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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역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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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8월 12일 (수) 13:55:28
최종편집 : 2020년 09월 14일 (월) 21:39:33 [조회수 : 1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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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직한 지 15년이나 지나고 보니 할 일이 없다.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어쩌다 걸려 오는 전화가 아주 반갑다. 더구나 코로나19로 인해서 대면 접촉을 삼가라고 하니까 교회에서는 성가대도 서지 않고 식사도 하지 않고,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교회를 빠져 나온다. 그리고 고위험군에 속하니 조심하라는 아들 딸과 집사람의 성화에 못 이겨 가끔 만나서 점심을 함께 하던 친구들과 만난 지도 한참 되었다.

할 일이 없다 보니 요즘은 하루가 너무 길다. 살 맛이 나지 않고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곧 우울증에 걸릴 것만 같다. 젊었을 때는 일에 시달리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혹은 찬송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천국이야 말로 낙원이겠다고 생각해 본 일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 와서는 할 일이 없는 삶이란 무의미한 것임을 절감한다. 천국이 정말 그런 곳이라면 그런 무료한 곳을 낙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요즘은 ‘kill time’을 위해서 친구들과 카카오톡으로 동영상이나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주된 내용은 정치권이나 교회에 대한 잡담, 건강 유지법, 흘러간 옛 노래, 노년의 삶에 대한 이야기 등이다. 일전에 한 친구가 글을 하나 보내왔는데, 제목이 “세상 낙원은 어디일까?”였다. ‘고통의 역설’을 이야기하는 이 글에 공감하는 바가 있어서 그 글을 밥하는 것이 지겹다고 투정하는 아내와 몇몇 지인에게 보냈다.

미국의 애리조나주에 억만장자들이 은퇴 후에 모여서 사는 ‘썬 밸리’(Sun Valley)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모든 것이 현대화된 시설로 호화로운 곳일 뿐 아니라 일반 평범한 동네에서 흔히 들리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 데서나 볼썽사납게 애정 표현을 하는 젊은 커플도 없지요.

갖가지 음식 냄새를 풍기는 노점상도 없고, 길거리 벤치에 누워서 자는 노숙자도 물론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자동차도 노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시속 25킬로미터 이하의 속도로 달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치매 발병률이 훨씬 더 높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니 놀랍지요? 이런 의외의 사실에 우리나라 이시형 박사가 그 이유를 조사하고자 그곳에 가보니 정말 지상낙원이 따로 없었답니다.

모든 편의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고 최신 의료시설에 최고의 실력을 지닌 의사들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연구결과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치매에 걸리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첫째, 일상적으로 겪는 ‘스트레스’가 없고, 둘째, 생활고에 대한 ‘걱정’이 없으며, 셋째, 생활에 ‘변화‘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있던 많은 사람이 자신이 원래 살던 시끄러운 마을로 돌아가더라는 것입니다.

행복한 삶은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사는 것보다 오히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것을 해결해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지요. “낙원”은 다름 아닌 바로 내가 고민하고 걱정하면서 아웅다웅 다투고 화내기도 하면서 어울려 사는 가정 또는 지금 살아가는 바로 이곳입니다.


이 글을 읽고 내 아내는 무응답이었지만, 여러 사람이 동감한다는 답을 보내왔다. 우리 교회 담임목사는 “장로님 좋은 글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 피해는 없는지요?”라는 카톡을 보내왔다. 이 답은 의례적인 것으로 보였다. 비 피해를 언급한 데서 그런 느낌이 더 들었다. 이제 갓 50이 된 사람이 할 일 없이 지내는 노인들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전자통신 연구소에 다니는 안수집사 유 박사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로 시작해서 길게 썼다. “예전에 산호세에 오래 살다가 한국으로 오신 원로 한 분 이야기와 비슷하네요. 처음엔 캘리포니아 날씨가 아주 좋았는데, 여러 해가 지나도 변화가 없자 갑자기 지겨워지면서 살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뚜렷한 4계절, 지방마다 다른 음식과 풍토가 좋아서 아예 영구귀국했답니다.” 현직에서 시달리고 있는 유 박사가 노인들의 무료한 삶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책을 많이 읽는 그에게는 이해하려는 마음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공군사관학교에서 전역한 지 한참 되는 안수집사 이 교수는 “예! 백 번 동감합니다.”라고 간단하게 답했다. 근심 걱정에 시달리던 때가 더 살맛이 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상학을 전공한 천주교인 곽 교수도 간단하게 “낙원은 바로 now and here∼!! ㅎㅎ.”라고 동감을 표시해 왔다. 그런데 ‘ㅎㅎ’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답이 교회의 가르침과는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 아닐까.

