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최재석 칼럼
히틀러 암살을 모의한 순교자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20년 04월 09일 (목) 13:23:55
최종편집 : 2020년 06월 14일 (일) 12:24:24 [조회수 : 1434]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교수합창단 단톡방에 60대로 보이는 노인이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하는 동영상이 올라왔다. 그 동영상 밑에는 작은 글씨로 ‘Dietrich Bonhoeffer’라고 쓰여 있었다. 한 단원이 그 동영상을 보고 자기는 본회퍼가 히틀러 암살을 모의했기 때문에 죄인으로 생각해 왔는데, 아주 인자하게 생긴 피아노 연주자를 보니 그가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한 것은 히틀러를 악마로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는 글을 올렸다.

동영상을 올린 단원이 자기는 본회퍼가 누군지 모르는데, 그 노래가 좋아서 동영상을 올렸다고했다. 그런데 그 동영상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는 60대의 노인은 39세로 세상을 떠난 본회퍼가 아니고, 그 노인이 부른 노래의 가사가 ‘선한 능력으로’라는 본회퍼의 시였다. 그런데 ‘Dietrich Bonhoeffer’라고 써놓았으니 노래하는 사람을 본회퍼로 오인할 만했다.

내가 그 두 사람의 대화를 읽으면서 눈에 띈 것은 그들처럼 교회의 중직자인 지식인들이 한 사람은 본회퍼를 전혀 모르고 다른 한 사람은 본회퍼를 살인에 가담한 죄인으로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둘째 번 사람은 아마도 목사나 선배로부터 본회퍼가 사람을 죽이려고 한 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범죄행위라고 들었던 모양이다.

복음주의 신앙을 표방하는 목사들은 대부분 본회퍼 같은 현대 신학자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런데 목사들 자신이 현대인일 뿐 아니라, 그들이 지도하는 교인들 모두 현대 사회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현대인의 언어로 말하는 현대 신학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특히 본회퍼의 신학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고통을 겪으며 혹은 죽어가면서 애타게 부르짖을 때 침묵한 하나님을 경험한 현대인들에게 호소력이 있다.

존 로빈슨이 1963년에 낸 『신에게 솔직히』가 베스트 셀러가 되었는데, 그 책은 본회퍼의 신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 책은 출판된 지 몇 달 만에 몇 십만 권이 팔렸으며 그 책이 출판된 1963년 한 해 동안에 9개 국어로 번역될 만큼 세계적인 관심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우리도 본회퍼의 신학에 관심을 가질 만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본회퍼가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행동한 신학자였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그는 그의 신학과 삶을 결합시킨 신학자였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상가나 작가의 경우 당사자의 삶이 그의 저작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특히 본회퍼의 경우 그의 삶이 그의 신학의 기반이었기 때문에, 그의 삶을 아는 것은 그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2015년 7월 <당당뉴스>에 올린 ‘암살 단에 가입한 목사’에서 내가 본회퍼의 신학과 그의 신학이 현대신학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했다. 그런데 이번 교수합창단의 단톡방에 올라온 대화를 읽고 나서, 순서가 바뀌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본회퍼가 왜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는지 그리고 그런 그가 어떻게 해서 순교자로 추앙되는지 그의 삶을 살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1906년에 독일의 명문가의 쌍둥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칼 본회퍼는 저명한 신경정신과 의사였으며 어머니 파울라는 예나대학 교회사 교수로 명성을 떨쳤던 칼 폰 하제의 증손녀였다.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21세에(1927) 신학박사 학위 논문을 쓰고 24세에(1930) 교수 자격을 취득한 가히 천재적인 신학자였다.

