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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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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8월 29일 (토) 14:51:18
최종편집 : 2020년 09월 14일 (월) 21:40:20 [조회수 : 1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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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중순 광주시에 교회에 관련된 코로나19 확진자가 많이 나오자 광주시장이 교회에 비대면 예배를 요구한 일이 있었다. 친구가 동영상을 보내왔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헌법에 명시된 신앙의 자유를 언급하면서 주일에 공무원들을 보내서 교회를 사찰하게 한다고 광주시장을 격앙된 목소리로 비난하고 있었다. 종교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나라가 되어 간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때 광주의 확진자가 10명을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숫자는 별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인구가 150만 명인 광주에서의 10명은 인구가 1천만에 가까운 서울과 인구비례로 계산하면, 서울에서 60명 이상의 확진자가 나온 것에 해당한다. 교인들 중에 확진자가 늘자 광주시장은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교회 예배를 비대면으로 바꾸라고 지시했었다.

교회가 집단 감염의 근원지가 된 상황에서 시장은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교회의 대면 예배를 금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여인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대면 예배가 계속된다면, 교회를 연결 고리로 해서 더 많은 확진자가 나올 것이라는 점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 여인은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사회적 책임은 외면했다.

여기서 자유와 책임이 충돌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배웠다. 그 말이 나온 것은 내가 택한 행동이 어떤 형태로든 남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자유가 이웃에게 혹은 사회 전체에 해를 끼칠 우려가 있을 때는 내 자유를 유보해야 한다. 따라서 자유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유만을 주장하고 책임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극도로 이기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이다.

일부 교인들은, 이 아주머니처럼, 헌법에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데, 왜 그 자유를 제한하려 드느냐고 항의한다. 물론 신앙의 자유는 헌법에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헌법 37조 2항에는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서 제한할 수 있으며”라고, 상황에 따라서는 국민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요즘 한창 화제거리가 된 전광훈 목사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 역시 자유를 주장하면서 책임을 외면하고 있다. 자기들이 방역 조치를 지키지 않아서 확진자가 무더기로 나온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고 정부가 그들을 탄압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내 탓’은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네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그들은 정부와 언론이 합작해서 자기들을 핍박한다는 가짜 뉴스를 만들어서 열심히 퍼 나르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러면 안 된다.
 
예수님이 이웃 사랑을 강조하신 것은 우리가 곧잘 이웃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고 자기의 자유만을 주장하기 때문이었다.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균형, 다시 말해서, 자유와 책임의 균형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었다. 보통 이웃 사랑은 자기 사랑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자기 사랑을 버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이웃 사랑을 강조하실 때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 황금률을 가르치실 때도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기 사랑을 전제하시고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균형을, 달리 말해서, 내 자유와 타인에 대한 책임의 균형을 취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가지 계명이 모두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사랑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에게 이웃 사랑도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이사야 1장에는 예배에만 몰두하면서 악을 행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책망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 당시에도 여전히 하나님 사랑에는 열심이었지만 이웃 사랑은 등한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예배에만 힘쓰고 행함을 소홀히 하는 유대인들에게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23) 한다고 가르치셨다. 코로나19 상황에 맞춘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바로 신앙의 자유와 이웃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인들 가운데에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신앙의 자유만을 내세우고 책임을 외면하는 사람이 많다.

방역지침을 잘 지켜온 교회에서는 방역지침을 지키지 않아서 확진자가 나오는 교회와 자기 교회에 대해서 동일한 조치를 취한다고 볼멘 소리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불평할 일이 아니다.여러 교회에서 확진자가 많이 나와서 교회가 사회에 큰 누를 끼친 데 대해서 공동 책임을 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한국 교회 전체가 하나의 믿음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요즘 개인적으로 혹은 단체 이름으로 교회에서 확진자가 많이 나와서 국민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해서 사과하는 사람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교회에서는 정부가 교회를 탄압한다고 불평하고 있다.

