 

   
▲ ‘도라 유’의 전기에 실린 사진

캠벨은 두 곳의 선교지, 중국과 한국에서 각각 한 명을 ‘양자’로 삼았다. 물론 많은 이들의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했지만, 두 사람의 후배와는 보다 더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첫 번째 인물은 1897년 한국에 함께 들어온 ‘도라 유’다. 캠벨과 도라 유의 인연은 중국 소주에서 시작되었다. 도라 유는 메리 블랙 병원이 개원했을 때부터 활동했으며, 병원의 일을 지속적으로 도왔다. 병원과 연계된 메리 블랙 의대(Mary Black Medical School)를 최초로 졸업한 두 명 중 한 명이 도라 유였다.

도라 유는 장로교단 소속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도라 유가 의대에 재학 중일 때 2년 이 지나지 않아 부모가 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도라 유와 캠벨의 유대 관계는 의과 대학에 재학 중일 때 형성되었는데, 이 때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도라 유가 의대에 재학 중일 때, 캠벨 선교사는 도라 유의 영성과 생계를 깊이 있게 돌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어머니와 딸과 같은 관계가 되었다.

 부모님을 여읜 도라 유를 향한 캠벨의 돌봄은, 두 사람의 관계를 어머니와 딸의 친밀한 관계로 발전시켰다. 캠벨은 자신의 글에서 도라 유를 ‘수양딸’이라고 소개했고, 도라 유 역시 캠벨을 ‘양어머니’라고 말하였다. 도라 유는 캠벨과 한국에서 남 감리회 여성 선교의 개척을 시작했고, 언어를 배우는 일부터, 배화 학당의 기틀을 잡아가는 일(설립, 수업 진행, 교과서 번역 등), 자골교회 사역(전도부인 교육, 전도, 설교), 진료 등 많은 일들을 함께 했다. 그 과정에서 캠벨은 도라 유를 격려하고 신뢰하였는데, 도라 유에게 연회 보고의 기회를 주는가 하면, 연회 보고서의 곳곳에 도라 유의 활동을 칭찬하며 기록하기도 했다. 다음은 이에 대한 캠벨의 연회 보고서 내용이다.

유(도라 유) 양은 5명의 여성이 있는 반(전도부인)을 맡고 있는데, 이 중 네 명은 매일 1시간씩 배우고 있고 나머지는 정해진 시간에 수업을 받으러 옵니다. 그녀[도라 유]의 굳은 심지와 전도부인들을 위한 기도를 바라보는 것은 매우 즐겁습니다. 그녀는 매우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캠벨이 도라 유의 사역에 대해 지지하고 인정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1903년 여도라는 건강이 악화되어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후의 연회 보고에서 캠벨은 도라 유의 빈자리가 매우 크다고 말한다. 특히 도라 유가 환자를 돌봄에 있어 탁월한 능력이 있었음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중국으로 돌아간 도라 유는 복음 전도 활동을 계속 해 나갔다. 도라 유는 모든 교파를 초월하여 복음을 전하는, 20세기 초반 중국 남부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복음 전도자, 부흥사로 기록 되었다. 또한 상해 남부 교외에 “성경 공부와 기도의 집”을 설립하여 수많은 설교자를 양산하기도 했다.

두 번째 양자는 ‘유경상’인데, 그 역시 캠벨을 ‘양어머니’로 여겼다. 유경상은 1886년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배화 학당이 남녀 공학을 허용하던 초창기에 입학하여, 학업 도중 배재학당으로 옮겨 수학했다. 남감리회 해외 여성 선교부 총무였던 콥(J. B. Cobb)의 기록에 따르면, 유경상은 ‘캠벨의 집에서 자라나 명실상부한 어머니인 캠벨 선교사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한국인 청년’이며, ‘주님의 일에 겸비되어 신앙심이 강하고 기도생활이 풍부하며, 자신의 나라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데 순수한 열정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 조선기독교청년회 학생연합 하기대사경회(1913년) 사진. 오른쪽 앞에서 세 번째 줄에 검은 양복을 입은 유경상이 있다.

