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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한국에 가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캠벨 선교사 서거 100주년 기념사업 개최한다.
심자득  |  webmaster@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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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10월 16일 (금) 11:59:33
최종편집 : 2020년 10월 21일 (수) 10:14:18 [조회수 :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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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화학당과 종교교회, 자교교회를 설립한 캠벨 선교사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이 그의 소천일인 오는 11월 12일 ‘캠벨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개최된다. 이에 앞서 기념사업회가 기자간담회를 열고 기념사업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2020년 11월 12일은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사로 배화학당과 종교교회, 자교교회를 설립한 조세핀 캠벨(Josephine Eaton Peel Campbell) 선교사가 서거한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캠벨이 세우거나 사역한 배화학원과 종교교회와 자교교회, 광희문교회와 수표교교회 등이 ‘캠벨 기념 사업회’(회장 최이우 목사)를 조직하여 ‘추모예배’와 ‘학술제’ 등의 행사를 계획하고 16일 오전 종교교회에서 기념사업을 설명하기 위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학술제는 11월 12일(목) 오전 10시 배화대강당에서, 100주기 추모예배는 11월 15일 주일 오후 5시에 종교교회에서 열릴 예정이다. 기념 학술제에서 이덕주 교수(감리교신학대학 은퇴교수)가 "캠벨 부인의 조선 사랑"을 주제로 기조 강연하고 황미숙 박사(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원)가 "캠벨의 교육 이념과 활동"을 주제로, 권지영 목사(평동교회 부목사)가 "캠벨의 선교 사역"을 주제로 각각 발제할 예정이다. 기념사업회는 캠벨 전기(傳記)를 발간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이 사업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 본부, 선교국, 교육국,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서울남연회, 기독교대한감리회 학원선교회가 협력하고 있다.

   
 

캠벨 선교사는 1853년 미국 텍사스에서 출생했다. 스물한 살에 조셉 캠벨 목사와 결혼하였으나 일찍이 사별하고 두 자녀도 이어 세상을 떠났다. 그 충격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주님께 드리기로 서원하고, 시카고의 사범학교에서 간호교육을 받은 후 1886년 미국 남감리교회 해외 선교사로 임명을 받아 중국의 상해 등지에서 10여 년간 사역을 했다.

1897년 10월 9일 미국 남감리회 해외여선교부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최초의 선교사로 서울에 도착해서 남대문 근처의 남송현 선교부에 정착을 했다. 1898년 8월 1일 고가나무골(현 내자동)의 이항복 집터에 여성기숙학교(Boarding School)를 시작하였는데, 이를 육성하여 1898년 10월 2일 남감리회의 대표적 여학교인 배화학당을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연회에서 보낸 헌금이 사용되었기에 ‘캐롤라이나 학당(Carolina Institute)’이라 불리다가, 1903년 12월 윤치호에 의해 ‘배화학당’으로 정식 개칭을 하였다. 배화학당(培花學堂)이란 “여성을 아름답게 기르고, 꽃 피워 내는 배움의 터전”을 의미한다. 캠벨 선교사는 1898년부터 1912년까지 초대 교장으로 봉직하였다.

1900년 4월15일 부활주일 배화학당의 새 교사(校舍)인 ‘자골의 선교를 위한 집(mission home in Chakol)’에서 하디(Robert A. Hardie) 선교사의 인도와 설교로 시작한 첫 예배가 자골 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이 자골교회가 종교교회와 자교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1901년 학당 안에 루이스 워커(Lousie Walker) 기념예배당을 지어 봉헌하였고, 교인 수가 늘어나자 배화학당과 여선교사 사택은 누하동으로 교회는 도렴동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1912년 안식년 휴가에서 돌아온 뒤 학교 운영을 니콜스와 스미스 등 젊은 선교사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필운동 새 부지에 학교를 옮겨 짓는 일과 수표교교회 광희문교회 석교교회 등에서 여성 교육사업과 전도부인 양성사업에 매진하였으며, 세브란스의 간호학교에서도 수간호사 및 간호학교 교장으로 간호사 양성교육을 했다.

1918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갔다가 이듬해 되돌아오려고 준비 하던 중에 신병을 얻어 주위 친지들이 병이 회복된 뒤에 여행하기를 권유했으나, “나는 한국을 위해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한국에 가서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라는 말을 뒤로하고 1919년 8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결국 병세가 악화되어 1920년 11월 12일 6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장례식은 배화학교장(學校葬)으로 거행되었고 양화진 선교사 제1묘역(나-7)에 안장되었다.

 

   
▲ 이날 기자간담회는 기념사업회의 보 및 학술제 진행을 맡은 전병식 교수(배화여자대학교 교목실장)의 사회로 진행됐다
   
▲ 기념사업의 기획과 역사 고증을 맡은 이덕주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은퇴교수)가 캠벨선교사에 대해 설명했다.
   
 

 

   
▲ 캠벨이 교장을 맡았던 세브란스간호학교 졸업식 장면(1917년)
   
▲ 1930년대의 배화학당 전경.
   
