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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信연구소’ 를 세상에 알리다! 이은선.이정배 부부교수!지난 7월13일 오후,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이필완  |  leewaon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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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7월 16일 (목) 13:16:11
최종편집 : 2020년 07월 27일 (월) 00:37:54 [조회수 : 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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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은퇴한 세종대 명예교수 이은선 교수가, 몇 년 전 감신대에서 자원은퇴 했던 이정배 교수와 함께, [한국信연구소]의 출발을 널리 알리면서, 동시에 3권의 출판기념회가, 7월13일 오후4시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열렸다.

이은선 교수는 일찍이 신학을 전공했으나, 그동안 세종대에서 교육학을 가르치며 여성신학자로 틈틈이 활동하다가 은퇴 후, 본격적인 여성신학자로 자리매김 하는 모임 자리에,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한국여신학자협의회, 한국여성신학회, 생명평화마당, 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 보인회, 해천우회, 3,1종교개혁연대 등 후원단체들 회원들과 지인들 150여명이 모여 축하했다.

이날 개소식은 단해교회 하태혁목사의 사회로 '찬송 393장 오신실하신 주'를 부르고, 한국여신협 실행위원 신선 교수가 기도하고, 보인회 회원들이 “經 앞에 바로서기-믿음(信)에 관한 증언들”을 낭독하였고 함께 묵상했다.

이어 한국信연구소 소장 이은선 교수가 ‘한국信연구소’를 설립하게된 동기와 취지, 과제를 발표하였고(*기사 하단 전문 참조) 전 한국여성신학회 회장 최만자교수와 YMCA전국연맹 김흥수 이사장이 축사를 했다.

   
 

거문고 병창(거문고 박소연, 장구 고성진) “출강”의 축하공연 후, 이 날 같이 출판된 3권의 책 중, 이은선 쓴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읽기'(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은 한국전통문화대 이선경 교수가 서평하고, 이은선 쓴 '동북아 평화와 聖 性 誠의 여성신학'(동연)은 감신대 김정숙교수기 서평했으며, 이정배 쓴 '유영모의 歸一신학'(신앙과지성사 밀알북스)는 한국예종 임종수 교수가 각각 서평했다.

그리고 작은이의벗친구교회 이학산 목사의 인도로 “담쟁이” 노래를 함께 불렀고, 현장아카데미 원장 이정배 교수가 개소식 이후의 이정배.이은선 부부가 함께 하는 '한국信연구소  개소식 그 이후' 미래 계획을 밝히면서 인사한(* 기사 하단 인사말 전문 참조) 후 ‘함께하는 축복기도’로 마쳤다.

‘하늘 부모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한국信연구소가 탄생했습니다. 그 뜻을 잘 받들어 잘 해 나갈 수 있도록 이 곳에 모인 모두가 함께 기도합니다. 같이 할 친구와 동지들을 보내주시고, 이로써 한반도와 온 세계의 삶이 더욱 편안해지고 사랑과 은혜로 넘쳐 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사진은 서산갈산교회 안인철목사가 찍었다. 현재 유튜브 위한 풀동영상을 편집 중!)
   
 
   
 

 

2020.7.13. 한국信연구소 개소식 및 출판기념회

 

<한국信연구소를 열며>

이은선(한국信연구소 소장, leeus@sejong.ac.kr)

 

1. 왜 한국信연구소를 시작하려 하는가?

 

   
 