일전에 대통령이 교계의 대표들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대부분의 대표는 대통령의 요청에 협조하겠다고 답했지만, 한교총 회장은 요즘 교회가 피해를 입고 있다고 불만을 피력하면서 대면 예배를 허락해 달라고 말했다. 물론 예배가 중요하지만, 교회에서 확진자가 무더기로 나오는 마당에 대면 예배를 드리게 해달라는 제안은 종교의 자유만을 생각하고 그 자유가 사회에 미치는 고통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극히 이기적인 발상이다.

교계의 대표 누구에게도 비대면 예배가 반가울 리가 없다. 대통령도 그런 요청을 하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교계의 협조 없이는 코로나19를 진정시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교계의 대표들에게 협조를 부탁하게 된 것이다. 물론 역병이 안정세를 보이면 대면 예배로 돌아갈 수 있다.

당분간 불편을 참고 협조해 달라는 말인데, 그 회장은 영원히 비대면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처럼 말했다. 글쎄 모든 사람이 그 사람처럼 비협조적이라면 영원히 비대면 예배를 드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아집으로 인해서 분별력을 잃었다.

일부 교인들은 비대면 예배에 대한 조치가 자기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극성을 부릴 때 개신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 단체들의 모임을 금했고, 학교와 감염 위험이 높은 업소들도 폐쇄했다. 그리고 교회에 비대면 예배를 실시하라고 할 때, 학교에서도 비대면 수업을 실시했다. 교인들이 정부가 교회에게만 비대면 예배를 요구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어린애의 응석같이 들린다.

물론 비대면 예배나 비대면 수업이 대면할 때보다 비효과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그것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택한 차선책이다. 비대면은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이다. 우리는 이 비상시국에 다 함께 참고 견뎌야 한다. 교회 지도자들은 비대면 예배가 결코 교회를 탄압하려는 조치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교회라고 해서 코로나19 방역에서 예외 취급을 받을 수는 없다.

일부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코로마19로부터 국민을 구하려는 정부의 시책에 역행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자신의 자유만을 주장하면서 책임을 외면하는 것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유아적인 행태이다. 너도나도 경제적인 손해나 삶의 불편을 감수하고 정부의 시책에 협조하고 있는 지금, 교회가 협조하지 않고 신앙적 자유만을 계속 주장한다면, 교회의 신인도가 급격하게 떨어질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19가 수도권에서 창궐하고 그것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생활방역을 3단계로 격상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위급한 상황에서 부산의 270여 교회가 방역 당국의 지시를 무시하고 대면 예배를 드렸다. 보수적인 그들은 대면 예배를 드린 것을 마치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것처럼 자랑스러워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사회적 책임을 외면한 실망스러운 것이다.

그들은 비대면 예배를 요구하는 정부를 대결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정부는 그들의 적이 아니라 그들의 보호자이다. 그들은 예배가 그들의 ‘생명’이라고 말했는데, 정부에서는 교인들을 포함한 온 국민의 ‘생명’을 코로나19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비대면 예배를 지시했다. 방역 당국의 조치를 무시한 그들의 대면 예배는 신앙의 자유를 추구한 나머지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는 일이었다.

대면 예배가 자기들의 생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언뜻 열심 있는 그리고 모범적인 신앙인인 것같이 보이지만, 실상 그들의 신앙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반쪽 신앙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시면서 이웃 사랑에 역점을 두셨는데, 그들은 이웃 사랑을 외면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모두 사랑하는 것, 신앙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의 균형이다.

우리는 까뮈의 『페스트』에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신앙과 책임의 문제를 찾아볼 수 있다. 까뮈는 그의 작품에서 신앙적 신념에 몰두하던 파늘루 신부가 사회적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여준다. 그 신부는 오랑시에 페스트가 창궐해서 많은 사람이 죽어갈 때 페스트는 신앙 없는 인간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말하면서 환자들을 구하기 위해서 진력하는 의사 리외에게 협력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아가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때 묻지 않은 유아의 죽음을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파늘루 신부는 고뇌 끝에 결국 리외에게 협력한다. 그가 죽을 때 십자가를 품고 있었다고 설정함으로써, 까뮈는 이 신부의 희생적 이웃 사랑을 드러내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파늘루 신부는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균형을 유지했다.                             

