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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가 튼튼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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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7월 26일 (일) 13:19:48 [조회수 : 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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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가 튼튼하면
딤후2:14-19
(2020/07/26, 성령강림 후 제8주)
음성으로 듣기

   
 

 [신도들에게 이것을 일깨우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그들에게 엄숙히 명해서 말다툼을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것은 아무 유익이 없고, 듣는 사람들을 파멸에 이르게 할 뿐입니다. 그대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부끄러울 것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힘쓰십시오. 속된 잡담을 피하십시오. 그것이 사람을 더욱더 경건하지 아니함에 빠지게 합니다. 그들의 말은 암처럼 퍼져 나갈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에서 멀리 떠나버렸고, 부활은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의 믿음을 뒤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초는 이미 튼튼히 서 있고, 거기에는 "주님께서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을 아신다"는 말씀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다 불의에서 떠나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불확실성이 증대된 세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소서 대서를 지나 중복에 이르렀습니다. 어제 오늘 서울 하늘이 아름다웠습니다. 많은 이들이 예쁜 노을 사진과 청명한 도시 풍경을 찍어 SNS에 올렸더군요. 아름다움과 맑음에 대한 갈망이 깊습니다. 현실 속에서도 이런 시원함을 맛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그런 사치를 허락받지 못한 채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그 실체를 가늠하기 어려워 우리는 난감해 하고 있습니다.

지속적인 발전 신화는 이미 무너졌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미래를 전망하기 어려운 젊은이들 가운데는 지금 누릴 것을 다 누리며 살자는 욜로(you only live once) 족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미래를 위해 오늘을 유보하며 살지는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건강한 듯하지만 왠지 슬픈 느낌이 듭니다.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모든 견고한 것들이 녹아내리고, 모든 가치가 상대화되고, 모호성과 불안이 증대된 오늘의 현실을 가리켜 ‘액체 근대’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뭔가 손에 딱 잡히는 게 없는 유동하는 현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삶이 난감할 때, 바라보거나 귀를 기울일 큰 정신이 없는 세대이기에 삶은 납작해지고 말았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마음이 답답할 때, 절망감이 밀려올 때 찾아갈 대상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의 있음 자체가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사람,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지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존경할 사람이 없다는 것처럼 우리 삶을 빈곤하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꽤 많은 이들이 삶의 답답함을 호소합니다. 바르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덕, 지혜, 사랑, 용기, 공감이라는 전통적 가치가 더 이상 설 땅이 없는 것처럼 보이니 왜 안 그렇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암담함은 우리 시대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기초가 바닥부터 흔들리는 이 마당에 의인인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시11:3) 이 구절을 대할 때마다 사람살이의 고단함이 절로 느껴집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는 사막을 가로지르다가 우연히 만난 꽃잎이 셋인 꽃에게 사람들이 어디 있냐고 묻습니다. 꽃은 몇 해 전에 사람을 본 적은 있지만, 그들을 어디 가야 만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람 따라 돌아다니니까. 사람들은 뿌리가 없어. 그래서 많은 불편을 느끼는 거야.” 정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뿌리가 없기 때문일까요? 삶이 가벼운만큼 사람들의 말도 가볍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인간은 언어 안에 거주한다
홍수에 마실 물 없다는 말처럼, 이 시대의 슬픔은 참 말을 듣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요즘은 누구나 다 자기 표현을 하며 삽니다. SNS를 통해 자기 생각을 드러내고, 소소한 일상을 전하기도 합니다. 인터넷 세상은 세상의 거리를 지울 뿐만 아니라, 서로 만나기 어려웠던 이들이 소통하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폐단도 있습니다. SNS에 글을 남기는 이들이나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는 이들은 다른 이들의 반응에 민감합니다. ‘좋아요’와 ‘댓글’ 숫자에 집착합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자극적인 말을 쏟아내기도 합니다. 조롱, 비난, 냉소, 편향된 말들이 넘칩니다.