이렇게 어려울 때 함께 오셔서 축하해 주시고 뜻을 모아주시니 우선 송구한 마음이 큽니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 저희 생각을 나눌 기회를 주신 하나님과 함께하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많이 망설였습니다. 2년여 전 세종대학교를 떠나면서 “이제 온전히 신학자로 살겠다”라는 선언과 함께 그동안 ‘한국信연구소’라는 이름 아래서 지내왔는데, 오늘 이를 다시 공적으로 공표한다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오늘과 같이 여러 가지로 어려운 때에 무슨 유용이 있으며, 제가 이 이름 아래서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최근에 또다시 읽은 책이 있습니다. 제가 1980년대 유럽에서 유학하면서 만난 독일 인지학자(人智學) 루돌프 슈타이너의 『어떻게 더 높은 세계를 인식하는가?』 가 그것입니다. 이 책의 마무리에는 우리 삶과 죽음의 경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 경계(문지방)를 지키는 두 수호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서 만나는 첫 번째 수호령과 문지방은 한 커다란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거기서의 수호령이란 지금까지 무수히 반복되는 우리 삶에서 행한 온갖 거짓과 잘못, 죄과가 누적된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 문지방을 넘고 첫 번째 수호령을 만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끔찍하고 부끄러운 자신의 과거와 만난다는 것이고, 그 앞에 적나라하게 서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 문지방을 넘는 일은 그런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넘어서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말합니다. 오늘 한국信연구소를 공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일이 어쩌면 저에게는 그렇게 두렵고 떨리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문지방을 넘는 일은 우리가 이후 더 높은 세계를 향한 인식의 길에서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초감각과 초자아의 참 자유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거기서 만나는 수호령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이제 너의 감각적 자아를 구성하던 사고(thinking)와 감정(filling), 의지(willing)의 상호 연결이 분리되면서 초감각과 초자아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그러나 그러한 너의 해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세상의 불행과 고통을 어찌하려는가? 네가 해방을 위해서 얻은 모든 지식과 좋은 것이 바로 그들 덕분인데, 그들을 그냥 두고서 이 문지방을 넘어서려는가? 한국信연구소를 여는 일이 이렇게 초자아의 해방의 길로 가는 것을 놓아두고서라도 다시 나누고자 하는 일이 있어서인지, 또는 내가 여전히 자아로 남아있으면서도 밝히고자 하는 일이 있어서인지를 묻고 또 물었습니다.

 

2. ‘한국적’(Korean)이라는 것

 

한국信연구소의 이름을 영어로 ‘Institute of Korean Feminist Integral Studies for Faith’라고 지었습니다. 이 이름을 구성하는 한 자 한 자가 바로 저의 그러한 소망과 의지가 여전히 가닿는 주제인 것 같습`니다. 먼저 ‘한국적’(Korean)이라는 것과 관련해서입니다. 이번 세계적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들은 많은 말 중에서도 『공감의 시대』의 저자 제러미 리프킨이 한국이 이번 사태에서 어느 나라보다도 훌륭히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한국 사람들은 자기가 병에 걸리는 것보다 자신으로 인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더 못 견디어서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매우 기뻤고, 바로 이처럼 한국인에게 잘 드러나지 않았고 언술 되지 못한 고유한 자질이 한 외국인에 의해서 밝혀진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저의 학적 물음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어떻게든 ‘한국적’이라는 민족적 물음을 놓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의 가계의 오랜 정신적 선험성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가장 직접적으로는 아버지 이신 목사님의 기독교 ‘환원 운동’을 생각합니다. 저희 아버지는 우리가 비록 기독교를 서구로부터 늦게 받았지만, 거기서 기독교의 현실은 온갖 교리적 분파와 분열로 얼룩져 있다고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본래의 원형적 모습을 한국 사람의 손으로, 한국인들의 의식으로 다시 찾기를 원했습니다. 여러 시각과 시도로 기독교의 ‘근본’을 찾기를 원했고, 그런 가운데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언(1974년)’을 단행하기도 했으며, 그러한 일을 위해서 길지 않은 생에서 고통을 감내하셨습니다. 이렇게 한반도 주변에는 새로운 문명과의 만남에서 항상 그 ‘원형’과 ‘근본’과 거기서의 ‘토대’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라의 원효가 그랬고, 고려에서 ‘단군고기’(檀君古記)를 간직해서 전해주고자 했던 목은 이색의 스승 행촌 이암(杏村 李岩, 1297-1364) 선생이 있었으며, 조선 유교에서도 비록 ‘소중화’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끊임없이 ‘원형’과 ‘근본’, ‘참’에 대한 추구가 있었음을 보면서 오늘 한국信연구소도 그러한 사상의 젖줄에 기대어서 참 한국적인 신앙과 믿음의 본 모습을 찾고자 합니다. 오늘 21세기 한반도 현실의 삶에서 강하게 야기되는 남북통일과 동북아 평화의 물음도 저희에게는 그러한 맥락에서 성찰되는 일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3. ‘여성주의적’(feminist)이라는 것

 