페스트가 창궐하는 오랑시에서 살았던 파늘루 신부의 이야기는 지금 코로나19로 고통당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온 국민이 코로나19로 인해서 신음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도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이 강조하신 이웃 사랑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달리 말해서, 신앙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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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22.100.38.174)
2020-08-29 16:48:37
세상을 ‘외눈으로’ 바라보는 칼럼니스트에 대한 세상을 ‘오른 눈으로’ 바라보는 자의 반론
두서없이 글을 읽은 순서대로 반론을 제기합니다.

1. 예배의 자유와 생활의 자유 충돌에 관한 이야기. 마스크 쓴 채 방역지침 준수하며 예배 보는 사람의 자유와 마스크 쓴 채 콩나물시루 지하철-버스 타는 사람의 자유 중 전자보다는 후자가 질병 감염 위험성이 훨씬 더 높은데 어째서 마스크 쓴 채 방역지침 준수하면서 예배 보는 사람에게만 유독 과도하게 눈총을 줍니까?

커피숍, PC방 등에서 방역지침 준수하며 영업하다가 확진자가 나오면 문 닫습니다. 교회도 방역지침 준수하며 예배 보다가 확진자가 나오면 문 닫습니다. 이게 공평합니다. 유독 교회에만 과도하게 눈총을 주어야만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같은 조건의 민노총에게는 왜 관대합니까? 이래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 국가와 똑같은 짓을 한다는 소리를 듣는 겁니다. 종교라고 해서 특별대우 해 줄 필요도 없지만 또한 차별대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느 누가 자다가 봉창 두드리듯이 종교의 자유가 없다고 말한 것인지요?

2. 일개 아주머니의 헌법의 자유 주장과 대통령의 헌법 파괴행위에 관한 이야기. 저잣거리의 무식한(?) 한 아주머니가 헌법을 잘못 이해하는 짓거리와 헌법을 준수해야 할 의무가 있는 유식한(?) 대통령이 헌법을 形骸化시키고 있는 짓거리를 비교해 볼 때 변호사도 아닌 아주머니의 흘러가는 소리는 귀에 번쩍 들어오고 문 변호사의 작심하고 헌법을 무시하는 개소리는 귀에 번쩍 들어오지 않습니까? 왼 귀와 오른 귀를 동시에 열어 두면 그 아주머니의 하소연 또는 항변은 애교로 들릴 것입니다.

3. 전광훈의 일방적 주장과 전광훈의 항변에 대한 공평한 평가에 관한 이야기. 전광훈이가 마구 떠들며 ‘바이러스침략’이라고 떠벌리자 이를 자기 면피를 위한 무책임한 말이라고 하면서 나팔수 언론 등이 융단폭격을 가하고 있다. 다른이들은 왜 이 말만 가지고 덩달아서 정부 편에 합세하여 난리를 치는가? 전광훈이가 한 말 중에 마녀사냥하기 좋은 말만 딱 찍어서 난리치는 건 참으로 부끄러운 작태이다. 전광훈이가 ‘바이러스침략’이란 말과 더불어서 다음의 주장도 했음을 알라! 즉 “광화문집회에서 주로 나타나는 GH형 바이러스는 4~5월에 발생했는데 그 최초는 이태원 동성애자 그룹이었다. 또한 사랑제일교회發이라고 하려면 우선 질병DNA를 분석해야하는 데 그 결과가 나왔는가? 나왔다면 책임을 수긍하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마녀사냥 아니냐?”