1904년 4월 자골 교회 부흥회에 참석하던 중, 유경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큰 죄인이며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며칠 뒤 “저는 새 마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결코 이것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는 제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쳤으며 제가 사는 동안 그분만 섬길 것을 결심합니다”라고 고백했다. 이후 유경상은 윤치호(尹致昊)가 설립한 송도의 한영학원(韓英書院)에서 학교 과정을 마치고, 그 곳에서 하디의 요청에 따라 그의 성경 공부 반과 복음 전도 사역의 조력자로 일했다. 또한 그는 황성 기독교 청년회(YMCA) 회장(1905), 자골 교회 유사(교회 재정 관리, 1906)로 활동하기도 했다. 유경상은 연장학업에 뜻을 두어 유학길에 올라 1909년 중국 동아대학(東亞大學), 1912년 일본 간사이 학원(關西學院) 신학부를 졸업했다. 1913년 남 감리회 전도사 직첩을 받고 1914년도부터는 4년간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로 봉직하여 후학을 양성했다. 그는 하디와 더불어 기독교서적들을 번역했고, 신학 자료가 부족하던 시기에 폭넓게 서구 신학을 소개하는 일에 공헌했다. 또한 오기선, 박희도 등과 함께 고등교육장려운동을 전개하여 교회 인재양성에 힘썼으며, 감리교와 YMCA, 엡웟 청년회 등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개최했다.

유경상은 1917년에는 석교 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였고, 1918년부터 1919년까지 광희문 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1919년 3월 1일 수표교 교회의 담임이었던 신석구 목사가 태화관 독립선언 현장에서 연행되어 구속되자, 남 감리회 연회는 투옥된 신석구 목사를 ‘휴직’으로 처리하고 교회를 비워둘 수 없어, 청년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유경상 목사를 담임으로 파송했다. 유경상은 3년간 수표교 교회를 섬기면서, 교회 내 영어 야학을 개설하여 청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또 미국인 신학자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개최하여 청년들을 일깨우기도 했다. 이 시기 청년들의 수가 늘었으며, 만세운동 이후 극도로 무기력해진 청년들에게 새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감당했다. 특정할 수는 없으나, 유경상이 광희문 교회와 수표교 교회를 담임하게 된 데에는 캠벨의 영향력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무할 당시, 캠벨과의 연결고리로 인하여 교회 내부의 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캠벨은 전반적인 한국의 정치 상황과 개개인을 넘어선 민족(특히 한국 여성들)의 신앙을 염려하고 걱정했고, 한국의 여성들을 위하여 다양한 사회적 사업들을 추진해왔다. 캠벨의 이러한 성향은 아들과도 같은 유경상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3.1운동 이후 한국교회의 일각에서는 사회의 현실에서 도피하여 종말론적인 부흥운동으로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교회 안팎에서는 이런 신앙 행태를 비판하였고, 새로운 사회참여 형태로 절제운동, 물산장려운동, 농촌계몽운동, 야학운동 등이 일어났다. 일제의 문화통치 안에서 합법적인 투쟁 방법을 찾아낸 셈이었다. 기독교사회주의는 교회의 사회참여를 위한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였는데, 유경상은 기독교사회주의를 주창한 사회운동가였다. 1921년부터 해방 무렵까지 유경상은 중앙중학교 영어 교사로 봉직했다. 1929년까지 자교 교회, 수표교 교회, 종교 교회 등에서 강연회 강사로 활약했으며, 1947년 동성중학교 교장 직에 취임했으나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순수한 교육을 추진하는 데 한계를 느껴 사임했다. 이후 미국에 체류하기도 하였으나, 후진 교육에 열정을 품고 귀국하여 보성 중학교에서 교사로 사역했다. 캠벨로부터 전수받은 교육 정신과, 사회 참여적인 성향이 작동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두 사람의 양자에 대하여 콥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런 두 사람에게 깊은 영향을 남길 만큼 복된 여인은 드뭅니다. 캠벨의 변하지 않는 믿음과 삶의 순수성, 성숙한 인격이 갖는 영향에 대하여, 이 두 명의 비범한 그리스도인들, 이보다 더 강한 증거는 없을 것입니다. 이들[도라 유, 유경상]은 중국과 한국의 부흥과 구원에 최고의 재능을 쏟아 붓고, 자신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각각 자신의 양 어머니가 조세핀 캠벨이라고 자랑스럽게 주장합니다.

