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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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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5월 17일 (일) 13:06:37 [조회수 : 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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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잠11:17-21
(2020/05/17, 부활절 제6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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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자한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사람은 자기의 몸을 해친다. 악인에게 돌아오는 삯은 헛것이지만, 정의를 심는 사람은 참 보상을 받는다. 정의에 굳게 서는 사람은 생명에 이르지만 악을 따르는 사람은 죽음에 이른다. 주님은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미워하시지만,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은 기뻐하신다. 악인은 틀림없이 벌을 받지만, 의인의 자손은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

∙탐진치가 제도화된 세상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현장예배를 재개하자마자 또 다시 영상예배로 전환하게 되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가까운 이태원에서 벌어져 지역 사회가 긴장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절인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주일에 모처럼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참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다들 마스크를 끼고 계시니 그 표정을 살필 수 없었고, 마치 익명의 대중을 향해 말하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친교의 시간조차 없이 황급히 헤어지고 나니 아쉬움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습니다. 언제쯤이면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반가운 인사를 나눌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허전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습니다.

5.18 광주민주화항쟁 40주년입니다. 여전히 진상규명은 요원하고, 피해자들의 한은 신원되지 않았습니다. 좋은 나라의 꿈은 여전히 미완성입니다. 이래저래 우리 사회의 민낯이 폭로되고 있는 나날입니다. 입주민의 폭언과 폭력에 모멸감을 느낀 아파트 경비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자기보다 약자처럼 보이는 이들에게 서슴없이 모멸감을 안겨주는 이들을 보면 암담합니다. 사람이 왜 저 지경이 됐나 싶어 속상합니다. 불교는 인간이 삼독三毒에 빠져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해치는 세 가지 독은 만족할 줄 몰라 애착하는 ‘탐욕貪欲’과 눈을 부릅뜨고 성을 내는 ‘진에瞋恚’ 우매하고 어리석은 ‘우치愚癡’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이긴 합니다만 우리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탐진치가 욕망을 숙주로 하여 경쟁의 이름으로 제도화된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타자들은 경쟁자 혹은 적으로 인식되고 존중과 아낌의 마음은 저절로 줄어듭니다. 그렇기에 지금은 참회와 혁신의 시간입니다. 코로나19로 잠시 멈추어 선 지금이야말로 우리 삶을 근본으로부터 다시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요즘 많은 이들이 율라비스의 말을 인용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환경이다.” 따지고 보면 다른 이들을 위해 좋은 환경이 되는 것이 이웃 사랑의 기본입니다. 이웃에 대한 존중과 이해와 사랑이 사라지면 세상은 욕망의 전장으로 변하고 맙니다. 기본을 다시 세울 때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은 남북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863년에 ‘국가 기도의 날‘을 제창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했던 말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시의적절하게 들립니다.

“우리는 제어되지 않는 성공에 도취되어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우리는 자기만족에 겨워 구속하시고 보호하시는 은총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오만에 빠져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욕당하신 전능자 앞에서 겸손하게 엎드려 우리의 국가적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용과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인자무적仁者無敵
지금은 철저하게 죄를 고백하고 새로운 삶을 지향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누구나 좋은 평판 듣기를 원합니다. 칭찬을 들으면 기분 좋고, 비난을 들으면 괴롭습니다. 세평에 지나치게 민감할 필요는 없지만 세평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도리도 없습니다. 그런 평가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스스로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자꾸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남들이 뭐라 하든지 나는 나답게 살고 있는가?‘ ‘남들이 기대하는 역할을 그저 연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세상에 주어야 할 선물은 무엇인가?’ 인간은 자기 시대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자기에게 할당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를 성공과 실패의 기준으로 삼는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신앙인답게 살고 있는지요? 저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는 못하더라도 남에게 해가 되지는 말자고 늘 다짐하며 삽니다. 물론 선한 뜻으로 한 일이 누군가에게 괴로움을 안겨줄 때도 있습니다. 예측하지 못한 일이 끼어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삶은 늘 조심스럽습니다.

히브리의 지혜자는 “인자한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사람은 자기의 몸을 해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인자한 사람은 ‘헤세드’입니다.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보면 마음이 움직여서 돕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입니다. 잠시 출애굽 공동체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돌판을 담고 있던 증거궤를 떠올려 보십시오. 증거궤를 덮은 뚜껑 위에는 케루빔 천사 둘이 마주보고 있습니다. 그 케루빔 사이를 일컬어 속죄판(mercy-seat)이라고도 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자리라 해서 시은좌施恩座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랍비들은 그 이야기 속에서 아주 심오한 진실을 읽어냅니다. “하나님은 두 사람이 사랑과 포옹, 너그러움과 돌봄의 마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곳에서 말씀하신다“(Jonathan Sacks, , Schocken, 2005, p.54)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들이 사랑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이려는 곳 어디에나 계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자리에서 발현되는 마음이 인자함입니다. 맹자도 인간에게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다 하지 않습니까. 인자무적仁者無敵이란 말도 있습니다. 어진 사람은 아무도 적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의 아픔과 연약함까지 감싸 안는 넉넉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과 만나면 거칠었던 마음도 정화됩니다.

