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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하나님의 재판정에 소송을 걸다!” 미가6장 1절~8절
김명섭  |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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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11월 03일 (화) 13:10:09
최종편집 : 2020년 11월 03일 (화) 13:11:37 [조회수 : 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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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하나님의 재판정에 소송을 걸다!” 미가6장 1절~8절

 

1. 하나님의 재판정

 

① (1~2)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일어나서 산 앞에서 쟁변하여 작은 산으로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쟁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쟁변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미가의 세 번째 설교는 마치 법정에서 벌이는 소송처럼 쟁변과 변론을 통해 심판의 정당성을 입증한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재판관은 하나님이시다. 죄를 고발하는 원고는 ‘미가’이며 죄를 지은 피고는 ‘이스라엘’이다. ‘산들과 견고한 지대들’은 재판정의 방청객을 가리킨다. 단순한 방청객이 아니라 마치 판결에 참여하는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들’과 같은 역할을 한다. ‘여호와께서 쟁변하시고 변론하시는’ 이유는 단지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벌하시기 위함이 아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쟁변을 들으라’는 것은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에게까지 판결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는데 목적이 있다. 이스라엘의 그릇된 전철을 밟지 않고 이제라도 돌이켜 회개하길 원하시는 까닭이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지금은 배심원이지만 언젠간 우리도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피고’로 서게 된다. 사람의 평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사람의 판단은 변하고 부정확하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한결같고 다림줄처럼 정확하다.

 

② (3절~4절)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엇에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거하라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종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어 네 앞에 행하게 하였느니라”

▶ 하나님의 항변은 하나님의 탄식이다. 출애굽사건의 기억을 소환하신다. 출애굽은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속량이다. 속량(贖良, redemption)은 ‘값을 지불하고 노예에서 자유인이 되게 하신 구속의 은혜’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던 인류를 예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하신 대속의 은혜다.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를 원망하고 거역했으며 아론에게 금송아지를 만들게 해서 타락시켰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을 앞세워 반역을 꾀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배은망덕과 물에서 건져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의 적반하장을 일삼았다. 긍휼 베푸신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③ (5절)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의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추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추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의 의롭게 행한 것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 ‘모압왕 발락이 꾀한 것’은 약속의 땅으로 행진하는 이스라엘을 훼방하기 위해 발람에게 저주를 요청했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대적자다. 민수기 22장~24장을 살펴보면 ‘브올의 아들 발람의 답변’은 한마디로 그들의 저주와 방해가 무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의 사술로 막을 수 없다는 고백이다. 핵심은, 이 사실을 이방인 적대자 발락과 거짓선지자 발람은 알았는데 정작 이스라엘백성들은 몰랐다는 점이다. 마태복음 8장에 등장하는 거라사의 군대귀신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 알았는데 정작 하나님의 백성을 자처하던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과 같다.

▶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 싯딤은 요단강 동편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머문 곳이고 길갈은 요단강 서편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 초입이다.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은 요단강도하의 기적(수3장~4장)을 가리킨다. 기적적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이스라엘백성들과 이방족속들이 ‘다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요단강도하 직후에 이스라엘백성들은 길갈에서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다시 할례’를 행했다. (수5:9)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할례’는 몸의 중심이 부서지고 쪼개지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은 ‘그 은혜’와 ‘그 언약’을 망각했다는 것이다. 미가는 이스라엘의 죄악, 곧 이스라엘이 멸망한 원인을 단 한마디로 정의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미가는 국가나 교회, 가정이나 개인 등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모든 이들이 동일한 운명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증거 한다.

 

 

2. 참된 예배의 조건(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① (6절)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기억하는 것이 ‘예배’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예배의 문제였다. 예배의 본질은 ‘경배’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삶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일이다. ‘일 년 된 송아지’는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예물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경배는 없었다. 자기부인의 예배가 자기과시의 수단으로 전락했고 ‘바리새인의 누룩’처럼 외식하는 신앙생활로 변질됐다.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자기자랑으로, 감사로 드리는 예물을 의무감으로, 기쁨으로 드리는 섬김을 사람에게 보이려는 외식으로 드렸다. 이스라엘 예배의 문제는 신앙의 형식은 유지했지만 신앙의 본질(정신)은 잃어버렸다.

 

② (7절)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무엇인가? (시51:17)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하나님은 ‘의로운 제사’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기뻐하시고 원하신다. (삼상15:21~23)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 사울 왕을 버리신 까닭은 잘못된 예배 때문이었다. 오늘날 수많은 예배자들이 사울 왕과 같은 오류를 범한다.

▶ ‘내 허물을 위하여 맏아들을’ 가나안의 우상 몰록숭배에서 행해지던 인신공양(人身供養)을 가리킨다. 자기를 희생에서 타인을 살리는 ‘자기희생’과 정반대의 경우다. 자신이 지는 죄는 자기 자신이 죄 값을 치러야지 어찌 자신의 허물을 맏아들에게 전가시킨다는 말인가! 타인이나 약자를 희생양 삼으면 안 되고 내가 저지른 죄 값은 내가 치르는 것이 마땅하다. 미가는 이기적인 우상숭배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불의한 신앙행태를 고발한다. ‘내 영혼의 죄를 위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내 몸의 열매로 내 영혼의 죄를 해결할 수 없다. 주의 공로(은혜와 긍휼)로 용서받는 것이지 나의 공로(공덕)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자력구원’이 아니라 ‘타력구원’의 종교다. 구원을 나의 열심이나 헌신, 나의 수고와 공적에 의해 스스로 쟁취하는 것으로 여기는 ‘공로주의’를 비판한다. 오늘날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상숭배 하듯 세속적인 방식으로 섬기는 그릇된 신앙행위가 만연하고 있다.

 

 

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방식

 

① (8절)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 (메시지성경) ‘아니다. 그분께서는 이미 말씀해 주셨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씀해주셨다. 간단하다. 이웃에게 공의를 행하고, 자비를 베풀고 사랑에 충실하며, 자신을 중심에 두지 말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면 된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의 방식이다. 신앙의 형식을 준수하는 차원을 넘어 신앙의 생활화를 요구하신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세 가지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요구하신다. 첫째 ‘오직 공의를 행하며’ 공의는 단순히 사회정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Seek Ye First the Kingdom of God)’ 삶의 우선순위다. 둘째 ‘인자를 사랑하며’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 (갈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이웃 사랑이다. 끝으로 셋째는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은 신앙의 가장 높은 차원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동행’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준행’이다. 한마디로 ‘동행’은 ‘준행’이다. 준행은 ‘순종’이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높고 더 좋은 것을 알면 순종하게 된다. 겸손하면 순종하지만 교만하면 절대 순종이 안 된다. 살인, 도적질만 죄가 아니라 내 뜻대로 내 멋대로 사는 것이 성경이 전하는 ‘죄’의 본질이다. 이와 달리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말씀과 성령에 이끌려 사는 것이 ‘의’다.(죄인 VS 의인)

▶ 성경이 전하는 삶의 원리는 아주 심플하다. ‘욕심-죄(인)-사망’ VS ‘말씀-의(인)-생명’이다. 미가는 하나님의 재판정에서 이스라엘이 욕심에 이끌려 죄로 인해 결국 ‘사망(멸망)’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남 얘기할게 아니라, 미가는 ‘이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지금은 ‘배심원’의 자리에 있지만 나중에는 ‘피고’의 자리에 서게 될 우리들에게, 무엇에 이끌려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 돌아보고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속히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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