어떤 대상이나 일에서 감각적인 눈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원형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처지는 어렵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몰두하는 삶의 중앙에서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으므로 중앙의 기득권과 불화하고, 그로부터 멀리 떠나 변방으로 가기 때문에 힘든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런 변방인과 이방인(pariah)들이 있지 않고서는 현실은 개조되지 않고, 개혁되지 않으며, 생명은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일찍이 함석헌 선생도 이러한 생명의 예민한 내적 원리를 간파하셨고, 그것을 우리 민족의 ‘고난의 역사’로 의미화하셨으며, 저는 그 원리를 다시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 페미니스트 여성신학자로서 세계 문명사의 맥락에서 증거 하고 싶습니다. 한국信연구소 영문 이름의 두 번째 형용사가 되는 ‘여성주의적’(feminist)이라는 말도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이해합니다. 주지하듯이 오늘 페미니즘의 시대에는 자기희생과 헌신, 자기 비움과 이름 없음이 그렇게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 이름 아래서 지금까지 여성들이 어떤 고통과 아픔을 겪어왔는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의 두 번째 수호령의 이야기에서도 들어보았고, 지금까지 인류의 모든 종교적 성찰은 한결같이 바로 그러한 길이 궁극의 구원의 길이라고 지시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종교적 진실과 페미니즘은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상극인가를 저는 묻습니다. 그러면서 이 둘 다 놓칠 수 없는 진실의 길을 어떻게든 서로 연결시키고, 어떻게 하면 그 간극을 메울 수 있나를 찾으면서 저의 미약한 삶에서, 논리에서, 믿음의 일에서 고투합니다. 이것을 저는 지금까지 서구 페미니즘을 넘어서 그와 다른 ‘한국적 페미니즘’, ‘한국적 포스트모던 영성’을 가져오는 일이라고도 했고, 그런 맥락에서 이른 시기부터 ‘공감’을 강조하며 ‘사기종인’(捨己從人)의 여성 리더십을 말하고, ‘모성’의 서구 페미니즘적 탈신화화를 넘어서 일종의 재신화화를 통해서 다시 그 본래를 강조하면서 초기 사회이론 중심적 페미니스트들과 갈등하기도 했습니다. 유사한 맥락에서 오늘 ‘집사람’을 강조하면서 ‘사유하는 집사람’을 말하며 그것이야말로 우리 생명 창조와 지속하는 문명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토대가 된다고 주창합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또한 대한민국의 민낯이 n번방 사태와 손정우 아동포르노 사태, 최숙현 철인 3종 팀 선수 폭행 사건 등으로 끔찍하고도 비참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서구 근대 페미니즘 운동 덕분으로 우리 몸이 해방되었고, 성(sex)이 해방되었으며, 감각의 세계가 한껏 피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사태가 보여주듯이 거기서 생명의 또 다른 차원인 몸의 거룩성이 모두 탈각됨으로써 우리 몸과 섹스와 이생의 삶은 그저 무생명의 물질과 쾌락의 도구가 되었고, 무차별한 폭력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비참과 불의가 저는 단지 서구 페미니즘적 법적 정의의 회복만으로 치유되거나 해소될 수 없다고 봅니다. 보다 근본적이고 세계관적인 전이가 요청되는데, 여기서 뜻밖에도 동아시아의 오랜 신유교의 性 이해에서 그 한 가능성을 봅니다. 바로 오늘 우리 시간으로부터 그렇게 멀지 않은 조선 신유교에서의 性 이해는 우리 시대에서와는 달리 그 性이라는 언어로 오히려 우리 안의 깊은 내재적 초월의 차원과 하늘의 차원을 지시하면서 우리 몸과 감정, 성적 관계 등의 신체적 차원이 끊임없는 중용과 섬김, 삼감의 禮로 함께 보살펴지는 일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보살핌(禮)의 실행 주체가 주로 남성이었고 당시 계급사회에서의 양반이기는 했지만, 오늘 그러한 역사적인 차별의 장애가 많이 가신 상황에서는 우리 모두 한가지로 우리 몸과 性에 대한 존숭과 禮의 일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우리의 깊은 병폐인 몸과 性의 철저한 물화에 맞서서 다시 그 내재적 거룩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을 말하는데, 그것을 오늘 한국의 보수 교회에서처럼 세상 밖의 외재적 구원자에 기대서 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 오래된 동아시아 전통에서의 性과 몸 이해로 가능해지도록 하는 일을 말합니다. 저는 이것이 더욱 더 진정한 주체와 자유의 길이라고 여기고, 이 길을 더욱 밝히는데 애를 씁니다. 이 일은 앞에서 밝힌 대로 ‘한국적’(Korean)이라는 표제어 아래서 먼저 지금까지 서구 기독교가 독점해온 神과 거룩을 동아시아의 더욱더 보편적인 초월의 이름인 ‘聖’으로 해방시키고, 여기서는 또 다른 동아시아의 이름인 ‘性’을 가져와서 우리 몸과 성(sex), 가족적 삶과 모성 등의 사적 삶의 거룩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모두 제가 다른 말로 많이 이야기해 온 ‘聖(거룩)의 평범성의 확대’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4. ‘믿음의 통합학’(intergral Studies for Faith)라는 것