하지만 사람 속에는 잔인함도 있습니다. 잔인殘忍이라는 단어에서 ‘잔’은 ‘부서진 뼈 알歹’에 ‘창 과戈’ 자가 겹쳐 있는 모양입니다. ‘참을 忍‘에는 ‘잔인하다’, ‘동정심이 없다’는 뜻도 있습니다. 잔인한 사람은 무기를 들고 다른 이들을 동정심 없이 해치는 사람입니다. 사이코패스 같은 이들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홉스는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이 다른 이들을 잠재적 적으로 여기는 모습을 가리켜 ‘homo homini lupus’ 즉 ‘인간은 인간에 대하여 늑대’라고 말했습니다. 화가인 조르주 루오의 ‘미제레레’라는 판화 연작 중에는 사람들을 목매달아 죽이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그 작품에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잔인한 이들은 다른 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능력 즉 공감력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동의는 ‘동질성’(homogeneity)을 전제로 하지만 공감은 ‘이질성’(heterogeneity)을 전제로 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생활 방식이 다른 이들까지도 소중한 이웃으로 아우르려 할 때 평화가 다가옵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을 자기 방식대로 동질화시키려는 것은 폭력입니다. 잔인한 이들은 다른 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일을 꺼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자기 파괴입니다.

오세영 시인은 ‘그릇’이라는 시에서 “깨진 그릇은/칼날이 된다./무엇이나 깨진 것은/칼이 된다.’고 노래했습니다. 깨진 마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깨진 마음은 다른 이를 찔러 상처를 입히지만 더 자주 자기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남을 아프게 하려면 먼저 자기 마음을 뾰족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던가요? 잔인한 사람이 자기 몸을 해친다는 지혜자의 말은 이런 현실에 맞닿아 있습니다. 몸만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까지 상하게 합니다.

∙분별력 없는 열심
18절과 19절은 악인의 삯과 공의를 뿌린 자가 받는 상 혹은 운명을 다룹니다. 악인도 의인도 자기 일에 열심입니다. 우리는 복잡한 일에 연루되는 게 싫어서 자기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자아가 강하거나 자기 이익에 발밭은 사람들, 강고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이들은 참 열정적입니다. 그들이 목소리를 높이면 할 말이 있어도 입을 꾹 다무는 이들이 많습니다. 선한 이들의 침묵이야말로 악이 번성하는 조건이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편견과 무지에 찬 이들이 그릇된 확신에 차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이 많습니다. 그들은 참 부지런합니다. 세상에 간섭하지 않는 게 없습니다. 욥기의 서막에 나오는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어디를 갔다가 오는 길이냐?”고 물으시자 사탄은 “땅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오는 길입니다“(욥1:7) 하고 대답합니다. 사탄은 가지 않는 곳이 없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악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열심이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닙니다. 분별력이 없는 열심, 자기 욕망 충족을 최우선으로 삼는 열심은 남을 해칩니다. 히브리의 지혜자는 악인이 거두어들일 삯은 허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공의의 씨를 뿌린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생명입니다. 슬프고, 고통스럽고, 외롭기도 한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이익’이 아닌 ‘공의’를 생의 중심 가치로 삼고 사는 이들은 그런 부정적인 삶의 계기조차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가는 안내인으로 삼습니다. 때로는 길을 잃은 것처럼 답답할 때도 있지만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파커 J. 파머는 “하느님은 GPS처럼 임하시진 않지만, 제가 가장 어둔 곳을 더듬을 때 저와 동행합니다”(파커 파머,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김찬호·정하린 옮김, 글항아리, 2018, p.137)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GPS처럼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정확하게 일러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두운 곳에서 더듬더듬 진실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갑니다. 주님은 그 길에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이것이 공의를 생의 목표로 삼은 사람의 든든함입니다. 많은 이들이 생의 좌표를 잃고 헤맵니다. 실수와 혼란 속에서 방향을 잃고 헤맵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뭔가에 탐닉합니다. 그럴수록 허무와 죽음은 더욱 확고하게 그를 사로잡습니다. 이제 우리 생의 방향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향할 때입니다.

∙굽은 마음을 펴라
"주님은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미워하시지만,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은 기뻐하신다. 악인은 틀림없이 벌을 받지만, 의인의 자손은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20-21)

같은 이야기가 변주되고 있습니다.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도 처음부터 비뚤어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성 어거스틴은 우리 마음이 어떻게 죄의 종이 되는지를 기가 막히게 보여줍니다. "삿된 마음에서 육욕이 생기고, 육욕을 따르다 보면 버릇이 생기고, 버릇을 끊지 못하면 필연이 생기게 되는 것이옵니다."(<고백록. 최민순 번역, 제8권 4장) 삿된 마음은 제 이익에 발밭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따라 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에 습관이 생기고, 그 습관은 결국 고질병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자꾸 인색하게 쓰다 보면 다른 이들을 좋게 봐주지 못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더 큰 문제는 자기가 그렇다는 사실을 자기만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나이듦이 주는 선물 가운데 하나는 ‘내가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가‘ 하는 자각입니다. 부족함을 알기에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합니다. 물론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강고한 자아를 내려놓지 못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거칠고 험한 세상이지만 우리는 참 사람의 길을 가르쳐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인간의 등불이 되라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을 닮으려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투덜거리기보다는 작은 등불 하나 밝히는 마음으로 살면 좋겠습니다. 그때 우리의 굽은 마음도 조금씩 펴질 겁니다. 펴진 마음에 차오르는 것은 감사와 감격과 기쁨입니다. 마음이 펴지면 이웃들이 소중한 존재로 여겨집니다. 이 위기의 시대에 주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고치려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으로 오늘도 내일도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기쁨을 누리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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