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러시아 정교회 상황은 프랑스 혁명 이후 가톨릭의 예와 같았다. 18세기 러시아 국가 권력은 교회를 확실하게 제압했다.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번성했던 교회와 수도원은 경제력을 잃었다. 세속 권력을 누리지 못하게 됐으므로, 남은 성직자들은 침묵 속에서 신앙에 집중하고 종교 임무에만 충실하게 됐다. 그러자 18세기가 끝날 즈음 수도원 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꺼지다가 다시 살아난 촛불과 같았다. 이 시기 중요한 인물로 티혼과 파이시(Paisii Velichkovskii, 1722-1794)를 꼽는다.
티혼은 크리스찬이 품어야 할 점을 다섯 가지로 말했다. 1) 인생과 거리를 두는 자세를 가져라. 2) 지나갈 뿐인 명예를 자랑하지 말라. 3) 의기소침하지 말라 4) 비난과 중상을 감내해라. 5) 인생의 괴로움을 견뎌라. 이것들을 지키면 평화와 기쁨이 찾아온다. 이것만 봐도 티혼의 가르침이 실천적임을 알 수 있다.

파이시는 다른 길을 갔다. 그는 17살부터 정신적 지도자를 찾아 우크라이나를 헤맸다. 몰다비아로 옮겼으나 여전히 신앙 만족을 얻을 수 없었다. 1746년 성산(聖山) 아토스(Athos)로 갔다. 거기서 고독한 4년을 보내고 자신의 이름을 파이시로 바꿨다.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파이시는 정교회 신앙의 근본을 찾으려 했다. 택한 방법은 비잔틴 교회의 전승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어 원전들과 슬라브어로 번역된 자료를 모아서 꼼꼼하게 살폈다.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었다. 사본들은 원본에 충실하지 못했고, 원본 또한 없어져 구하기 힘들었다.
비잔틴 땅이었던 아토스는 당시 터키가 지배하고 있었다. 1763년 그는 제자들과 함께 몰다비아 수도원(Holy Spirit in Dragomirna)으로 갔다. 학교를 세우고 슬라브어 번역물들을 그리스어 원본과 대조하는 일을 계속했다. 생을 마칠 무렵 작업한 번역물들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그의 노력과 헌신에 힘 입어 러시아 정교회는 비잔틴의 신앙을 복원할 수 있었고, ‘러시아 정교회 신앙은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규칙이 세워졌다.

그가 교부들의 글을 꼼꼼하게 번역한 것들 중에 필로칼리아(Philokalia, Loving the Beautiful)가 있다. 필로칼리아는 4세기부터 15세기까지 살았던 영적 지도자의 글들을 아토스의 수도사 니코디모스와 마카리오스가 수집한 모음집이다. 정교회에서는 이것을 지금도 성직자 교재로 사용한다. 이 책은 금욕생활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내면의 기도’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어로 ‘침묵하다’가 ‘헤쉬카조’(hesychazo)다. 14세기 아토스에서 침묵하며 쉼 없이 기도한 수도사를 ‘헤시카스트’(hesychast)라고 불렀다. 이들이 기도해서 얻은 고요, 평화, 집중의 상태를 ‘헤시키아’(hesychia)라고 한다. 필로칼리아로 내려오는 전통을 헤시카즘(Hesychasm)이라고 부르는데, 이 헤시카즘이 정교회 신앙의 뿌리이고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필로칼리아가 아토스에서 편집되고 베니스에서 처음 출판할 때가 1782년이니, 러시아 정교회는 처음부터 훌륭한 슬라브어 번역본(Dobrotolubiye, 1793년)을 갖게 됐다. 파이시와 그의 제자들 노력 덕분이다. 필로칼리아는 현재 세 번째 판본이 나왔는데 모두 다섯 권으로 되어 있다.
18세기 교회와 수도원이 쇠퇴하던 때, 다시 살아난 신앙의 불씨가 바로 필로칼리아에 담긴 헤시카즘이다. 헤시카즘은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는 물론, 19세기 러시아인의 문학과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국에 꽤 재미있는 가수가 있다. 유튜브에 들어가면 볼 수 있다. 이름은 탤봇(John Michael Talbot, 1954- )인데 감리교 가정에서 자랐다. 젊은 날부터 노래를 잘해 가수가 됐지만 정신적 방황이 심했다. 그러다가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에게 끌려, 인디애나 주 프란시스코 센터에 들어가 신학공부를 했다. 혼인도 했다. 그는 아칸소와 휴스톤에 수도원을 세웠고, 지금도 책을 쓰며 노래한다.
탤봇은 정교회의 헤시카즘에 관심이 많다. 이런 말을 했다. “헤시키아는 수영장 물가에서 쓰레기통을 가라앉히는 것과 같다. 맑고 고요하면 밑바닥까지 볼 것이다. 선과 악을 모두 볼 것이다.”

