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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왜 읽나요?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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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11월 02일 (월) 00:58:35
최종편집 : 2020년 11월 10일 (화) 01:51:20 [조회수 :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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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자신의 안에 품는 것

 

성도님들께 성경을 왜 읽느냐니, 질문을 드리고 있는 제가 생각해도 우문 중의 우문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고, 성경은 하나님을 보여 주는 책이니까요. 환언하면 성경은 거기에서 하나님을 보기 위해 읽는다는 말이 됩니다. 성삼위 하나님,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봄으로써 그 마음과 본질, 속성, 그리고 그분의 뜻, 섭리를 알기 위해 읽는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것만이라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충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 얻는 것일 뿐 신자는 되지 못하는 까닭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신자가 되는 것일까요? 해 놓고 보니 이 또한 최상급 우문이 됐네요. 믿을 신(信)자에 놈 자(信)자를 써 ‘신자(信者)’라 하니 신자란 믿는 사람이라는 말 아닌가요. 결국, 성경을 읽고 알았으면 그대로 믿어야 신자가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믿는다는 게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우선 믿는다는 것 자체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냐 하는 문제가 생기지요. 그래서 그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드리려 볼까 합니다.

예수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15:4)라 말씀하시는데요, 이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인데, 무슨 의미일까요. 7절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 말씀하신 것으로 봐서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곧 그분의 말씀,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안에 있다는 말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안에 거한다는 것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이 조금은 복잡해졌는데요, 좀 더 간단히,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즉 그분의 뜻 안에 있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안에 있으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인 것이지요.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자신의 안에 주인으로 모시고 산다고 하지 않아요. 맞습니다. 그런데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나의 안에 모시고 사는 것이 될까요. 사도 바울은 우리의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빌2:5 참조)고 하는데, 그것 곧 예수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나의 안에 품고 그 마음으로 사는 것이 성삼위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며 사는 것이 되지요. 그리고 그것이 믿는 자들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곧 하나님의 마음이란

 

그렇다면 예수님,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모세는 하나님께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시라 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 청을 들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너무도 거룩한 당신이기에 그 얼굴을 보고도 살아남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분께서는 모세의 마음을 헤아리셔서 등만이라도 보여 주시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등을 보다가 혹 다른 부위까지 보게 될까 싶어, 그래서 죽을까 싶어 친히 손을 펴셔서 모세를 가려 주셨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같은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어느 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 하나를 끌고 와서는 예수님 앞에 세우고 모세의 율법은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했는데, 선생은 뭐라 말하겠느냐 따져 물은 적이 있습니다. 말꼬투리를 잡아 그분을 곤란케 하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그분은 그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두려움과 수치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여자를 생각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했다는 그들의 말은 한 치의 틀림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십계명조차 제7계명에서 간음하지 말라 했는데, 더 말해 뭣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보다 여자를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여자여’라고 부르는데, 이는 잘못된 번역에서 생긴 오류입니다. 이 말의 헬라어는 ‘귀나이’로 가장 예의바르고 정중한 호칭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여자여’라 불렀던 그 호칭으로, 공동번역이 ‘어머니’라 번역한 말이지요. 그리스에서는 왕이 왕후를 부를 때나, 사람들이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 자기의 아내를 사랑스럽게 부를 때도 쓴 호칭이기도 한데요,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어머니를 부를 때조차도 썼던 말이지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게 선뜻 이해가 되시나요. 중죄 중의 중죄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끌려온 여자에게입니다. 마구잡이로 끌려왔으니 머리는 헝클어지고 옷도 찢겼을 것입니다. 어쩌면 도중에 누군가가 던진 돌에 맞아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런 처참한 몰골의 여자에게 ‘귀나이’라 부드럽고도 따스한 음성으로 불러 주시는 예수님, 그게 우리 주님이십니다. 사랑의 주님이시지요.

예수님께서는 나인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신 일도 있는데요, 사람들이 죽은 그를 메고 나오는 걸 성문 가까이에서 우연히 만났을 뿐 일면식도 없었습니다. 이럴 경우 대개가 그냥 지나치고 마는 것이 보통인데요,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불쌍한 마음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과부의 아들이기에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과부를 ‘울지 말라’ 위로 하시고 그녀의 외아들을 살려 주신 것입니다. 울지 말아요. 이는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슬픔에 빠진 과부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위로였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이 이 말고도 두 번이 더 있는데,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 나사로를 살리신 일이 그것입니다. 모두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가족들과 공유한 데에서 가엽고 불쌍한 마음이 뜨겁게 일어나서이지요.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몇 번인가 나타나신 일이 있는데, 한번은 디베랴 호수로 찾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밤새껏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려 했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이러이러해라 가르쳐 주심으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시고는, 미리 준비한 숯불 위에 생선이며 떡을 올려놓아 식사 준비를 마친 후 ‘와서 조반을 먹으라’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밤새 고기잡이로 지친 제자들에게 따뜻하게 구운 떡도 가져다주시고 생선도 가져다주셨습니다. 추운 겨울 야간작업을 하고 꽁꽁 얼어 돌아온 아들에게 따뜻하게 준비해 둔 밥상머리에 앉아 시중을 들어 주는 어머니와 닮은 모습이 아닐까요.

