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오늘의칼럼
풀을 이기지 못하나니...
황은경  |  hallofreund@naver.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20년 07월 20일 (월) 19:23:49 [조회수 : 3802]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장마철이다. 띄엄띄엄 내리는 비이지만 한 번 내렸다하면 폭포수를 이루니 집 주위가 온통 물로 흥건하다. 그러다보니 땅을 밟을 때마다 물을 머금은 흙은 힘없이 패이기 일쑤다. 더군다나 집 자체도 흙집이라 여름날 시원한 맛은 있지만, 습기는 잡지 못하여 이런 날씨에는 제습기를 종일 틀어놔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요즘 같아서는 하루 3시간 정도 연속 틀어 놓으면 2~3리터 정도의 물은 거뜬히 받아 낼 수 있다. 이러니 집 자체가 물먹은 하마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잠을 충분히 자도 개운치 않다.

장마철에는 개인적으로 밭에 가는 일이 없다. 진짜 농부라면 비가 오기 전 밭의 상태를 살펴본다. 배수가 잘 되는지, 꺽여진 작물은 없는지, 풀 자람새는 어떠한지 꼼꼼히 들여다본다. 그러나 나처럼 설렁설렁한 농부는 이때다 싶다. 밭은 밭대로 놀고, 나는 나대로 논다. 지난 주 오래간만에 친구집에 다녀왔는데, 친구가 나에게 농사를 얼마나 짓느냐고 물었다. 천여평 정도 짓는다고 하니 까무라친다. 그렇지! 천여평이 누구네 집 개이름도 아니고 게다가 누구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나 혼자 지으니 놀랄만도 하다. 친구는 연신 함께 농사짓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고, 그걸 어떻게 혼자 하느냐고 했지만 나같은 농부라면 간단하다. 뭐, 풀하고 같이 살면 되지!

장마가 들기 전 관행농을 하는 농부는 밭 언저리와 고랑에 연신 약을 뿌린다. 풀이 비를 맞고 자라지 못하도록 미리 처방을 해놓는 것이다. 비가 그치고 해가 쨍쨍하면 밭의 풀들은 모두 노랗게 말라간다. 제초제를 이길 풀은 없는 것이다. 많은 농가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뭐라 할 수 없는 것은 오랫동안의 농사 습관이고, 대부분이 혼자나 가족 특히 부부가 짓는 경우가 많으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땅들을 찾아다니며 풀을 베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 풀을 제 때 잡지 못하면 영양분이 풀에게로 가버려 정작 내가 수확하고자 하는 작물이 적어진다. 여러모로 생각한 것이 한방에 처리하는 방법이다. 내가 먹는 것이든 아니면 파는 것이든 간에 비 오기 전이면 온 동네에 약 냄새가 코를 찌른다. 자연의 생명체들이 견지지 못할 만도 하다. 우스갯소리이지만 마을에 귀촌한 어떤 집은 본인이 지은 작물은 안 먹는다고 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약을 많이 쳐서 본인조차도 먹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번은 이웃에 사는 이장님과 얘기를 나누는 중에 요즘 농업교육에서는 친환경보다 농약을 적당히 뿌려줘야 사람에게도 작물에게도 좋다는 식으로 교육을 한다는데 진짜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어 그저 웃으며 개탄만 했다. 그것이 진짜라면 정신 나간 공무원이리라. 그러나 아닐 것이라 믿는다.

그에 반해 나는 밭에 휴가를 선포한다. 물론 나도 밭 정리를 한다. 비가 오기 전 미리 낫으로 풀을 베어 놓는다. 미친 듯이 하고 난 뒤 뒤를 돌아보면 얼마나 뿌듯한지 그 다음에는 농사를 더욱 잘 지을 것 같은 망상에 사로잡힌다. 미친 듯이 덤빈 일이었기에 그 다음날이면 몸살을 앓고 드러눕는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일을 치르는 것이다. 하지 않은만 못한 상태인 것이다. 사실상 농사는 나처럼 미친 듯이 단번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아직까지, 8년이 되었으면서도 철이 안 들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느린 일이 농사라고 할 수 있다. 공장의 일은 주문받은 양을 정확하게 시간을 분배하여 처리하면 제 시간 안에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농사는 1년이란 시간 속에 천천히 진행되는 것이다. 한동안 슬로우푸드 붐이 일었는데 농사가 딱 그런 일이다. 천천히 천천히 해야 그 맛을 알 수 있는 신비한 일이다. 12개월 동안 꽉 찬 일, 그러나 12개월 동안 하나도 겹치지 않는 일이다. 물론 심고 관리하고 수확하는 면에서는 겹칠 수 있다고 하지만 사계절 그리고 24절기에 맞춰 일하는 것은 어느 것 하나 내 계획과 내 편의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농사는 나보다는 하늘의 이치가 먼저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서두른다고 해서 내일 아침에 내가 원하는 작물이 완성되어 나오지 않는다. 대부분의 작물은 기본적으로 100일 이상이 넘어야 사람이 먹기에 족한 음식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농사가 힘든 것이다. 누군가 다른 일들은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에 이를 수 있지만 농사는 시행착오가 1년에 겨우 한 번 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완성에 이르는 일은 드물다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난 8년을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여전히 1년차 농부의 자리에 서 있다. 그러니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여하튼 친구에게 말한 것처럼 난 풀과 함께 산다. 올해는 또 트랙터가 중간에 말썽을 부려 반강제적으로 휴경으로 돌입했다. 공동으로 구입하여 공동으로 사용하는 농기계였는데 사용하다 말썽이 나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구입한 지 얼마되지 않을 때는 더욱 배가 아프고, 그것을 처분해야 할 때는 더없이 원망스럽기까지 하지만 그런데 어쩌랴! 농사를 지을 때는 속이 상하더라도 그저 묵묵히 받아들여야 하는 태연함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지금 내 밭은 본의 아니게 묵히게 되었으며, 묵힌 덕(?)에 풀이 하늘을 향하여 잘 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또 그 덕(?)에 내년엔 지력이 회복되어 농사가 더 잘 될 것이란 망상을 또 한다.

역시 올해도 나는 풀을 이기지 못하나니, 장마가 그치면 서두르지 말고, 성내지 말고 천천히 풀을 베어야겠다. 베다가 지치면 쉬고, 베다가 지치면 내일로 미루고... 그러다 처서가 다가오면 풀들은 저절로 고꾸라지나니 그때면 풀베기가 좀 수월해지리라. 이제 한 달만 잘 참고 기다려보자. 처서는 8월 23일이다. 갑자기 풀 벨 기운이 솟는다. 하하하!

황은경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4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0 / 최대 22400바이트 (한글 11200자)
- 금지어 사용시 댓글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 [댓글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도배성, 광고성, 허위성 댓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