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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을 잃지 않으려면
송병구  |  sbkboch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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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6월 21일 (일) 01:07:30 [조회수 : 2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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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칠(1913-1951년)이란 역사가가 있습니다. 학자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어쩌다 내가 손에 쥐게 된 <역사 앞에서>(1993년, 창비)와 <고쳐 쓴 한국역사>(1994년, 앞선 책)란 그가 쓴 책들 덕분입니다. 두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빼어난 글 솜씨와 이야기를 풀어가는 탁월한 재간을 느꼈습니다. 아마 그 자신의 사려 깊은 생각과 품은 의지를 요령 있게 정리한 덕분일 것입니다.

  <고쳐 쓴 한국역사>는 김성칠이 1946년에 집필한 <조선역사>를 말 그대로 맞춤법을 고쳐 새로 정리한 책입니다. 해방 직후에는 변변한 우리나라 역사책이 없었습니다. 설사 있더라도 한문투성이어서 젊은이들에게는 아주 멀리 존재하였습니다. 평소 읽을 만한 국사책이 없음을 딱해하던 김성칠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답게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런 까닭에 변변한 출판사가 아니라, 그가 일하던 금융조합에서 출간했습니다. 저자가 정식으로 역사학자로서 이름을 올린 해는 이듬해 1947년으로, 서울대학교 사학과 조교수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제 막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젊은이들에게 자기 민족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 넣는 일은 그 시대 역사가들의 사명이었습니다. 오래도록 일본식 군국주의교육은 우리 역사는커녕, 조선 사람에게 자기 민족에 대한 모멸과 수치심을 주입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김성칠은 머리말에서 “이렇게 함이 학문하는 태도에 있어 신중치 못함이 아닐까 하고 주저되기도 하나 일본말책 대신 아무 것도 읽을 것이 없어서 재미없어하는 소년들에게 이 초라한 선물이나마 보낼 수 있음을 기쁘게 여긴다”고 썼습니다.

  흥미진진한 역사 이야기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근세사 편중 ‘조선의 쇠망’ 부분인데 역사가의 진단이 매섭습니다. 게다가 그 표현이 역사서술이전에 문학적입니다. 
  “백성들은 나라의 추렴이 많은데 관리의 토색까지 겹들어 부지런히 일하고 알뜰히 살림 살아서 볏섬이나 쌓아놓으면 서원과 양반이 애매한 죄를 얽고, 또 아전의 농간이 일을 더욱 버르집어서 재산을 잃어버림은 물론이며 매까지 얻어맞게 되므로 힘써 일할 생각이 나지 않아서 모든 산업이 오그라들고 나라의 모습이 말 못 할 형편에 이르렀다”(김성칠의 고쳐 쓴 한국역사, 212쪽).

  저자가 5천년 조선역사 중에서 상고사는 물론 근세사 중 ‘망국과 독립’을 다른 시대와 비교하여 소상히 서술한 배경은 ‘우리 역사’에 대한 주체의식의 자각과 회복, ‘남의 역사’를 극복하여 새 나라를 세우려는 반성과 열망의 반영일 것입니다. 책의 마지막 대목에는 해방 75년에 이른 지금도 새겨들을 만한 깊은 우려를 담고 있습니다.

  “만일 조선 사람이 다시 조선 말년의 잘못을 되풀이해서 (미국과 소련 등) 큰 세력에 현혹하여 제정신을 가누지 못하고 사대주의로 그를 섬기고 체면을 돌보지 않고 이에 빌붙어서 치사스러이 자기 당파와 자기 개인의 이익을 도모한다면, 민족 100년 대계를 그르쳐서 천추만대의 자손들에게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다”(위의 책, 235쪽).

  김성칠의 염려는 얼마가지 않아 구체적으로 드러나는데, ‘한 사학자의 6.25 일기’라는 부제가 붙은 <역사 앞에서>가 그 증거입니다. 분단의 현실을 “조선사람의 내부에 필요 이상의 사상적 분열을 일으켜서 조선의 통일과 발전에 한 가닥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게 되었다”는 근심이 결국 현실화 된 것입니다.

  김성칠의 일기(1950년 1-12월, 1951년 3-4월)는 역사가 이전에 한 개인이 체험한 6.25에 대해 실감과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전쟁이란 현실 속에서도 지속된 생생한 일상은 미시(微時)사로서 역사의 의미와 생활(生活)사로서 역사의 가치를 느끼게 합니다. 전쟁 이면에 존재하는 전쟁의 풍경과 전선(前線)이 아닌 일상의 전선에서 맞이하는 그날그날의 불안으로 엮어간 단편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한국전쟁 70년을 맞았습니다. 이번 주간에 나는 <역사 앞에서>를 다시 펼치면서 젊은 역사가의 근심어린 시선에 잠잠히 눈을 맞추어 볼 참입니다. 전쟁 중인 1951년 고향 영천에서 괴한의 총에 맞아 너무 일찍 세상을 뜬 까닭에 그가 이념적 편견이나 편향의 잣대로 규정되지 않은 것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입니다. 지금 우리는 정직한 염려 가운데 남북 사이에 끊어진 길 위에서, 또 다시 잃어버린 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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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웅석 (220.85.171.7)
2020-06-21 23:36:06
서울남연회 고*스교회 왜? 성도들이 떠나나.

담임목사를 쫒아내야지.