그리고 교육학을 가르치던 80대 중반의 집사 김 교수는 “감사합니다. 좋은 글 정말 나에게 필요한 말입니다. 조용히 집에만 있으니 치매 걸리기 딱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야간대학을 졸업하고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미국에 가서 일하면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이렇게 열심히 산 김 교수가 퇴직한 후에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우울증약을 복용하고 있다.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편하게 사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교회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쫓겨나서 땀 흘려 일하고 고통을 겪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내가 보낸 글에 응답한 그리스도인들은 수고와 고통이 없는 곳은 낙원이 아니라고 ‘고통의 역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수고와 고통이 있는 삶은 벌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시련이 없었다는 것은 축복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미국의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우의 역설적인 말이 생각난다.

영국의 그리스도교 작가 그레이엄 그린(1904-1991) 역시 그의 대표작 『권능과 영광』(The Power and the Glory)에서 평화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피하고 싶어 하는 고통스러운 삶에는 나태한 정신을 일깨우는 역설적 면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고통의 역설’이다.

『권능과 영광』의 주인공은 본명 대신 위스키 신부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그는 지난 10여 년 동안 정권을 장악한 공산주의자들이 교회를 박해하면서 신부들을 잡아 처형하는 멕시코의 타바스코주에서 도피 생활을 해왔다. 그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와 피로를 잊기 위해서 과음을 하다 보니 위스키 신부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위스키 신부의 삶에서 주목할 것은 그가 생사를 넘나드는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점차로 변해간다는 점이다. 날마다 쫓기면서 먹지 못하고 쉬지도 못했기 때문에, 박해 이전의 평화로운 시절에 통통하게 살쪄 있던 그의 얼굴이 이제는 옛날의 사진을 가지고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심히 야위었다. 이러한 그의 외모의 변화는 정신적 변화를 말해준다.

작품의 서두에서 이 주인공는 타락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이 허물 많은 신부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려고 목숨까지도 바치는, 성인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임이 드러난다.

위스키 신부는 박해받는 동안에 겪는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전에 알지 못했던 역설적 진리를 깨달아간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쫓기는 동안 그는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교회의 여러 가지 규례를 지키지 못하고 미사를 정례적으로 드리지도 못한다. 절제하지 못해서 위스키 신부라는 별명을 얻는가 하면 육욕의 죄까지 짓게 되자 그는 다른 사제들처럼 자신도 도피하는 것이 좋았을 뻔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혼자 남은 자신마저 떠난다면, 그곳은 버림받은 땅이 되기 때문에, 그는 온갖 고초를 견디면서 하나님의 대행자로서의 자기 사명을 감당하려고 노력한다.