4. 예수님이 ‘자기 신앙’을 포기하면서까지 ‘이웃 사랑’하라고 했는가? ‘이웃 사랑’ 행위가 아무리 重하기로서니 ‘자기 신앙’ 포기할 만큼 重할까? 이건 각자 가치관의 문제이다. 어느 누가 다른 누구에게 ‘이웃 사랑’을 위해 ‘자기 신앙’을 포기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이런 건 성철 대선사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하는 알쏭달쏭한 오묘한 영역이지 이게 정답이요라고 강요할 딱 부러진 영역이 아니다.

5. 사회적 책임을 요구한다면 마녀사냥은 포기해야! 마녀사냥까지 하면서 사회적 책임까지 요구하는 건 갑질이고 적반하장이다. 대면 예배 보는 사람이 질병에 걸렸다면 다른 이들(공무원, 상인, 군인...)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책임을 물으면 된다. 똑같이 질병에 걸렸는데 왜 대면예배 보는 사람만 갈구나? 대면예배를 보는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이 갑질하며 마녀사냥하고 싶으면 지들 마음대로 하면 된다. 광화문 사거리에 십자가 세워서 손가락질 하는 것 누가 말린 적 있었던가? 지금 하고 있는 짓거리가 부족한단 말인가? 그러면 더 심하게 마녀사냥 하라! 말릴 사람 아무도 없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교회發은 20~30% 정도라고 하는 데 나머지는 어디로 갔나?

6. 비대면예배가 불가능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하는가? 대안 없는 비대면예배 강요는 ‘종교탄압’은 아닐지언정 ‘종교무시’에는 해당된다. 교인 20명 정도 모이는 구멍가게교회는 방송장비 구입할 처지가 못 된다. 이에 대한 대안제시 없이 무턱 대놓고 예배 금지시키는 건 ‘종교탄압’은 아닐지언정 ‘종교무시’에는 해당된다. 비대면예배 볼 수 있는 대형교회에서 자기 방송장비를 다른 소형교회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취한다든지 하는 등 대안을 제시하고서 ‘비대면예배어천가’를 부르는 건 이해하겠으나 자기들 등 따습고 배부르다고 대면예배보는 데 대해 비하하고 이웃사랑을 모른다고 낄낄거리는 게 옳다고 보는가?

7. 정부의 시책 중에서 정부의 실책을 일부 종교에 전가하는 행태야 말로 가장 ‘큰 사회악’이다. 그기에 비하면 마스크 쓰고 방역지침 준수하면서 대면예배를 강행한 일부교회는 ‘조그만 사회악’이다. 그런데 ‘큰 사회악’이 ‘조그만 사회악’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니 말 빨이 서지 않는다. <정부의 마녀사냥>과 <일부교회의 마스크 쓰고 방역지침 준수하며 대면예배 보다가 무한폐렴 걸린 사회적 책임> 중 어느 쪽의 죄가 더 크다고 보는가? 어느 쪽의 사회적 책임이 더 크다고 보는가?

8. 신앙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의 균형과 카뮈의 페스트에 나오는 파늘르 신부의 헌신을 한 데 묶는 건 <<글쓴이의 자가당착적 논리비약>>이다. 판늘르 신부가 결국에는 의사에게 협조했다고 하여 신앙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의 균형을 잘 갖추었다고 하는데... 아니, 무한폐렴에 걸린 기독교인 중 완전 또라이 몇몇 빼놓고는 99.99% 기독교인은 의사에게 협조했다. 심지어 마녀사냥 당하고 있는 전광훈이도 의사에게 협조하고 있다. 전광훈이도 하나님치유 운운하다가 결국에는 의사에게 자기 몸을 의탁했는데 파늘르 신부와 전광훈이는 동격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왼 귀가 아닌 오른 귀로는 말이다. 남을 공격하는 데 급급하다가 의도하지 않게 남을 도와주는 자를 ‘X맨’이라고 하는 데... 결론은 전광훈을 칭찬하는 걸로 되어서 배꼽을 잡고 한바탕 웃고 말았다. 요즈음 장안의 화제가 된 시무 7조 상소를 폐하에게 올린 해학의 천재 조은산 식으로 해석하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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