그는 루터교 목사였으며 에큐메니컬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평화주의자였다. 그런데 이 평화주의자를 투사로 만든 것은 히틀러의 집권과 2차 세계대전이었다. 히틀러가 1933년에 독일의 총통이 되자 아리안 종족주의를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반유대적 감정을 자극해서 그리스교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나치 정권은 본회퍼가 활동하던 에큐메니컬 운동을 금하고, ‘독일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어용단체를 조직해서 유대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본회퍼는 수용소에 억류되고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유대인들을 돕기 위해서 ‘독일 그리스도인들’에 대립하는 ‘고백교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특히 그의 주변에는 유대인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의 쌍둥이 누이의 남편이 유대인이었고, 본회퍼와 함께 교회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던 친구 힐데브란트 역시 유대인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유대인의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탄압이 부당하다는 것과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다가 한계에 부딪히자 1933년 10월 영국으로 건너가서 그곳의 독일인 교회를 맡아 사역했다. 이때 그는 간디의 비폭력 저항을 연구하기 위해서 인도로 갈 계획이었으나, 1935년 독일 고백교회로부터 신학교 설립을 위해 귀국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인도 여행을 포기했다. 이 신학교는 반정부적인 고백교회의 지도자 양성소였다. 그런데 1936년에 교육부장관이 본회퍼의 대학교수직을 박탈했고, 1937년에는 게슈타포가 들이닥쳐 신학교를 폐쇄했다.

1937년은 고백교회가 나치 정권에 맞설 수 없음이 분명해진 시점이었다. 본회퍼는 그동안 나치에 대한 저항은 반드시 비폭력적이어야 한다고 말했었고, 한동안 고백교회는 나치 정권에 당당하게 저항했다. 그런데 1937년에 나치 정권은 금지령, 체포 같은 방법으로 고백교회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결국 고백교회는 히틀러에게 충성하라는 나치 정권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신학교가 폐교되고 고백교회마저 무기력해진 지금 그에게는 더 이상 저항을 도모할 공동체가 남아 있지 않았고, 이제 비폭력 저항은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무고하게 학살당하는 유대인 형제들을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것뿐이었다.

1937년 독일 군정본부 법률 고문이었던 매형 한스 폰 도나니가 본회퍼에게 군사정보기관인 외국 첩보국에서 일할 것을 권했다. 당시 외국 첩보국은 정부에 맞서는 반란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거기서 본회퍼의 임무는 세계교회의 일원이라는 신분을 활용해서 영국의 벨 주교와 같은 외부 협력자들과 접선하고, 히틀러 암살 작전이 성공할 때 수립될 새 정부를 연합국이 적극적으로 지원하도록 그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1939년이 되자, 검은 전운이 지평선에 떠올랐다. 히틀러 군대는 3월 체코슬로바키아로 진군해 들어갔고 폴란드 공격도 단지 시간문제였다. 그의 영미 친구들은 그가 독일을 떠나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그는 7월에 군복무를 시작해야 했고, 친구들은 그가 군복무를 거부하리라는 것과 그러면 그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를 알고 있었다.

본회퍼가 상당 기간 독일을 떠나기 위해서 나치의 승낙을 얻으려면, 어떤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본회퍼가 미국에서 강의하도록 공식 초청장을 얻어주겠다고 제안했다. 결국 본회퍼는 라인홀드 니버와 폴 레만의 주선으로 유니온 신학교에서 강의하기 위해 1939년 6월 4일 독일을 출발해서 12일에 뉴욕에 도착했다.

그러나 출발부터 고통받는 형제들을 외면하고 미국에서 안전과 평안을 누린다는 것이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뉴욕에 도착하자 미국기독교위원회로부터 뉴욕시에 있는 독일 난민들을 위한 교회의 목사로 일해 줄 것을 제안받았지만, 그는 독일의 상황이 악화될 경우 독일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곧 그는 고국으로부터 9월이면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소식을 받고 미국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때 그는 니버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는 미국에 온 것이 실수였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우리 민족의 역사 중 이 어려운 시기에 독일의 형제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이 시련을 저들과 함께 나누지 못한다면 전후 독일의 기독교 삶의 재건에 참여할 권한이 없게 됩니다.”

그는 평안하게 살 수 있는 미국 생활을 포기하고, 고난받는 그의 형제들을 돕기 위해서 7월 7일 독일 배에 승선했고 7월 25일 독일에 도착했다. 독일에 돌아온 이유에 대해서 그는 “독일 사람이며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통의 땅 독일을 떠나는 때에, 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독일로 돌아간 그리스도인이었다.