▲ 종교교회
   
▲ 자교교회
   
▲ 배화학당 교사와 졸업생. 뒷줄 맨 오른쪽에 남궁억 선생이 보인다
   
▲ 배화학당 교사와 학생(1904)
   
▲ 양화진 선교사 묘역의 캠벨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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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벨 선교사 소개글(권지영 목사)

캠벨의 생애와 선교활동

 

저 홀로 자라는 나무는 없다. 지금의 무성한 잎사귀와 두툼한 나무 밑둥이 있기까지는 수없는 세월동안 나무를 심고 돌보며 가꾸는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수많은 여성 인재들을 배출해온 배화학원의 시작에는 캠벨(Josephine P. Campbell) 이라는 한 여성 선교사가 있었다. 설립자 캠벨의 생애와 선교활동을 재조명하는 일은 우리의 뿌리를 더욱 견고하게 마련해가는 작업이 될 것이며, 아울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줄 것이다.

 

* 캠벨의 출생과 선교사 지원

   
 

캠벨은 1853년 미국 남부 텍사스의 웨이코(Waco)에서 출생했다. 캠벨의 선교사로서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외할아버지인 마틴 루터(Martin Ruter) 다. 그는 켄터키의 어거스타 대학과 펜실베니아의 엘러게니 대학의 학장을 역임하고 미국 감리교 목사로서는 최초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학장을 사임하고 텍사스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6개월 동안 2,200마일(약 3,726㎞)을 다니며 연합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다 건강이 악화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조세핀의 아버지 브라이언트 필(Bryant L. Peel)은 남 감리회 텍사스 연회 소속 목사였고, 법조인으로도 활동한 인물이다. 루터에서 필로 이어지는 목회자 가정의 환경은 고난에 직면했던 캠벨로 하여금 선교 사역으로 눈을 돌리는 데 영향을 주었다.

1878년 캠벨은 조지아 주 출신의 캠벨(A. M. Campbell) 목사1)와 결혼했다. 이들의 결혼생활은 매우 행복했으며2) 2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둘째 남자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남편 캠벨 목사 역시 쇠약해져 얼마 후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첫째 딸 루이스도 2년 후 성홍열에 걸려 생을 마감했다. 5년의 행복한 결혼생활에 이어진 3년여의 짧은 시간동안 캠벨은 가족 모두를 잃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대한 기록에 이어지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그래서 캠벨은 고통을 통해 인류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이해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영성은 매우 담대했고 그리스도적이었기 때문에 비탄에 빠지지 않았다.3)

캠벨은 고통을 통해서 슬픔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으나, 자신을 향한 비탄에 매몰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눈을 돌려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또 다른 기록은 캠벨을 힘들게 했던 상실의 경험이, 오히려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4) “녀자 교육의 개척자를 일흠”에서는 이 모든 일을 겪은 캠벨이 남은 일생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공헌하기로 결심”하였다고 전한다5). 이러한 과정에 대해 기술한 「한국 선교의 개척자」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가족을 모두 잃은 뒤, 캠벨은 하나님께서 그녀의 빈손을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채워주시기를 기도했다. 1년 이내에, 그녀는 중국 선교사가 되었다.6)

캠벨은 자신이 기도해왔던 대로, 더 많은 헌신을 할 수 있는 곳인 중국으로의 선교 요청이 오자, 흔쾌히 수락했다. 캠벨은 1년여의 시간동안 간호사교육을 완료하고, 사범학교를 졸업하여 교사자격증을 받았다. 그리고 1887년 봄에 중국 선교사로 첫 발을 내딛었다.

 

* 캠벨의 한국 선교

캠벨의 생애를 조명해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동시에 여러 가지 역할을 소화해냈다는 점이다. 선교 초기에 선교지에서 요구되는 역할들이 다양하기 때문도 있겠지만, 이는 캠벨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쏟아 선교지를 도우려는 열정이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캠벨이 1887년 4월 상해에 도착하여 1897년 10월 한국으로 파송되기까지 10년 여 간 수행한 역할들은 상해 여학교 음악교사, 상해와 쑤저우 여선교회 본부의 사역 관리, 쑤저우 여성병원의 수간호사(총 책임자), 쑤저우 매일학교 운영, 램버드 학교(간호학교) 교장, 요한복음 번역(쑤저우 방언으로), 여성 전도사역 등 다양하다.

1897년 남 감리회 해외 여선교회는 중국에서 10년 여 동안 경험을 쌓은 캠벨을 한국 여선교회 사역의 개척자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캠벨은 중국으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주저함 없이 즉각적으로 요청에 응했다. 캠벨은 1918년 안식년 휴가를 떠나기까지 교육사역(배화 학당, 매일학교, 야학 등), 교회 사역(전도부인 양성 및 활동, 주일학교 운영 등), 의료사역(세브란스병원 수간호사)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며 한국을 위해 헌신했다.

