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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가 정답이다!” 요나 3장 4절~7절
김명섭  |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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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7월 20일 (월) 19:21:56 [조회수 : 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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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가 정답이다!” 요나 3장 4절~7절

 

 

1. 전도자의 사명

 

(4절)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 이방인의 성읍 니느웨가 멸망에서 구원받는 놀라운 사건이다. 이 모든 사건은 예언자 요나의 외침(말)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롬10:10~15)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니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께 같으니라.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 예언자는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파해야 한다. (겔2:7) ‘그들은 심히 패역한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찌어다’ (겔3:17~21)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하므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예언자의 말은 하나님의 최후통첩이자 생명으로 나가는 마지막 비상구다. 전하는 자와 듣는 자는 운명공동체다.

▶ 예언자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야 한다. (딤후4:2~5)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전파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돌이키는 것은 당사자의 몫이고 회복시키시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이다. 따라서 예언자는 상황이나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다만 나에게 맡겨진 직임을 다 할뿐이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런 권면을 한 이유가 중요하다. 전도자에게는 영광과 칭송보다 핍박과 낙심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

 

 

2. 회개가 정답이다!

 

(5절~6절)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 백성들이 먼저 하나님을 믿고 회개운동이 시작되었고 이후에 왕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아래로부터의 회개운동이었다. 회개는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시작된다. 타인으로부터가 아니라 나로부터 밖으로 부터가 아니라 안(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메시지성경)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은 뒤에 베옷으로 갈아입고 잿더미 위에 앉았다’ 회개는 옷을 갈아입는 것이다. ‘굵은 베’는 참회와 탄식과 자기 부인을 상징하는 복장이다. ‘세마포’(아마나 삼베 등의 식물)로 만든 검소한 의복이다. (시103:15)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풀로 만든 옷을 입은 것은 유한한 인간의 실존에 대한 자각을 뜻한다. 회개는 왕의 보좌에서 내려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셔 들이는 것이다. 왕좌에서 내려와서 잿더미 위에 앉았다. 재는 덧없음과 무상, 슬픔과 참회의 상징이다. 재는 순수와 정결을 상징한다. 한 줌의 재로 돌아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 대한 자각을 뜻한다.

▶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회개한 이유를 단순하지만 명확하게 증거 한다. 단지 ‘소문’을 들었을 뿐이다. (눅7:2~9) ‘어떤 백부장이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근거도 동일하다. 단지 ‘예수의 소문’을 들었을 뿐이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고 결국 만나지도 못했으나 ‘의뢰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순종’하는 믿음으로 치유 받는 구원을 체험했다. 이방인 왕과 이방인 백부장은 ‘소문을 듣고’ 회개했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자부하던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왕들, 심지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노라 자부하던 제사장들은 회개하지 않아서 멸망했다는 사실을 대비하고 있다. 구원은 혈통이나 직분, 신앙지식에 달려 있지 않다. 죄 사함을 얻는 구원의 조건은 하나다. ‘회개’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요나의 전도를 듣고 이방인이던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하였는데 선민을 자처하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않았다. 결국 이방인 ‘회개’해서 니느웨는 구원받았지만 선민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은 ‘회개치 않음’으로 멸망했다. 회개가 정답이다. 만물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서 인류와 교회를 향해 던지신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재난에 대해서 정답이 아니라 오답을 거듭하고 있다.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철저한 회개를 촉구하시는데 회개 없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구하며 인간적인 노력과 대책으로 만회하려고만 한다.

 

 

3.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7절)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 (메시지성경) ‘그러고는 니느웨 전역에 다음과 같은 공문을 발표했다. 누구든지 물 한 모금이라도 마시거나 밥 한 술이라도 입에 대서는 안 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베옷을 입고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라’ 회개에 합당한 태도와 자세가 요구된다. 식음을 전패하고 죽기를 각오하는 금식기도의 정신은 무엇인가? (눅18:9~14) ‘바리새인이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금식기도의 형식이 아니라 금식기도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 십일조의 형식이 아니라 십일조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 정신(Spirit)은 우리말로 ‘얼’이다. 정신은 망각하고 형식에만 집착하는 얼빠진 신앙생활을 경계한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 형식적인 율법주의를 넘어 본래적인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다. (마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 누가 의인인가, 누가 죄인인가! (9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누가 깨끗한 사람이냐? 자신의 허물과 더러움을 아는 사람이다. 누가 지혜로운 사람이냐? 자신의 무지를 아는 사람이다. 누가 의인이냐? 죄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회개한 사람이다. 우리가 드려야할 온전한 기도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기 의를 드러내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의 허물을 자백하고 낮추는 세리의 기도다.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지금 우리가 부르짖어야 할 기도는 이 한 문장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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