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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제상이요, 우리는 그 위의 제물입니다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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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9월 09일 (수) 14:19:22
최종편집 : 2020년 09월 14일 (월) 21:45:08 [조회수 : 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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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중한 용모의 미남자에 상남자 요셉

 

제가 다니는 교회 지난주일 설교에 요셉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때가 때이니만큼 물론 비대면 온라인예배에서이지요. 가슴에 와 닿는 내용이라서 성경을 찾아 다시 한 번 읽어 보았습니다.

다들 아시는 대로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 번째 아들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말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도 하는데요,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모세를 만나셨을 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출3:6)이시라며 당신에 대해 하신 말씀이지요. 요셉은 그 야곱의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을 계시하시고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모세를 지도자로 하여 진행 중인 출애굽의 역사 또한 당신과의 언약의 이행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을 통해 약속하신 모든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이행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요셉은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했는데요, 그뿐 아니라 그가 조금은 철이 덜든 것 같은, 자기자랑 같은 언행도 했고, 또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기도 했으므로 형들의 시샘과 미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열일곱 때였으니 적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였으나 아직 성숙의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요셉의 인생이 일대 전기를 맞았습니다. 초원에서 양을 치고 있는 형들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온 그를 애굽으로 가는 이스마엘 대상(隊商,Caravan)에게 팔아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대상들은 그를 다시 애굽 왕 바로의 신하로 친위대장인 보디발에게 팔았습니다.

그런데 친위대장은 왕의 경호대장이라고나 할까요, 하여튼 보디발이라는 이름에는 ‘태양에 속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을 정도로 그는 강대국 애굽에서도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는 하나님께서 요셉으로 인하여 자기 집을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고 가정의 총무로 삼아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마음대로 주관하게 했습니다. 그의 소유는 날로 불어났고, 그는 요셉이 하는 일에 무엇 하나 간섭한 적이 없었습니다.

요셉은 용모 또한 출중한 미남자에 상남자이기도 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그러한 그를 유혹하여 욕정을 채우려했으나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자 간계로 그를 파렴치한으로 내몰아 주인 보디발로 하여금 감옥에 가두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감옥에서도 간수장의 눈에 들어 옥중의 죄수와 제반 사무를 맡아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요셉은 본래 해몽에 능한 사람이었는데요, 형들이 ‘꿈 쟁이’라 할 정도였지요.

그는 감옥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꿈을 해석하여 그대로 되었고, 그것은 그가 바로 앞에 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로가 꾼 꿈 때문에 번민하여 온 나라의 이름 있는 점술가와 해몽의 전문가를 모두 불러 모았으나 속 시원히 해석해 주는 사람이 없자 요셉을 부른 것이었지요.

 

애굽 왕 바로의 안목

 

요셉의 해몽과 그에 대한 대비에 대해 들은 바로는 크게 만족했습니다. 신하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에 바로는 즉석에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임명하고, 자기의 인장반지를 빼어 그의 손가락에 끼워주며 자기가 타는 것 말고는 가장 좋은 수레에 태우는 등 그를 높일 수 있는 데까지 높여 주었습니다. 그러고도 모자라 온 애굽 땅에서 네 허락이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을 것이라 하고는, 심지어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자신은 이제 왕좌나 지키며 편히 지낼 테니 네가 제2인자가 되어 실제적 집권자로서 나라를 다스리라는 의미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해가 가십니까? 아무리 마음에 들었다 해도, 아무리 마음이 사로잡혔다 해도 하루도 안 되는 동안에 일어난 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이는 틀림없는 사실(事實·史實)입니다.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는 거짓을 사실이라고 믿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무엇이 바로로 하여금 요셉을 그토록 신뢰하게 했을까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창41:38 참조). 요셉은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라고 한 바로의 말에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주실 것이라 했고, 바로의 꿈을 듣고는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결처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실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창41:25-32 참조) 모두가 하나님께 하신 것이지 자기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에는 비록 애굽의 점술가나 능력 있다는 사람들이 바로의 마음에 드는 해몽을 하지 못했을망정 강대국일 뿐 아니라 문명국이라고 자처하는 애굽에는 대단한 술사들과 현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이때까지 본 그들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공은 모두 자신에게 돌릴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달랐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 했고, 그것은 그의 해몽과 그에 대한 대책이 증명해 준 것이었습니다.

이에서 바로는 요셉의 진가를 확실히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일을 맡기면 그의 하나님이 보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믿게 된 것이지요. 그는 역시 대국 애굽의 왕이었습니다.