 

일찍이 20세기 서구 기독교 문명이 낳은 전체주의적 타락인 나치즘에 맞선 본회퍼는 “우리는 바라보면서 살지 않고, 믿음 속에서 살아갑니다. 역사가 존재하는 한,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삶의 ‘지속성’에 관한 이야기인데, 우리 삶과 역사가 지속하기 위해서는 결코 사실성만으로는 되지 않고 그 사실성 너머에 있는, 또는 근저에 있는 초월성에 대해 믿음이 요청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성과 초월성, 세계와 하나님, 氣와 理, 身과 心(性), 과학과 종교 등의 두 영역과 측면이 어떻게든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 그 함께 어우르고 연결되도록 하는 일, 이것을 한국信연구소는 계속해서 추구하고, 수행하고, 이루려고 합니다. 이를 우리 존재와 삶의 온 영역에서 밝히고 드러나도록 하는 일을 ‘불이성’(不二性)과 ‘지속성’이라는 의미의 한국신연구소의 세 번째 형용사 ‘Integral Studies’(통합학문) 라는 말로 강조해 왔습니다. 또한 바로 ‘현장’(顯藏) 이라는 말, ‘나타나고 또 감추어진’이라는 표현이 동아시아의 오랜 생명 표현인 ‘道’나 ‘易’의 본래를 지시하는 귀중한 언어라는 것을 알고 얻어와서 그러한 저희 뜻을 표현하는 언어로 쓰고 있습니다. 이 우주, 만물, 아무리 하찮은 ‘물건’ 하나, 한 가지 ‘일’에서라도 이 두 차원이 없지 않고 함께 있고, 그래서 우리는 그에 대한 진심 어린 존숭과 겸손(敬)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21세기 인류 문명의 다원화 시대에서는 이 불이성, 또는 간단히 표현하면 우주와 만물의 초월성을 이제 어떠한 언어로 표현하느냐의 문제는 많이 열려졌고, 심지어는 한국 기독교의 배타적 유일신론적 보수성도 많이 금이 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 이름의 다양성이 불러오는 갈등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기독교의 하나님 신앙도 포함해서 도무지 이러한 초월의 차원을 인정하는 일, 존재의 불이성을 드러내는 거룩성의 차원(敬)을 어떤 것이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시대의 핵심 관건은 더이상 神 이야기(God-talk)가 아니라 信, 믿음과 신뢰, 용기의 이야기이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사실성과 더불어 초월성, 그 둘의 불이성을 깨닫고 믿을 수 있도록 할까의 문제라는 것이며, 한국신연구소는 그 길을 찾아 나서고자 합니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믿지 못하게 하는지, 왜 우리 사이에서 신뢰와 믿음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 되었는지를 탐색하는 “믿음을 위한 통합학문”(Integral Studies for Faith)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길은 예전 좁은 의미의 종교나 신학의 물음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많은 영역의 일이 포괄되는 것을 말하며, 특히 제가 거룩의 ‘聖’ 자(字), 우리 몸의 ‘性’와 더불어 세 번째로 불러오고자 하는 ‘誠’의 언어로 강조하고자 하는 교육의 차원이 중시되면서 ‘한국적 聖·性·誠의 믿음의 통합학’을 말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앞에서 함께 읽은 ‘經 앞에 바로 서기’에서의 믿음에 관한 여러 문장은 주로 지금까지 써온 글에서 모아봤습니다. 이제 우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으시겠다는 예수의 선언을 21세기 오늘 한국 땅에서 다시 한번 정직하고 진실되게 사실화해보자는 의지, 그 예수보다 거의 4백여 년 전에 동아시아의 맹자는 먼저 초월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고, 그것이 善이며, 그 믿음은 바로 나에게서 나오고 내 몸에 두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초감각적인 것이 먼저이고, 모든 형상적이고 감각적인 것은 거기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것을 믿기 위해서는 감각의 몸으로 느끼고, 경험하고, 통과해야 하므로 이 감각의 기반이 참으로 긴요한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친밀한 가족이 필요하고, 거기서 누구나 자신의 몸과 감정이 소중하게 대접받는 경험을 요청하고, 누구든지 이 지구라는 집에 태어났으면 모두가 평등한 주인이므로, 이곳의 선한 것을 공평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 사회의 ‘기본 소득’을 말하고, 또한 누구든지 살던 집을 떠나갈 때 함께 했던 가까운 사람들의 배웅을 따뜻하게 받을 수 있도록 죽어가는 자의 고독을 다시 깊이 껴안는 사회적 孝의 일 등, 이런 모든 것이 한국信연구소, 현장아카데미가 깊게 관심하는 일입니다.