헤시카즘은 성사(聖事, Sacrament), 전례(典禮, liturgy)와 불가분리다. 성사와 전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는 헤시키아에 이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하나님이 성육신한 몸이기 때문에, 성찬에 참여하지 않고 하나님과 일체가 될 수 없다. 헤시카즘을 실천하려면 성사에 참여해야 하고, 영적 지도자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필로칼리아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매일 죽음과 심판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기억하면서, 쉬지 않고 기도 드리는 것이다. 필로칼리아의 일관된 틀은 예수가 한 기도다. 예수의 기도를 바탕으로 ‘내면의 기도’를 배우도록 인도한다.
예수의 기도란, 예를 들면 요한복음 16장 23b-24절과 같은 것이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예수의 기도를 따라 드리는 ‘내면의 기도’는 소박하다. 숨을 들여 마시면서 이렇게 기도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Lord Jesus Christ Son of God). 그리고 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마무리한다.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Have mercy on me a sinner) 이 기도를 숨 쉴 때마다 반복한다. 성 클리마쿠스(St. John Climacus, 6-7세기)는 말했다. “숨을 쉴 때마다 예수를 기억하라. 그러면 헤시키아의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이 기도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요한이라는 사람이 필리몬(Philimon, 600년경)에게 와서 물었다. “구원을 받으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생각은 흔들리고 잘못된 일에 끌립니다.”
필리몬이 대답했다. “잠시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 보라. 그러면 모든 생각들이 물러날 것이다.”
요한은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마음을 들여다 보라니요?”
필리몬이 대답했다. “너의 마음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으라. 그리하면서 경외와 두려움을 갖고, 마음을 다해 이렇게 말해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
13-14세기, 여기에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가 붙어서 기도가 완성됐다.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보물이 감추어져 있다. 보물은 하나님이 주신 ‘영생에 대한 한량없는 기쁨’이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보물이다. 하지만 그것은 닫힌 내면에 숨어 있다. 닫힌 것을 깨고 내 속에 숨은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찾아 떠나는 것 – 이것이 헤시카즘이다. 곧 성령을 받기 위해 가르침을 받고 훈련해서, 마침내 내 영이 ‘성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숨과 함께 예수 기도를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 속에 있는 의식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힘쓰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느끼려고 힘쓰면, 깨달음에 이른다. 그것은 사람들과 물건들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느껴야 내 ‘성화’가 이루어진다는 깨달음이다.
오래 전 ‘영성 세미나’에서 순례자의 길(The way of a pilgrim)을 읽은 적이 있다. 책의 배경은 헤시카즘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말씀을 실천하는 순례자의 내면 여행을 다룬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Pilgrim progress)과 줄거리가 비슷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책을 읽고, 헤시카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교회사에서, 아일랜드의 기독교 전파는 극적이다. 아일랜드 선교는 패트릭(St. Patrick, 387-461)에서 비롯됐다. 패트릭의 극적이고 열성적인 선교는 수도원으로 열매를 맺었다. 온 아일랜드 땅에 수도원이 세워졌다. 구전에만 의존하던 아일랜드 사람들은 패트릭의 가르침으로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됐다. 한 세대도 되지 않아서,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성서 원전을 읽게 됐다. 그리고 인쇄술이 없었던 당시, 그들은 모든 책들을 손으로 필사했다. 그때는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몰랐다.
서유럽 기독교 국가는 계속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다. 특히 바이킹이 휩쓸던 8세기-11세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고 믿을 정도였다. 서유럽의 도서관은 모두 타버렸다. 이때부터 아일랜드 수도원의 책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 수도원에 남아 있는 필사본이 없었더라면, 기독교 전래 1000년 이전에 쓴 유럽의 모든 책은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유럽의 문화는 기독교 문화다. 그 유럽 문화가 아일랜드 수도원 때문에 이어질 수 있었다. 아일랜드 수도사들의 기록이 유럽 역사에서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파이시가 수도원을 세우고, 제자들과 비잔틴 원본을 슬라브어로 번역하고 꼼꼼히 고친 것은, 말하자면 아일랜드 수도원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감리교의 한국 전래는 1884년이다. 백 년이 훨씬 넘었다. 21세기에 들어선 문턱에 연회를 방문했다. 미연합감리교회로 이적하려면 대한기독교감리회의 증명이 필요했다. 연회 총무는 내 기록이 없다고 했다. 난처함도 이런 난처함이 없었다. 총무는 내가 직접 한글과 영문으로 써오면 도장을 찍고 서명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미연합감리교회의 지방회 사무실을 드나들면서 본 것이 있다. 지방회 비서는 평신도 중 지방 교회들을 잘 아는 사람이 한다. 그가 하는 일 중 중요한 것이 있다. 지방회에 있는 교회자료, 목회자 인사철, 편지 등 모든 서류를 일년에 한번씩 연회로 가져가는 것이다.
연회에 가면 일 층 귀퉁이에 큰 방이 있다. 거기는 대개 은퇴한 목사나 평신도 두 명이 일한다. 지방회 비서가 서류를 주면 원본을 보관하고, 똑같이 사본을 만들어 돌려준다. 한번이라도 연회에 몸담은 성직자와 평신도 기록, 교회 기록은 그렇게 쌓여 보존된다.

유교를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조선은 지독하도록 기록을 남겼다. 이조가 오백 년 세월을 끌고 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기록이었다. 오죽하면 이탈리아 박물관에서 기록보존을 위해 한지(韓紙)를 택했겠는가. 우리 조상이 그랬다.
기록이 있어야 역사가 있고, 정확한 역사가 있어야 자긍심이 생긴다. 누가 알겠는가? 한국 감리교회의 꼼꼼한 기록이, 18세기 러시아 정교회처럼 사라질 위기에 처했을 때 신앙회복 운동의 불씨가 될지. 신앙 열정도 좋지만, 기록을 중요하게 여기는 습관을 한국 감리교에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