1940년 여름 본회퍼는 한스 폰 도나니의 배려로 군정부의 민간인 정보 요원으로 채용되어 뮌헨 사무소에 배속되었다. 거기서 그는 지하 저항 세력의 히틀러 암살 계획에 적극 가담하기 시작했다. 그는 히틀러를 적그리스도로 보았고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의 결의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사람들로 가득 찬 거리에서 자동차를 몰아대는 미치광이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도 나의 할 일이지만, 내 모든 힘을 다해 운전 그 자체를 멈추게 하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이다.”

1941년 2월 본회퍼는 유대인들을 정보국 첩보원으로 위장하여 스위스로 피신시켰다. 같은 해 9월에 그는 제네바로 가서 세계교회협의회 총무 비서트 후프트와 회담했다. 본회퍼의 주요 임무는 연합국으로 하여금 독일에서의 저항운동을 강화할 수 있는 현실적인 조건을 제공해주도록 촉구하는 일이었다.

1942년 5월 31일에는 영국 공보성의 요청으로 스웨덴을 방문 중이던 치체스터 주교와 회담하기 위해서 스웨덴으로 날아갔다. 그는 치체스터 주교에게 히틀러와 나치 정권을 전복시킬 광범위한 계획과 주요 공모자들의 이름을 밝히면서, 이와 같은 정보를 영국 정부의 해당 기관에 전해줄 것과 그 혁명이 성공할 경우 연합국들이 합리적인 평화 정착을 협상할 것인지 여부를 즉각 회신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본회퍼가 가담한 히틀러 암살단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서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다. 1943년 3월 13일 히틀러가 탄 비행기에 시한폭탄을 장치했지만 그 폭탄이 작동하지 않았다. 같은 해 3월 21일에는 히틀러가 베를린의 무기 박물관에서 열리는 전리품 전시회에 참석하는 틈을 타서 폰 게르스도르프가 몸에 폭발물을 품고 그 장소에 잠입했다. 그런데 히틀러가 예정과 달리 5분 만에 전시회장을 떠나는 바람에 그는 히틀러에게 접근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1943년 4월 5일 도나니가 체포된 지 몇 시간 후, 본회퍼는 유대인들을 스위스로 도피시키는 일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테겔 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2년 여 동안 형무소와 수용소를 옮겨 다니며 고문을 당한 끝에 1945년 4월 9일 새벽, 동료들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때 본회퍼의 나이 39세였다. 그런데 그가 처형당한 지 2주 후, 미군이 그가 수감되어 있던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방면했다. 그리고 그 1주 후에 히틀러가 자살했다. 그가 애석하게도 이렇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의 신학이 활짝 꽃피우지는 못했지만, 그의 천재적인 신학적 발상은 홀로코스트 이후의 신학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저서에는 『나를 따르라』(1937), 『신도의 공동생활』(1939), 『윤리학』(1940), 그의 사후에 나온 『옥중 서신』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책은 『나를 따르라』이다. 본회퍼가 평안한 삶이 보장되는 미국 생활을 버리고 독일에 돌아와서 자기 동족과 유대인들을 위해서 일하다가 나치에 의해 교수형을 당한 것은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이었다.

본회퍼가 루터교회에서 자랐고 루터교회의 목사였지만, 그는 독일교회가 종교개혁의 표어인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아무런 노력이 수반되지 않는 믿음은 값싼 은혜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믿는 자는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것을 말한다.

한 마디로, 그는 행동하는 신학자였다.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비그리스도인들도 그의 삶과 사상의 결합에 매력을 느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과 행위가 일치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그의 삶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나치 치하에서 박해받고 있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교회가 침묵할 때, 유대인을 위하여 소리치는 자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다.

히틀러 암살을 모의한 사람을 순교자라고 부르는 것은 모순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본회퍼가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고 해서 살인이라는 미시적 윤리의 틀에서 그의 삶을 평가해선 안 된다. 그가 히틀러를 제거하려고 한 것은 히틀러의 손에 죽어가는 수백만 명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건 일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간,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었다.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서 나치 정권에 저항하다가 교수형을 당한 이 신학자의 자기 희생적인 죽음은 가히 순교적이다. 그의 친구였던 라인홀드 니버는 그를 순교자라고 부르면서 본회퍼의 삶을 ‘현대의 사도행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본회퍼를 20세기 순교자 10인 중의 하나로 뽑았고,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서쪽 입구에 그의 석상을 세웠다.

최재석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247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1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24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