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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위기와 기독교의 새로운 대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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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7월 08일 (수) 18:34:46
최종편집 : 2020년 07월 08일 (수) 18:37:37 [조회수 : 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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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위기와 기독교의 새로운 대서사


돈 큐핏 지음
안재형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신국판 166쪽
2020년 7월 15일
값 12,000원
원서 A New Great Story (Polebridge, 2010)
ISBN 978-89-97339-56-3 94230, ISBN 978-89-97339-55-6 94230 (세트)
 

 

 


1. 책 소개

 

저자는 이 책에서 기독교의 핵심 줄거리인 대서사(Grand Narrative)를 새롭게 제시함으로써 기독교의 진리와 본질을 새롭게 밝혀준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정통주의가 된 대서사, 즉 천지창조부터 인류의 타락과 구원, 최후심판과 천년왕국까지의 대서사는 왜 오늘날 설득력을 잃었는지, 그리고 새로운 대서사는 어떤 것인지를 종교 역사의 관점, 특히 직접종교와 중보종교의 순환 역사의 관점에서 해명한다. 문명의 위기를 돌파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불안과 혼돈에 휩싸인 미래를 선도할 종교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절실하지만 기독교가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쇠퇴하고 있는 때에, 저자는 이처럼 그 쇠퇴의 신학적 근본 원인을 밝히고 새로운 대서사를 제시한다. 종교는 문명을 이끌어온 매우 진보적인 힘이라고 확신하는 저자는 왜 인간의 이성, 경험, 양심에 호소하는 세속적 인본주의로 기독교를 대체하겠다는 계몽주의적 발상이 실패로 끝났는지를 밝히고, 나아가 과학과 철학, 그리고 최근의 예수 연구에 근거한 새로운 대서사를 제시하면서, 특히 예수의 핵심 메시지가 정말로 무엇인지를 독특하게 설명한다. 문명의 위기에 봉착한 인류에게 저자는 신앙 공동체들이 보여줄 절박한 종교적 비전과 가치들을 밝혀준다. 여러 복합적인 문명사적 위기들이 악화될수록,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해야만 개인의 진정한 행복과 사회 변혁, 그리고 문명의 돌파구를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2. 저자와 역자

 

   
 

돈 큐핏(1934― )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30년 간 가르치고 은퇴한 급진적인 종교철학자이며 신학자로서 40권의 저서를 발표했다. 『떠나보낸 하느님』,  『예수 정신에 따른 기독교 개혁』,  『신, 그 이후』 등이 번역되었다.
안재형 선생은 홍익대에서 전자계산학 석사, 총신대에서 목회학 석사, 한동대에서 응용언어학+번역학 석사를 받았으며,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 근본주의를 벗어나 균형 잡힌 신앙을 소개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3. 목차

 

 서론 __ 9
 1장. “하느님” 용례 __ 21
 2장. “세상” 용례 __ 29
 3장. 태초에 __ 35
 4장. 정착하기 __ 45
 5장. 하느님은 과도기적 대상? __ 57
 6장. 다른 사람들의 믿음 __ 69
 7장. 중보종교 __ 77
 8장. 율법의 종말 __ 89
 9장. 두 번째 회전 __ 101
10장. 두 번째 회전 완성 __ 113
11장. 종교적 사고와 인류 만들기 __ 119
12장. 신들의 황혼 __ 131
13장. 최고선(最高善) __ 141
14장. 비난 __ 151
참고문헌 __ 165


 
4.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할 질문들

 

기독교가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쇠퇴하는 신학적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정통주의가 된 기독교 대서사는 왜 문제가 되는가?
사제, 성전, 예배, 경전, 법, 교리 중심의 중보종교는 왜 흔히 억압적인가?
중보종교와 싸우다 살해된 예수의 종교는 왜 다시 중보종교가 되었는가?
중보종교는 왜 진리 탐구보다 기복주의, 율법주의, 반지성주의가 되는가?
문명전환이 시급한 때에 신앙 공동체가 보여줄 비전과 가치는 무엇인가?
종교는 어떻게 인류 문명을 이끌어온 매우 진보적인 힘으로 작용했는가?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한 예수는 어떤 삶과 환희를 보여 주었는가?
중심부에서 참패한 예수는 어떻게 주변부의 루저들에게 희망이 되었는가?
예수의 본래적 가르침은 산상설교 안에서 어떻게 타협되고 왜곡되었는가?
지난 200년 동안의 성서 역사비평학이 놓친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인가?
죽음 이후의 삶에 희망을 두었던 기독교는 이제 어디에서 희망을 찾는가?
왜 기독교는 공적과 보상 개념으로 예수의 교훈을 ‘이단’이라 비난했는가?
왜 개신교는 과거의 지적 다양성과 생기를 잃고 보수적 집단이 되었는가?
상황이 악화될수록 어떻게 희생양 찾기가 아니라 불행의 동반자가 될까?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세계종교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5. 본문 속으로

