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시작한 논농사가 수확의 시기로 다가가면서 중간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다. 공동으로 짓는 논은 차를 타거나 산책을 하면서 두 눈으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 있기 때문에 논의 상황을 살피는 것은 별반 어렵지 않다. 그리고 6월 초에 방생한 우렁이가 제때 예초를 잘 해주기 때문에 피를 뽑는 수고도 없다. 그렇지만 올해처럼 오십일 이상 줄기차게 내린 비의 경우는 다르다. 이런 때는 밭뿐만 아니라 논에도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풀과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 매년 한여름 내내 자란 논둑과 길가의 풀을 베지 않아 이웃집에서 보란 듯이 예초를 해주기는 한데, 바짝 잘라진 풀 위에 제초제를 흠뻑 뿌려놓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럴때마다 친환경을 하는 나로서는 마음이 상하기도 하지만 나의 게으름에 의한 결과이니 그저 속만 끓인다. 내년에는 꼭 제 때 베겠다는 다짐과 함께. 그러나저러나 논농사 8년 차를 맞으면서 이번 해처럼 벼보다 피가 더 많아 보인 때도 없고, 피를 뽑느라 사나흘의 시간을 공들인 적도 없다. 확실히 이번 비는 와도 너무 많이 온 경우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그 많던 논의 예초의 제왕 우렁이들이 떠내려갔다. 아쉬움이 컸다.

피는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 교묘하게 숨어 자란다. 위장술이 뛰어나 처음 벼를 심고 난 뒤에는 이것이 벼인지 피인지 구별이 어렵다. 초창기에는 생김새가 벼와 똑같아 솎아내는데 잠시 망설이게 했다. 반면 농사의 고수가 되신 소속교회 목사님과 사모님은 눈길 한번만으로 ‘이것이 피로구나’ 하시며 쓱싹 낫질을 하셨다. 이 모습 또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렵고 힘들지만 그저 재미있게 여겨진 처음 농사에서 나도 속히 쓱싹 하고 싶은 욕망이 강렬했다. 지금은 물론 농사에서 속히 쓱싹이 저절로 이뤄지지 않음을 알기에 함부로 나서지 않는 겸손(?)한 농부가 되었지만 말이다.

기나긴 장마가 물러가나 싶었는데 태풍이 코앞이란다. 태풍이 지나가기 전 날을 잡아 피를 잡기로 했다. 그래서 지난 토요일 아침부터 시작했다. 태풍 영향권이라 그런지 습도가 엄청났다. 내리쬐는 해는 어찌나 뜨겁고 따가운지 몸이 저절로 벼 속으로 굽혀졌다. 그러다가도 온몸에 흘러내리는 땀과 허리춤에 담아둔 무거운 피가 한데 얽혀 두어 시간 하고 난 뒤에는 몸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논은 물이 발목까지 찼고, 벼는 내 허리까지 자랐고, 발은 물장화로 미끄럽고, 몸은 습도와 더위에 숨이 막히고, 낫질은 서서히 힘을 잃어가면서 더 이상 했다가는 쓰러질 지경이었다. 일할 마음을 잃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것은 피를 아무리 베고 베어도 줄어들지 않은 논의 모습이었다. 눈 내리는 겨울날 눈을 쓸고 뒤돌아보면 그 자리에 다시 눈이 소복이 내린 풍경처럼, 피를 베어낸 자리에도 누군가 와서 피를 다시 심어놓은 것 같았다. 통탄할 노릇이요, 의욕상실이었다. 넋다운 상태로 더 이상 못하겠다고 항복을 하고 낫을 집어던졌다. 그런 상태에서 점심으로 먹은 중국집 볶음밥은 어찌나 맛있던지 정말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리고 들어와서 엄청 늘어지게 씩씩거리며 단잠을 잤다.

그렇게 고생해도 표가 나지 않은 논의 피 작업을 다시 해야 했다. 아직은 씨가 맺히기 전이라 괜찮지만 조금만 지나면 씨가 되어 논에 떨어지면 내년에는 더 많은 피들로 고생을 하기 때문이다. 씨를 맺기 전 끝내야 하는 부담이 커서 며칠 전 월요일에 하기로 했다. 이번엔 병력이 늘었다. 나도 지난주에 고생하며 피를 자른 경험이 있었고, 고수 2명과 예비농부 1명이 협력하여 2시간 작업으로 쌈박하게 한 논을 처리했다. 정말 산뜻한 작업이었다. 이번엔 피의 윗자락을 자르지 않고 아랫자락을 아예 잘라버렸다. 이날은 하늘도 크게 도왔다. 바람이 시원했다. 습도가 없고 내리쬐는 해도 없었다. 일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그리고 네 명이 협동하니 지치지도 않았다. 서로 농담도 주고받는 여유도 있었다. 아하! 일이란 이렇게 해야지.

전도서가 저절로 떠올려졌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4:9) 농사 공동체에서는 이 말씀이 더 제격이다. 지금은 모든 것이 기계로 농사를 짓는 시대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가족농이나 소농의 경우는 사람의 손이 큰 힘이다.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수에게 맞설 수 있다.”(4:12)는 말씀 또한 잡초와의 전쟁에서도 큰 힘을 발휘한다. 공동의 힘은 농사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요즘처럼 예측불허로 번지는 코로나 확진 가운데 많은 이들이 곤경에 빠져 있다. 나 혼자 잘한다고 하여 확산이 멈춰지는 것이 아닌데 일부 몰지각한 이들의 언행으로 사회가 패닉 상태가 되었다. ‘함께 협력하여 선을 이루자’고 아무리 권면해도 괜찮다고 북 치고 장구 치는 자가 있는 한 이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혼자 열심히 베고 베어도 뒤돌아봤더니 피는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그러나 두 세 사람이 함께 힘을 모아 베었더니 오롯이 벼만 서 있는 모습을 기분 좋게 마주하였다. 이처럼 지금 이 순간 믿음의 사람들이 먼저 마음을 모아 우리 주위를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사람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마5:9)이라 하였는데 왜 우리는 세상에서 갈등과 분열을 만들어내는 사람들로, 뽑히고 베임을 당하는 피처럼 부끄러운 몫을 감당하게 되었을까?

아직 한 논이 남아있지만 이 논도 공동으로 협력하면 쉽게 끝날 것이라 기대한다. 태풍이 지나고 난 뒤 더 찬란한 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