 

5. 내 소원은 진정 착한 사람이 많아지는 것(所願 善人多): 박원순 시장의 죽음의 시대에

 

박원순 시장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박원순 서울시장의 서거 소식이 올라왔습니다. 다시 몸과 정신, 이 세상과 저세상, 사실성과 초월성, 법과 부끄러움, 명성과 내재, 사적 개인과 공적 사회 등의 문제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어쩌면 그는 앞에서 언급한 『어떻게 더 높은 세계를 인식하는가?』 의 저자가 이야기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 거기서의 첫 번째 수호령, 자신의 끔찍한 과거와 이미 자신이 사실로 만든 형상 앞에서 좌절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견디고 넘어서 두 번째 수호령도 만나고, 거기서 다시 우리 시대의 불행에 대한 큰 책임감을 느끼고 스스로 이곳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까지 인내의 일을 지속할 수 없었고, 우리 사회적 삶의 환경도 그것이 좀 더 수월하게 이루어지도록 함께 마련되지 못한 것이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 시대가 여전히 그 현현을 고대하고 바라는 진정한 소셜 디자이너 박원순 시장을 참으로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정말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고, 그의 남겨진 가족과 주변의 사람들이 그들이 그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았든 모두 안쓰럽습니다. 그래서 지속성(誠), 믿음과 신뢰(信), 그것을 ‘하늘의 도’(天之道) 라고 했고, 그것을 따르는 것을 ‘인간의 길’(人之道) 라 했으며, 한국信연구소가 우리 사이에서 누구든 이 길을 가는 일이 그렇게 홀로 외롭지 않도록 서로 이해하고(恕), 용서하고, 격려하고 이끌어주는 따뜻한 힘의 기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 일이 가능해지도록 우리 인간의 말을 들어서 그런 인간의 이야기에 봉사하며(執言奉辭) 길을 가겠습니다. ‘사실’은 인간적인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완성되고 이루어지는 것(成)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진실은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현실이 없으면 그 의미를 잃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드리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16세기 퇴계 선생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내 소원은 진정 착한 사람이 많아지는 것”(所願 善人多). 그러면서 저의 유가에서의 첫사랑 같은 16세기 양명 선생의 언어로 저의 속마음을 드러냅니다. “저는 제 속의 착한 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어서 이제부터는 더 솔직하고 과감하게 어떤 작은 것도 감추려 들지 않으면서 ‘광자’(狂者)와 같은 심경으로 천하의 모든 사람이 저의 행동과 말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더라도 꿋꿋하게 이 일을 지속해 보겠습니다.” 함께 해주실 것을 간청하고,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 7.13일 이은선 드림

 

 

한국 연구소 개소식, 그 이후

이정배교수(현장아카데미)

 

   
 