 

‘때려! 때려! 더 때려!’라며 머리를 디미는 사람들

 

믿는 사람들은 요셉을 참으로 많이 닮았습니다. 이래도 하나님의 은혜요, 저래도 하나님의 은혜라 합니다. 조기축구팀끼리의 시합에서 이겨도 하나님의 은혜요, 고스톱을 치다가 이겨도 하나님의 은혜라 합니다. 입은 요셉을 닮은 것 같으나 마음은 아닌 거지요.

그런데요, 요즘의 우리사회가 꼭 그런 것 같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열심을 내는데, 실은 성경이 말하려는 것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종교의 자유는 목숨과 바꿀 수 없는 가치이고, 예배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이니 목숨 걸고 지켜야 한다며 대면예배만을 고집하여 코로나19의 확산에 일조하는 사람들이 그들이지요.

사람 사랑이 하나님 사랑의 핵심인데, 사랑의 하나님의 사랑 대상이 사람인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을 하며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했다며 ‘때려! 때려! 더 때려!’라며 머리를 디미는 꼴이지요.

우리는 성삼위 하나님을 보기 위해, 그분의 마음, 뜻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읽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자기 안에 주인으로 모시고 그 마음으로 그 뜻을 따라 살기 위해 성경을 읽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알아 그를 따라 살기 위해, 환언하면 그분의 섭리에 순응해가며 살기 위해 성경을 읽는다는 말도 됩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은 없는 거 아니냐고요? 그렇습니다. 내 안에 내가 없고 하나님이 계시는 것인데, 그게 진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나이지요. 이를 가리켜 흔히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다고들 하는데, 맞습니다. 그런데요, 누더기 같은 나를 바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를 보배로운 나로 만드셔서 돌려주십니다. 그것이 나이고, 그것이 기독교 신앙이지요.

그런데도 그와는 반대로 살면서 그것을 열심 있는 신앙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앞에서 예로 든 것 같은 사람들이지요.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한테 상처를 주고는 자기가 이겼다고 우쭐대는 사람들조차도 자기를 크리스천이라 믿고 있기도 하지요.

저도 짧은 인생으로서는 길다면 긴 세월을 살아왔는데, 요즘처럼 혼란스러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옳고 그름의 경계가 무너져 가치관에 혼란이 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구를 자기중심으로 돌리려 하고 있는 것이지요. 자기가 하는 것은 다 옳고 자기와 다르면 모두가 그르다 생각들을 합니다. 그도 모자라 자기가 싫어하는 어느 특정인물을 기준으로 하여 그가 하는 것은 모두 악이라 규정짓는 사람도 있습니다.

요즘은 문재인 대통령을 악의 기준으로 보는 듯 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절대 악인 사람도, 절대 선인 사람도 없습니다. 차이가 있을 뿐이고, 그 차이가 크고 작을 뿐입니다.

제 글에 댓글을 달아 주고 계시는 분 가운데에도 그와 비슷한 논자가 계십니다. 그러나 저는 언젠가 부터는 그 분의 댓글을 읽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때그때의 논지(?)가 엇비슷하거든요. 정성들여 써 주셨는데, 읽지 않은 것이 실례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댓글을 다는 자유가 있듯이 그것을 읽지 않을 수 있는 자유 또한 있다는 생각에서인데, 아닐까요.

지금의 혼란은 이기심의 발로에 의한 게 아닌가 합니다. 기득권자들이 가진 것을 놓지 않으려는 데에서 생긴 것이지요. 우월감도 한 몫 한 걸 거예요. 우월감 또한 가진 자들의 가진 것의 일부 아니겠어요? 전교 1등 운운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렇담 가진 것이 별로 없는데도 기득권자들의 가진 것 지키기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되냐고요? 글쎄요, 기득권자들의 기득권을 저지하는 측이 자기가 싫어하는 자들이니 덩달아 춤을 추는 게 아닐까요?

 

아, 참! 또 아, 참!

 

아, 참! 얼마 전에 절친 하나에게 사유의 시간을 가지며 글 쓰는 것을 한두 주 쉬겠다고 했는데, 며칠이 못되어 다시 자판을 두드리게 되었네요. 혼란스러운 세태에 대해 쓰다 보니 마음이 거칠어지는 것 같아 좀 쉬며 생각할 시간을 가지려 했던 것인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설교에서 요셉 이야기를 듣고 느낀 것이 있었거든요.

O형, 미안해요.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립니다. 이 또한 사유의 한가지라 생각해 주세요. 미움은 싹― 빼고, 사랑까지는 아닐지라도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썼습니다.

또 아, 참! 이네요. 어떤 정치인이 우분투(UBUNTU)를 예로 들어 말을 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빨리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이 글의 결론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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