마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Ort)‘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언어 안에 거주한다(wohnen)고도 말합니다.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어가 우리를 부리기도 합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칩니다. 기독교 전통은 예수님을 육신을 입은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은 매우 심오한 신학적 사고를 내포하고 있지만, 우리의 일상에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말로 세상을 짓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말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기분 좋은 말도 있고, 기분 나쁜 말도 있습니다. 넘어지게 하는 말도 있고, 일으켜 세우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말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가짜 뉴스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유포하면서 자기 이익을 챙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우리 영혼은 고요함을 잃고 거칠어집니다. 비루하고 야비한 말은 자극적이어서 우리 마음을 뒤흔들어 판단을 흐리게 만듭니다. 말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역사는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한 가지 사안을 놓고도 사람들의 견해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입니다. 서 있는 자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싸우는 동안 사랑은 식고, 참은 멀어집니다. 정약용 선생의 시가 떠오릅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네 小山蔽大山
멀고 가까움의 지세가 다른 탓이지 遠近地不同"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일이 많습니다. 작은 산 바로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눈에 큰 산은 들어오지 않습니다.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은 어리석습니다. 일단 그들은 배우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97%가 일치해도 3%의 차이 때문에 죽일 듯이 싸우곤 합니다. 초대교회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로 인해 흔들렸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그 가르침을 곡해하고 오도하는 이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부활은 이미 지나간 때의 일이라고 말하며 쾌락과 방종을 부추기는 이들도 있었고, 십자가의 복음이 아닌 영광의 환상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거룩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속된 잡담으로 바꿔버리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릇된 말이 그릇된 현실을 낳는 법입니다. 후메내오와 빌레도는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초
시절이 수상할수록 하나님이 세우신 기초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초는 굳게 서 있습니다. 구약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상의 기초가 ‘정의’와 ‘공의’라고 말합니다. 그게 무너지면 우리 삶이 허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이 말하는 기초는 이사야 28장 16절이 말하는 ‘시온에 놓인 주춧돌’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믿는 이들에게 그리스도 말고 다른 기초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그 기초에 두 가지 메시지가 적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주님께서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을 아신다"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다 불의에서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주님은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10:1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콩팥과 심장을 살피시는 주님은 우리를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어떤 정보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야다’(yada)는 ‘체험으로 깨닫다‘, ‘마음을 쓰고 보살피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다는 것,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아신다는 말은 우리를 보살피고 지키신다는 약속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주님께 ‘알려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믿는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작품’(poiema)이라고 말했습니다(엡2:10). 우리가 함부로 살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공들여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왜 이 모양이냐고 투덜거리실 분도 계시겠습니다. 남들과 자꾸 비교하지 마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내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려 하십니다.

주님을 참으로 믿는 이들은 불의에서 떠나야 합니다. 세상에 적응하며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해도 우리의 신앙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한사코 거부해야 합니다. 그런 행동이 불이익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그 불이익을 받아들일 때 우리 영혼의 뿌리는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짓는 삶의 이야기
에밀리 에스파니 스미스(Emily Esfahani Smith)라는 분의 ‘삶에는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라는 제목의 TED 강연을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그는 우리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네 개의 기둥이 있다고 말합니다. 간단하게 말해보겠습니다. 첫째는 유대감입니다.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과의 든든한 유대가 우리를 살게 합니다. 둘째는 목적에 대한 자각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려 할 때 우리 삶이 든든해진다고 말합니다. 셋째는 초월성입니다. 현실 너머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예배에 참여하고 글을 쓰는 행위는 바로 그런 능력을 우리에게 부여해줍니다. 넷째는 스토리 텔링입니다. 인간은 이야기를 만드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삶의 저자입니다. 누구도 우리 인생 책을 대신 써줄 수 없습니다. 가끔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이야기를 수정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실패와 쓰라림, 부끄러웠던 기억 속에 머물 수도 있지만, 그것을 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 경험들을 사회적 자산으로 만드는 이들도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일이고, 존재의 용기입니다.

에밀리는 강연 말미에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수피교도였던 아버지는 늘 가족들과 더불어 명상하는 시간을 참 좋아했고, 성실한 시민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심근 경색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수술에 앞서 마취실에 들어간 그는 잠들기 전에 숫자를 헤아리기보다는 자기 아들과 딸의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습니다. 깨어나지 못하고 죽는다 해도 자기의 마지막 말은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이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말 살고 싶어 했습니다. 자기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에밀리가 말하는 ‘네 기둥’ 즉 유대감, 목적, 초월성, 스토리텔링이 다 담겨 있습니다.

이 네 기둥을 굳게 붙잡아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다‘는 근본적 사실입니다. 그 확신이 있을 때 비로소 불의를 떠난 삶이 가능해집니다. 삶이 곤고해도, 세상이 여전히 혼탁해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시대를 지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계신 교우들을 보면서 마음이 참 아픕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새로운 생명들이 태어나고, 새로운 일들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고단하지만 삶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최악의 순간을 최고의 순간으로 바꾸는 것이 믿음입니다. 쾌활함과 친절함으로 무장하고, 지향을 분명히 하고 뚜벅뚜벅 걸어가십시오. 오늘과 내일, 우리 입에서 나가는 말이 갈라진 사람들의 마음을 이어주고, 낙심한 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냉랭한 세상에 사랑의 온기를 퍼뜨리는 말이 되기를 빕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한 주간도 믿음 가운데 기뻐하며 사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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