캠벨은 처음 한국에 들어와 남 감리회 본부가 있던 남송현에서 사역을 시작한 후 1년 뒤에 장흥고 앞 새로운 선교부지인 자골로 이전해 새로운 선교사업을 열어갔다. 자골에서 정식 학교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매일학교를 시작하고 있었던 캠벨은 6명의 학생들과 함께 캐롤라이나 학당(이후 배화학당)의 문을 열었다. 학당의 초기에는 낮은 계층의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근대적 학교의 형태를 찾아볼 수 없었으나, 이후 조금씩 발전해 낮은 계층으로는 보이지 않는 근대적인 기독교 여성들을 배출해냈다.

그리고 남송현의 남 감리회 선교부의 사역이 침체되면서 1900년 4월 15일 부활주일부터 캐롤라이나 학당의 기숙사에서 처음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자골교회의 시작이다. 자골교회는 캠벨의 영향력으로 양성된 전도부인들의 왕성한 활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계속 증가하는 교인들을 기존의 예배당 규모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고, 예배당이 여성 선교구역 안에 있던 관계로 남성들의 접근성이 저하되는 등 자골교회로서는 독자적인 예배 공간의 필요성을 느끼고 종침교 부근의 도렴동으로 예배장소를 이전했다. 1910년 6월 도렴동에 마련된 새 벽돌예배당을 종교교회라 부르기 시작했다.7)

캠벨은 1912년 배화학당의 교장을 다른 이에게 맡기면서 서울의 다른 지역의 여성사역에 참여했는데, 특히 수표교교회와 광희문교회의 전도부인 사역을 맡았다. 1918년 안식년 휴가를 떠나기까지 캠벨은 끊임없이 한국을 위한 사역에 헌신했다. 안식년 휴가를 떠났을 때에도 한국선교에의 관심을 환기시키며 후원자를 모으고,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시대상황 속에 놓인 한국 여성들을 생각하며 새로운 산업기술(양봉업, 양계업, 낙농업)을 배워 전수해주고자 했다.

한 번도 환자 목록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캠벨이었지만, 1918년 발목 부상에 이어진 디프테리아를 앓으면서 심장이 약해지는 등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먼 여행을 하기에는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나 캠벨은 한국에 더 헌신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갖고 1920년 8월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오려는 발걸음을 주변의 모두가 만류했을 때, 캠벨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한국을 위해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한국에 가서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8)

캠벨은 한국에 다시 돌아온 지 4달만인 1920년 11월 12일 별세하여 15일에 양화진 서양인 공동묘지에 묻혔다. 캠벨의 삶은 선교지와 선교지의 사람들을 위해 한 평생을 헌신한 삶이었다. 이 같은 캠벨의 생애는 한국교회의 귀중한 선교 유산으로 남아있다.

 

 

참고문헌

『신학세계』

『조선남감리교회 30주년기념보』. 조선남감리교회 전도국, 1929.

Juanita Brown. “Pioneering in Korea”. Winsome Call: Twelve Sessions for New Women's Missionary Societies. Department of Education and Promotion, Women's Section, Board of Missions,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Nashville Tennessee. N.D.

A. E. Prince. “Planting the Gospel in Korea: Story of Josephine Peel Campbell”. Department of Education and Promotion, Women's Section, Board of Missions,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Lambuth Building, Nashville Tennessee. N.D.

 

각주)

1) 본고에서는 캠벨과의 구별을 위해 남편인 캠벨의 칭호는 ‘캠벨 목사’로 한다.
2) Juanita Brown, “Pioneering in Korea,” Winsome Call: Twelve Sessions for New Women's Missionary Societies (Department of Education and Promotion, Women's Section, Board of Missions,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Nashville Tennessee. N.D.) 33.
3)  A. E. Prince, “Planting the Gospel in Korea: Story of Josephine Peel Campbell,” (Department of Education and Promotion, Women's Section, Board of Missions,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Lambuth Building, Nashville Tennessee. N.D.)
4) Juanita Brown, “Pioneering in Korea,” Winsome Call: Twelve Sessions for New Women's Missionary Societies 33.
5) 김인영, “녀자 교육의 개척자를 일흠,” 『신학세계』(1921) 115.
6) Juanita Brown, “Pioneering in Korea,” Winsome Call: Twelve Sessions for New Women's Missionary Societies 33.
7) 1910년 정춘수 전도사와 홍다비다 전도부인을 중심으로 종교교회가 형성되었을 때, 이들과 함께 갈라져나가지 않고 교내에 남아있던 자골 신앙공동체는 계속 남아 예배를 드렸으며, 이후 경복궁에서 가까운 창성동에 한옥을 구입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종교교회와 같은 뿌리를 가진 자교교회의 출발이다.
8) 양주삼, “강부인의 략력,” 『조선남감리교회 30주년기념보』 288.
9) Juanita Brown. “Pioneering in Korea”. Winsome Call: Twelve Sessions for New Women's Missionary Societies. Department of Education and Promotion, Women's Section, Board of Missions,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Nashville Tennessee. 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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