 

Ⅲ. 나가는 말

 

캠벨은 마지막 안식년 휴가 중이었던 1920년 4월 15일 캔자스시티(Kansas City)의 중앙교회(Central Methodist Church)에서 열린 남 감리회 해외 여성 선교부 연회에 참석했다. 캠벨은 다섯째 날 오후 자신의 보고 차례에 발언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과 한국의 조세핀 캠벨은 그녀의 사역을 마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을 말했습니다.

‘한시도 한국을 잊을 수 없었던’ 캠벨은 디프테리아를 앓으면서 약해진 몸을 이끌고 1920년 8월에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한국에 다시 돌아온 지 4달 만인 1920년 11월 12일,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캠벨은 ‘한국에 넘치는 사랑을 주었고, 또한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교육과 의료, 전도와 후진양성에 쏟았던 캠벨의 헌신은 서거 100년이 지난 지금도 빛을 발하고 있다. 실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되다.”

* 필자의 원문에는 각주가 있었으나 이 게시글에서는 생략함-편집자 주

 

참고문헌

1. 회의록 및 보고서

Annual Report of the Woman's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Minutes of the annual conferences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Woman's Missionary Council


2. 사전류

『기독교대백과 서전』 1권.


3. 단행본

『배화 육십년사』 , 서울: 배화여자중.고등학교, 1958.
『설립 100주년 기념호 - 돌다리』, .기독교대한감리회 석교교회, 2010.
옥성득, 『한반도 대부흥』, (홍성사, 2009)
유동식, 박영신, 김은기, 도날드클락, 민경배, 박정신, 『기독교와 한국 역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7.
이덕주, 『신석구 연구』, 기독교대한감리회 홍보출판국, 2000.
이덕주, 『종교교회사』 서울: 도서출판 종교교회, 2005.
Anna Muse Brown, Oswald Eugene Brown, Life and Letters of Laura Askew Haygood Publishing house of M.E.Church, South, 1904.
Caryn Hannan, Georgia Biographical Dictionary Hamburg, MI : State History Publications, 2008.
Charles Yrigoyen Jr., Susan E. Warrick, Historical Dictionary of Methodism: Historical Dictionaries of Religions, Philosophies, and Movements Series Scarecrow Press, 2005.
Dana L. Robert, Christian Mission: How Christianity Became a World Religion Wiley-Blackwell, 2009.
Howell, Mabel Katherine, Women and the Kingdom: Fifty years of kingdom building by the wome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1878-1928 Cokesbury Press, 1928.
J. B. Cobb, Story of the years in Korea Nashville : Woman's Missionary Council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1920.
Jill K. Conway, Written by Herself: Autobiographies of American women Vintage Books, 1992.
Witness Lee, The history of the Church and the local churches Living Stream Ministry, 1993.


4. 소논문 및 단편 글

박명철, “100년의 징검다리, 100년의 디딤돌,” 『기독교 사상』, 대한기독교서회, 2008년 7월.
안수강, “유경상(劉敬相) 목사의 ‘正義觀’ 분석 - 그의 ‘正義의 力(1922)을 중심으로,” 『한국 기독교 신학논총』, 2020.
양주삼, “강부인의 략력,” 『조선남감리교회 30주년기념보』
A. E. Prince, “Planting the Gospel in Korea: Story of Josephine Peel Campbell” Department of Education and Promotion, Women's Section, Board of Missions,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Lambuth Building, Nashville Tennessee. N.D.
Juanita Brown, “Pioneering in Korea,” Winsome Call: Twelve Sessions for New Women's Missionary Societies Department of Education and Promotion, Women's Section, Board of Missions,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Nashville Tennessee. N.D.


5. 서간류

 J. P. Campbell, “Letter to Mrs. Mcgavok,” The General Commission on Archives and History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 소장자료, 1886.


6. 웹사이트

“Dora Yu,”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Christianity www.bdcconline.net
“Dora Yu,” 위키페디아(wikipedia) 백과사전 www.wikipedia.org
"전도부인(傳道夫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www.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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