 

(p. 9) 이 책에서 내가 목표로 삼는 것은 독자들에게 전통적인 라틴 기독교, 즉 “서방” 기독교의 “대서사(Grand Narrative)”를 대체할 철저히 현대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자세한 내용은 차차 설명해 나갈 것이다.
과거의 대서사는 영원 속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모든 것에 대한 거대한 이야기였다. 하느님과 첫 피조물인 천사들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타락과 구원으로 이어지는 긴 역사를 지나 마지막 심판과 복된 자들의 최종 승리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였다.

(p. 51) 모든 것은 초자연적인 질서를 통해, 즉 하느님을 통해 배워야 했다. 하느님은 어디서나 앞장서며 길을 보여주셔야 했다. 나는 내 스스로는 아무것도 생각해낼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밝히기 위해 나는 하느님의 영이나 하느님의 지혜에 호소해야 했다. 나는 혁신할 수 없었다. 하느님만이 혁신했다. 나는 내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나는 하느님의 뜻을 배워야 했고 거기에 순종해야 했다. 그렇다면 세상은 어떠한가? 세상은 아직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상대적으로 독립적이고, 법의 지배를 받고, 예측 가능한 자연질서가 되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질서는 “하느님의 옷자락”이며 자연질서에게 명령하는 유일한 원리는 하느님의 말씀과 자신의 약속에 대한 하느님의 신실함이라고 말했다.

(pp. 102-03) 내가 설명한 예수 종교(Jesus’ religion)의 흥미롭지만 거의 언급되지 않은 특징 중 하나는 불합리하지 않다는 것이다. 교회 종교(church-religion)의 매우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인 “신조(creeds)”는 믿을 만한 증거가 없는 경우에도, 더 나아가 명백히 참이 아닌 경우에도 신자들에게 믿음(beliefs)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예수 종교는 그저 윤리적인 결단으로 부르는 것이다. 예수 종교는 우리가 삶과 동료 인간을 향한 타오르는 사랑에 온 맘으로 우리 자신을 헌신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근심이나 박해 같은 것들은 무시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종교는 “인지하는 것이 아니다(non-cognitive).” 예수 종교는 실제로는 초자연적인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예수 종교는 우리가 지금 삶에서 권위에 복종하는 대가로 죽음 이후 다른 세상의 삶을 약속하지 않는다.

(pp. 104-05) 관심의 초점이 삶으로 살아내는 것에서부터 깨어 기다리는 것으로, 예수의 가르침에서부터 예수의 인격(person)으로, 특히 우주적 계급구조 속에서 예수의 높여진 지위로 이미 옮겨졌다. 무엇보다 사도들이 이미 교회의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사도들이, 그리고 사도들만이 참된 교리를 결정했다. “기독교”는 성직자들 사이의 권력투쟁의 산물이며, 권력투쟁은 여전히 기독교의 주요 관심사다. 예수는 시대를 한참 앞서서 청중들이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유형의 신적/인간적 삶을 선택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사망 후 20년도 되지 않아서 예수는 과거 청동기시대 유형의 종교, 즉 우리 대부분이 지금까지도 머물고 있는 영적 권세의 종교(a religion of spiritual power)를 다시 소개하기 위한 발판이 되고 말았다. 예수는 우리가 선택하기만 하면 지금 여기에서 정점인 최종 성취를 약속했다. 하지만 새로운 종교인 “초기 가톨릭(Ur-Catholicism)”은 영원한 행복을 먼 미래로 연기했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에게 죽음 이후의 상상 속 하늘 세상일 뿐인 것으로 판명되곤 했다. 한편 우리는 머리를 조아린 채, 열심히 일하며, 믿으라고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으며, 어길 경우 받게 될 무거운 처벌 때문에 교회법을 지키며 노예처럼 살아야 한다.

(p. 106) 원래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내가 주장하는 것과 예수에 의해 설립되고 위임받았다고 주장하는 종교 체제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예수는 인생의 최종 목표인 최고선(最高善, the Summum Bonum)은 바로 지금 철저히 태양처럼 사는 것(solar living)이며 태양처럼 사랑하는 것(solar loving)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우리가 얻은 것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절대 군주제와 그에 따른 절대 노예제였다. 명령의 사슬이 인간의 머리 위로부터 모든 것의 원동자(Prime Mover)이자 제1 원인(First Cause)에게까지 올라가는 지주(landowner)의 종교이자 온 우주를 군대와 같은 조직으로 보는 법과 권력의 이데올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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