 

 

거룩과 기름부음은 동의어

 

우리 하나님, 우리 예수님은 이처럼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요일4:8)이신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요, 그 사랑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아 괴로운 때가 있었습니다.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어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하는 그 크신 사랑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거기에서 따스하고 포근한 사랑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을 꼼꼼히 읽는다고 하면서도 성삼위 하나님의 마음은 읽지를 못한 것이지요.

지금 나름대로 성경에서 읽은 하나님의 마음을 몇 가지 들어 봤는데요, 그러며 자신의 신앙적 감수성과 필력에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정도이겠습니까. 하기야 누군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그대로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마는.

성경은 거기에서 하나님을 보기 위해 읽는 것이고, 보고 알았으면 그대로 믿어야 신자가 된다고 앞에서 말씀드렸는데요,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고, 그 중심이 되는 속성 또한 사랑이니, 신자는, 그러니까 크리스천은 그 사랑을, 그 사랑의 마음을 안에 품어 실천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크리스천이라는 말이지요.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제 나름 생각해 봤는데요, 많이 부족하지만, 그런 사랑조차도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다시 말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 존재가 크리스천(롬14:8 참조)이라고 말할 정도이니, 사랑을 실천하여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쉬울 수가 없는 일이지요. 죽게 되면 죽겠다는 각오 없이는 진정한 크리스천이 될 수 없다는 말도 됩니다.

우리는 흔히 목사와 같은 사역자를 가리켜 기름 부은 종이라 하는데,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같은 전문 사역자만을 기름 부은 종이라 한다면 틀린 말이 됩니다. 지금은 신약시대인데, 그건 구약시대의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나 선지자, 왕처럼 하나님의 직무를 수행할 사람을 세울 때 일반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해 실제로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실제로 기름을 붓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목사안수나 장로 안수 같은 것을 기름부음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름부음이라기보다 교회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았다고 하는 인증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나의 선언적 행위와도 같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의 기름부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 대답은 극히 간단합니다. 믿는 것 자체가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니까요. 믿음은 성령에 의해 그와 함께, 그러니까 성령님과 함께 우리에게 내재하는 것이니, 성령을 받는 그 자체가 기름부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일을 할 사람을 세울 때 일반 사람과 구별하되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해 기름을 부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오늘의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지요. 우리도 거룩하게 구별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거룩’이라는 말에 놀랄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기독교에서의 거룩은 ‘성스럽고 위대하다’고 하는 세상일반의 의미와는 크게 다르니까요. 기독교에서 ‘거룩’은 세상과의 ‘구별’을 의미하거든요.

하기야 이 또한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세상과의 구별은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살며 세상풍조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오늘의 크리스천들은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구별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대단히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교회에 가서 예배보고, 교회의 각종 행사에 참여하고, 그리고 밖에 나가서는 식사기도를 하는 정도 외에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가끔 사회적 약자를 돕는 봉사활동 같은 것을 하기도 합니다만, 그때뿐입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의무감에서 그리하기는 했지만, 그게 끝나면 그뿐,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마음도 관심사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라 세상(사람들)의 마음인 것이지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책

 

이제 슬슬 말씀을 마칠까 하는데요, 저는 앞에서 성경은 하나님을 보기 위해, 그리고 그분의 본질과 속성, 뜻과 섭리를 알아 믿기 위해 읽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알기 위해서 읽는 것 같습니다. 말로는 아니라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런 것 같습니다.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성서신학자들만큼 믿음 좋은 사람들은 없어야 할 것인데, 보세요, 신학대학만큼 분쟁과 분란이 심한 데도 없지 않습니까. 그들만큼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신학대학 교수를 빼면 목사들만큼 성경을 많이 읽어 많이 아는 사람들도 없는데, 그런데도 성추행을 하고, 교회세습을 하고, 부교역자를 종처럼 부리고, 헌금에 눈독을 들이고, 코로나19 확산에 앞장을 서는 등등, 기독교와 교회를 사회로 하여금 비난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것은 왜일까요. 성경을, 주일날 교회에 들고 갔다 와서 어딘가에 놓아두었다가 다음 주일날 교회에 갈 때에서야 다시 찾아 들고 나서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소위 나일론 신자들보다 이들 목사가 더 나은 것이 무엇일까요. 나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지요.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성경은 거기에서 하나님을 뵙고 알아 믿기 위해 읽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게시하시고 계시는 책입니다.

그러니 성경은 읽는다고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안다고 믿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책이니 성령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안다 해도 모두가 믿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성령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도움은 기도로 밖에 청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기도의 제목이 하나 더 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기도에 대해서는 머지않은 날에, 빠르면 다음 글에서라도 말씀드릴 기회를 갖고 싶습니다.)

이제 기도로 말씀을 마칠까 하는데, 원하신다면 같이 기도하시지요.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저를 말씀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말씀이 말씀되어 말씀으로 저를 포함한 우리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그리하여 기독교와 교회와 크리스천에 대한 세상의 비난이 칭찬으로 바뀌게 하여 주옵소서. 따라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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