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배울 일이 참 많습니다. 어떤 베스트셀러는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로버트 풀검)고 하지만, 육십에 들어서도 여전히 배우면서 삽니다. 대개 은퇴 후에 시간여유가 생기면 맨 처음 문화센터의 배울 거리를 찾는다고 합니다. 어르신들은 손주들이 유치원에 다니는 것처럼 날마다 동네 데이케어센터를 기웃거립니다. 평생 배움이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합니다.

  20년 전 쯤 독일 복흠한글학교에서 연 부모 강좌에 강사로 참여하였습니다. 그 동네 목사를 초청한 것인데 학부모의 한 사람이기도 했던 내가 전할 만한 가정의 ‘행복론’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강사의 뻔한 말을 인내심으로 듣던 학부모들은 이제 한계에 다다른 듯 했습니다. 진땀을 흘리며 몸 둘 바를 모르던 나는 분위기 반전을 위해 원고에도 없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것은 우리 집만의 놀이 ‘레벤 레아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따로 노는 두 독일어 단어를 억지로 조합하면 ‘인생(레벤) 배우다(레아넨)’입니다. 우리 집 두 아들과 잠들기 전에 하는 놀이인데 거실에 드러누워서 아빠가 하는 대로 아이들이 따라하는 것이 골자입니다. 두 녀석은 일곱 살이나 차이가 나서 셋이 눈높이를 맞추어 어울리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했기에, 새 놀이방식을 개발한 셈입니다.

  얼마나 즐거운지 아이들은 초저녁부터 아빠를 거실로 끌어냅니다. 아빠가 마루 위에 편하게 누워있으면 두 아이도 똑 같은 모습으로 눕습니다. 한 다리를 올리면 따라서 다리를 올리고, 학 모양으로 서 있으면 비틀비틀 학 모양을 흉내 냅니다. 노래를 부르면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장난기 섞어 말을 건네면 그대로 옮깁니다. 아빠는 아이들이 하고 싶은 말들을 따라하도록 요령을 부립니다. 한마디로 아빠가 아이들에게 몸으로 전하는 ‘부자유친’(父子有親)입니다.

  내 엉뚱한 놀이교육에 같은 한글학교에서 또래 자녀들을 키우는 젊은 부모들은 눈빛 가득히 호기심을 모았습니다. 졸린 ‘행복론’ 따위는 멀리 달아나 버렸습니다. 젊은 아내들은 팔꿈치로 슬며시 남편의 옆구리를 찔렀고, 나는 모른척하며 즐거워했습니다. 자녀교육에도 빈틈없이 ‘넛지’(Nudge)이론은 적용되었습니다. 강의는 놀라운 재미를 가져왔고, 후일담으로 집집마다 실제 응용론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두 아들은 이제 성년이 되어 더 이상 아빠 곁에 머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아빠의 곁에 눕는 일조차 어색해 합니다. 다 큰 아이들이 말이든, 몸짓이든 아빠를 그대로 흉내 내는 일은 어리석은 노릇입니다. 더 이상 아빠는 아이들의 교과서가 아니며 인생매뉴얼도 못됩니다. 한 때 베스트셀러 이상이던 아빠의 이야기는 아재개그로 전락한 지 오래입니다.

  이제 세상을 배울 일은 청년들이 아닌 늙은 아빠의 몫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똑똑하게 살려면 ‘레벤 레아넨’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아빠가 아들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항공권을 예약하는 방법이든,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면서 자막을 불러내는 방법이든, 요즘 애들이 쓰는 낯선 언어의 뜻을 묻기 위해 아이들의 말과 언어를 흉내 내는 일들입니다. 그것은 현대인으로 살기 위해 마땅히 배워야 할 아빠의 몫입니다.
 
  다시 거실에 서서 맨손 체조를 하고, 몸을 뒹굴 거리며,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물론 홀로입니다. 곁에서 어린 고양이 마루가 고요히 나를 지켜봅니다. 나는 20년 전 어린 아들의 말을 흉내 내 봅니다. 아이는 기지개를 켜면서 이렇게 오물거리며 잠이 들곤 했습니다. “오늘 참 잘 놀았다, 내일은 또 얼마나 재미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