썩어도 이렇게 처참하게 썩어나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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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22.100.38.174)
2020-06-21 09:14:27
김성칠의 주장 중에서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부분에 이의를 제기한다!
김성칠 曰 “이제 막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젊은이들에게 자기 민족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 넣는 일은 그 시대 역사가들의 사명이었습니다. 오래도록 일본식 군국주의교육은 우리 역사는커녕, 조선 사람에게 자기 민족에 대한 모멸과 수치심을 주입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라는 식으로 자기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해방 바로 직후의 조선민중의 심리상태 등에 대해선 김성칠의 견해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김성칠의 주장 중에서 일제시대 관련 부분은 편협하다고 봅니다.

1. 나의 견해

일제시대가 마감된 직후 대부분의 한국인은 일본을 욕하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어른들, 조부들, 증조부들 중에서 “일본사람은 정직하고 절서가 있다.”는 식으로 일본을 평가한 분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김성칠 식의 주장은 극히 소수였습니다.

김성칠 식의 주장이 먹혀들어간 건은 북한은 김일성, 한국은 이승만이 실세가 된 후 권력 공고화를 위해 ‘반일정책’을 국시로 내걸어 그길로 일로매진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좋다고 여기던 사람들이 그들과 다른 견해(이승만과 김일성 주장)를 늘 접하고는 “아, 내가 일제에 부역한 측면이 있는구나!”하며 깨닫기 시작 한 때로부터 기하급수적으로 “일본 놈은 나쁘다!”라는 쪽으로 민심이 획 돌아선 겁니다.

조선민중이 처음부터 일본에 적개심을 가졌다는 주장은 김일성이 혼자서 독립 운동했다는 주장만큼이나 환상적이고 선동적인 주장입니다. 김구, 이승만, 최용건, 최현 등 “일본 놈은 나쁘다!”며 일제에 항거한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춘원 이광수를 비롯하여 대다수는 그 반대였습니다. 나의 증조부, 조부, 부친 등은 처음에는 일본을 욕하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이런 사람이 널리고 널렸습니다. 그런데 부친부터 갑자기 일본을 욕하기 시작하더니 나라 전체가 독립된 이후에 즉 버스가 지나간 후에 이제야 갑자기 독립투사가 되어 일본을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두 눈과 귀로 똑똑하게 보았습니다. 나의 경우에도 여기에 휩쓸렸다가 한 10년 전부터 “이건 거짓이다!”라며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2, 나의 견해를 입증하는 역사적 사실

2-1. 일본군에 스스로 입대하기 위해 줄을 선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배가 기정사실로 되기 시작했던 1944년 9월 이전에는 强制가 아니었고 自願이었습니다.

그래서 1938년 400명 모집에 2900여 명 지원(경쟁률 7.2 대 1), 1939년 600명 모집에 1만2300여 명 지원(20.5 대 1), 1940년 3000명 모집에 8만4400여 명 지원(28.1 대 1), 1941년 3000명 모집에 14만4700여 명 지원(48.2 대 1), 1942년 4500명 모집에 25만4300여 명 지원(56.5 대 1), 1943년 5330명 모집에 30만3400여 명 지원(56.9 대 1)
  
지금의 대기업, 공무원 입사시험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몰렸습니다. 그리고 자원입대한 조선인과 강제징용된 조선인 2만여명이 태평양전쟁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일본을 아주 적대시하면서 수십대 일의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일본군이 되고자 발버둥을 쳤다는 거 믿어지나요? 그리고 2만명이나 자기 목숨을 일본제국을 위해 초개같이 버렸다는 사실이...

2-2. 대한독립 후에 일어난 반일광풍은

갑자기 불어 닥친 반일열풍에 당황한 이승만이 반민특위에서 한번 거르고 지나가려 했으나 갑자기 불어 닥친 반일광풍은 태풍이 되어 이승만의 손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호주, 캐나다, 미국 등 영국의 식민지였던 국가가 영국을 대하는 태도와 비교해보면 반일광풍이 얼마나 미신적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은 영국과 전쟁까지 하면서 독립을 쟁취했는데... 한국은 일본군이 되고 싶어 안달하는 민중이 엄청났고...

2-3. 1946년 1월 현재 친일혐의로 반민특위에 검거된 사람 수

친일혐의로 검거된 사람의 수를 기록한 자료로 검거자의 본적지가 어딘가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음.(반민특위 검거 현황)
1.서울/경기 635명
2.강원 62명
3.충청 280명
4.전라 2,039명
5.경상 206명
6.평안 216명
7.황해 225명
8.함경 97명
9.제주 26명

이렇게 한번 털고 지나가려고 했던 이승만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이승만이 앞장서 불 지른 반일열풍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나는 이승만을 국부로 존경하지만 이승만이 앞장서서 반일열풍을 조장한 부분에 대해서는 유감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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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22.100.38.174)
2020-06-21 10:15:08
북한의 反日운동은 완전 사기다!

초창기 북한정권의 제2인자였던 김영주(김일성 친동생)는 조선인 중 가장 악질이라는 소리를 듣는 일본헌병의 보조원이었습니다. 형 김일성은 소련군 대위로서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 동향을 살피는 소련의 첩자노릇이나 하고, 동생 김영주는 일본헌병의 똘마니로 일제에 적극적으로 부역하였습니다.

북한 주장대로 형은 일제에 항거했다고 칩시다. 하지만 동생은 아주 악질적으로 일제에 협조한바 김일성이는 친동생을 숙청하기는커녕 자기 후계자로 키우기도 했습니다. 이게 소위 말하는 ‘백두혈통’ 집안 꼴입니다. 형은 일제를 향해 총을 들고, 동생은 일제를 위해 총을 들었습니다. 이거 코미디 아닙니까? 입만 열면 ‘반일’이었던 김일성이 자기 동생을 숙청했나요? 중용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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