이 신부는 그의 딸 브리기타를 만나서 뜻밖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라는 ‘죄의 역설’을 깨닫게 된다. 박해자들이 그를 잡기 위해서 각 마을에서 인질을 잡아가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그를 환영하지 않기 때문에, 갈 곳이 없게 된 그는 7년여 동안 피해온 딸이 사는 마을에 간다. 그 대죄의 현장에는 그를 환영할 사람이 최소한 하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기서 딸을 만난 위스키 신부는 세상에 나올 때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자란 딸이 비뚤어진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한다.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딸을 보면서 그것은 바로 자신이 아버지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느낀다. 그는 지금이라도 딸을 보호해주고 올바로 가르치고 싶지만, 날마다 박해자들에게 쫓기는 그로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딸을 버려두고 그 마을을 떠날 때 사람들은 군인들이 없는 남쪽으로 가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반대로 위험한 북쪽으로 간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헌신을 참작하셔서 그의 딸을 돌보아 주시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그는 죽는 날까지 한시도 딸을 잊지 못한다. 그는 죄의 열매인 딸을 이렇게 사랑하면서 죄 가운데서 사랑이 꽃필 수 있다는 ‘죄의 역설’을 깨닫는다. 이 ‘죄의 역설’은 생사를 넘나드는 고난을 겪으면서 터득한 것이라는 면에서 ‘고통의 역설’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반복적으로 평화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고통의 긍정적 의미가 강조된다. 위스키 신부는 그의 딸 브리기타가 사는 마을에서 미사를 드리면서 고통을 피하려 하지 말라고 강론한다. 고통이 있는 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고통을 싫어하면 안 된다고 ‘고통의 역설’을 설파한다.

그를 고발하려는 혼혈인과 함께 숲속의 오두막에서 쉴 때, 그는 콘셉션 교구에서 그가 읽었던 만찬회 연설문을 꺼내 보면서 고통을 몰랐던 그 평화로운 시절에 그가 야심과 자존심과 권위의식으로 가득 찬 사제였다는 것을, 자기만을 사랑할 뿐 성도들을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이었다는 것을 반성하면서, 자기는 아무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고 회개의 기도를 한다.

그리고 박해의 땅 타바스코주를 벗어나서 박해가 없는 취아파스주로 넘어왔을 때는, 평화로운 그곳에서 권위의식과 자만심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면서 고통의 땅에 오히려 바람직한 면이 있다고 ‘고통의 역설’을 재확인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위스키 신부는 평화의 땅 라스카사스로 향하여 출발한다. 그런데 바로 그때 죽어가면서 고백하기를 원하는 은행강도가 그를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 강도의 고백을 듣기 위해서 폭력의 땅 타바스코로 돌아갈 것인가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 평화의 땅으로 갈 것인가 망설인다.

위스키 신부는 타바스코로 돌아가면 그를 잡으려는 경위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평화의 땅으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강도의 곁으로 가기로 마음먹자 그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무엇보다도 이상한 것은 그가 아주 유쾌한 기분을 느낀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러한 평화를 실제로 믿지 않았다. 저편에 있을 때 자주 평화를 꿈꾸었는데 이제 그것은 꿈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강도의 곁으로 갔다가 결국 체포되어서 처형당한다.

그가 평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고통의 땅 타바스코로 돌아가는 것은 ‘고통의 역설’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을 피하려고 하지만, 실상 고통에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교회에서는 우리가 우리가 피하고 싶어하는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고 ‘고통의 역설’을 강조한다. 잠언에서는 “거만한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으리라”(19:25)고 말하고 있다. 의인 욥은 그가 원치 않았던 모진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변증자 C. 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고 이야기했다.

『생의 비극적 인식』에서 현대인의 신앙을 다룬 스페인의 사상가 미겔 데 우나무노 역시 ‘고통의 역설’을 이야기했다. 그는 “계속 평화를 누리며 사는 것보다는 고통 가운데서 사는 것이 낫다”라고 말했다. 그의 낙원은 우리가 영원한 평화 속에서 잠자는 곳이 아니라, 땀 흘려 일하면서 돌보아야 하는 곳이었다.

서양의 속담에 ‘고통을 통해서 지혜를 얻는다.’(Wisdom comes from suffering.)는 말이 있다. 우리 속담에는 ‘젊을 때의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귀한 자식 매 한 대 더 때리고 미운 자식 떡 한 개 더 준다.’라는 말도 있다.

우리는 흔히 고통 없는 낙원을 갈망하지만, 신 불신을 가릴 것 없이 그리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혜자들은 ‘고통의 역설’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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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토담 (39.7.46.129)
2020-08-12 14:20:49
여기 지금 세상 = 1G.

2G ~ 12G = 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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