이제 한국 신연구소 개소식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코로나 상황에서 귀한 발걸음 해주신 분들에게 거듭 감사를 표하며 특히 최만자, 김흥수 선생님의 축사를 비롯하여 서평(이선경, 김정숙, 임종수 박사), 기도(신선) 그리고 축주(가)로 자리를 빛내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고개를 숙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김경재 교수님, 정숙자, 박득훈 이면주 목사님을 비롯한 기독교계의 중요 분들이 함께 하셨습니다. 하중조, 조영훈, 주대범 장로님께도 감사말씀 드립니다. 물론 불교와 유교의 선생님들도 함께 해 주셨습니다.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동준 교수님, 연세대 명예교수 이광호 교수님, 불교 재가자 대표 서강대 명예교수 박광수 교수님 고맙습니다. 이 분들 모두로부터 말씀을 청해 들어야 옳겠으나 시간이 허락 지 못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지하듯 우리는 유수한 역사를 지닌 신학관련 잡지, 연구공간들이 사라지는 현실을 목도 하고 있습니다. 진보성을 띨수록 사라지는 속도가 빠른듯하여 그 안타까움이 매우 큽니다. 신학자들의 경우 통합적 사유를 놓친 채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들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자기 분야에 함목되어 세상과 담을 쌓고 있습니다. 대형교회 목쇠자 분 아니라 생존이 힘든 목회자들 역시 저신들 삶의 뼈대가 되는 신학을 뒷전에 처박아 둔 채 신학의 무용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파를 막론한 교계는 더욱 보수, 근본 화되어 타자 혐오적 모습(방식)으로 세상에 현존합니다. 코로나 정국 속에서 교회의 공적 역할은 사라졌고 자기 생존을 위한 이기적 집단으로 세상에 각인되었으니 그 미래가 걱정입니다. 코로나 이후 기독교의 몰락을 예견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길이 있음을 믿고 추세를 거스르는 시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기독교와 만났던 초기 신앙 선배들을 소환하고 싶습니다. 이들 중에 기독교 신앙을 주체적으로 수용했던 토착화 그룹(최병헌, 윤성범, 유동식, 변선환), 민족 독립을 위해 사회주의 이념에 관대했던 지도자(손정도, 김창준, 전덕기, 장기천)들, 교파적 기독교를 버리고 그리스도에게로 향했던 환원운동가들(이용도, 동석기, 김윤석, 이신)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문제의식을 엮어 그들 에토스가 목하 현실에서 창조적으로 계승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들을 기억하여 소생시킬 때 자본화된 종교적(사적) 집단으로 축소, 변질되는 오늘 추세에 작은 균열이라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신연구소는 이런 과제를 떠맡아 종교개혁 500년 이후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전개하겠습니다. 분명 코로나 사태는 다른 기독교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환상 속에서 달리 믿고 다르게 살기를 명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코로나 이후 기독교의 생명(역동) 성을 위해 우리들 믿음, 상상력의 부패를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이 소리에 응답하며 사는 것이 저희들의 할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 저희부터 많이 달라지고자 애쓸 것입니다. 하늘 주시는 힘으로 동료, 후학들과 힘을 합쳐 연구공간을 재건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신학 담론을 힘껏 제시하겠습니다. 온/오프라인을 통해 배워 알기를 원하는 이들과 ‘이후’ 기독교, ‘이후’ 신학, ‘이후’ 교회의 길을 토론하겠습니다. 새로운 기독교, 새로운 문명, 통일한국을 생각하는 값진 연구서도 출판해 낼 것입니다. 젊은 신학도들, 새로움을 갈망하는 신앙인들에게 작은 의지 처, 신뢰의 그루터기가 되고 싶습니다. 저희들만의 힘으로는 벅찰 것이며 길게 가지 못할 것입니다. 핮;만 저희가 기꺼이 마중물 이 될 것입니다. 탈진리(Post-Truth) 시대에 이른 지금 6개혁이란 것이 종교개혁 당대보다 훨씬 더 어렵겠으나 가야할 길이라 믿습니다. 이 도상에서 마음과 뜻이 합해지는 은총의 사건이 생길 것을 믿으며 이 여정에 감히 첫발을 내 닫습니다.

 

아시는 대로 이은선 교수와 저는 2016년 이후 시차를 두고 명예퇴직을 했으며 현장아카데미를 일궈 왔습니다. 사실 이 일은 횡성에 거처를 마련한 2000년 가을부터 꿈꿔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세상 안에서 세상 밖을 살아보자’는 새로운 수도원 운동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연구(독서)와 영성(예배) 그리고 노동(생산)이 아우러지는 공간이 되길 꿈꿨던 것이지요. 오늘 공식화된 ‘한국 신연구소’가 첫 영역, 연구 분야를 책임지고 이끌어 갈 것입니다. 여성적인 적인 것이 세상을 구할 것이란 말을 믿으며 한국 신연구소의 앞날을 진인사재천명의 심정으로 하늘에 맡겨드립니다. 기념해야 할 뭇 역사적 사건을 품고 있는 2020년, 그 후반기를 시작하는 7월에 한국 신연구소를 공식화하게 된 것이 참으로 뜻깊습니다. 이 자리에 여러분을 모신 것을 기쁨과 영광이라 여기며 저희들 말()이 이뤄지는() 세상을 선배, 동료, 제자 및 뭇 지인과 함께 믿고 기대하겠습니다. 오늘 모임을 위해 애써 주신 여러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리며, 끝으로 환희당 모임의 벗, 실상사 법인 스님이 한국 신연구소를 위해 보낸 <대승기신론>의 짧은 글 한 편을 가슴에 새기며 말씀을 갈음하겠습니다. 믿음도 타락할 수 있음을 늘 상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믿음을 성취하는 일은 수행이 없으면 이룰 수 없는 과제인바, 믿음이 성숙치 못하면 연()을 만나는 순간 곧 퇴진하고 말 것입니다” (필자 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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