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원로가 되었지만 다른 교단에 속한 어느 목사님이 문득 내게 물었다. “송 목사님은 감리교에서 어떤 위치입니까?” 5년 전 사순절에 강남에 있는 서초성결교회 갤러리에서 십자가전시회를 연 이후 종종 만나는 친밀한 사이가 되었기에 스스럼없는 질문이었다. 나름 고심한 이유는 그 분이 자기 교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염두에 둔 까닭이었다. 

  “나는 감리교회를 대표합니다.” 주저한 끝에 대답은 했지만, 제대로 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사실 내가 담임하는 색동교회를 대표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그렇다고 교단을 대표할 입장은 못 되기 때문이다. 다만 타 교단 목회자와 나눈 대화이니 만큼 그런 당당함으로 내 입장을 대변하고 싶었다.

  실은 무엇을 대표한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적인 일이어야 한다. 평신도와 마주할 때 목사 입장을 대표하고, 에큐메니칼 친구들 앞에서 감리교회의 정체성을 대표해야한다. 두 아들에게는 아버지를, 젊은 세대 앞에서는 기성세대를, 여성과 마주할 때 남성을 그리고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을 대할 때 그리스도인을 대표한다. 북한을 방문했을 때에는 남한 사람을 대표하여 자유롭게 행동하려고 애썼다.

  영화 ‘두 교황’에서 앤서니 홉킨스가 분(扮)하여 다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직전 교황 베네딕트 16세와 잠시 마주한 일이 있다. 2007년 에큐메니칼 순례여행 중 로마를 방문했다가 교황이 집례하는 목요강론 직후에 일어난 일이다. 명색이 한국의 세 그리스도교 교회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교황이 맨 앞 열에 앉은 한국대표단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자 인솔하던 대주교는 우리 일행 중 유독 나를 가리켜 이렇게 소개하였다. “메토디스트입니다.”

  갑작스러운 대면은 그야말로 번개 치듯 지나갔지만, 여운은 오래 남았다. 교황청 앞 사진점에서 어렵게 구한 커다란 기념사진 때문이 아니다. 교황에게 나를 가리켜 말한 그 단어 ‘메토디스트’는 두고두고 메토디스트란 정체성을 두고 고민하게 하였다. 나는 그 순간 메토디스트란 자의식의 세례를 받았다. 가톨릭교회의 수장 앞에서 메토디스트를 대표한 결과였다.    

  무엇을 대표한다는 것은 직함이나 자격 때문이 아닐 것이다. 신분은 그럴싸해도 그만한 역할을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많은 경우는 대표라는 거북한 자리를 피해 익명성의 숲에 모습을 감춘다. 어떤 경우는 자신을 무분별한 대표의 반열에 두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종종 대표성의 과잉은 낯 뜨겁다. 이와 반대로 스스로 과소평가하는 것은 얼마나 무책임한가? 김학순 할머니는 종군위안부의 희생과 용기를 대표한 인물이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국민의 의분과 정의를 대표하였다. 남다른 대표성이 역사를 바꾸고, 과감한 역사의식이 국가의 위상을 높였다.

  요즘 코로나19의 확산 때문에 세계 온 나라는 큰 위협과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중국 우한과 가까이 있는 탓에 일찍 매를 맞은 대한민국은 의외의 선전과 역량으로 전 세계의 찬사를 받고 있는 중이다. 단순한 미담이나 덕담 수준이 아니라 마치 대한민국이 인류를 대표하여 바이러스와 상대하는 세계대표선수처럼 위치가 격상되었다. 그런 불편한 대표성은 과분하지만, 그렇다고 과잉은 아닌 듯하다. 경기도에서 낸 라디오광고의 한 대목처럼 “우리 민족에게는 국난극복의 DNA가 있다”말도 과장스럽지 않다.

  지금은 기성세대가 된 우리 또래는 한동안 국가에 대해 별로 자랑스러운 믿음을 지니지 못하고 살았다.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정부마다 인위적인 국풍(國風)을 조장하고, 과도한 국가주의를 부추겼지만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은 밑바닥을 칠만큼 결핍되었다. 어쩌면 자존감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국수주의의 함정에 빠질까 염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세대가 지금은 ‘국뽕’ 수준의 자기 자랑을 하고 있으니 세태의 변화가 놀랍다.

  평생 ‘조국이 내게 무엇을 해 주었나’라고 푸념하던 해외동포들은 더욱 자부심이 커졌다. 그들만큼 대한민국의 존재감을 가까이에서 밀접하게 느낀 국제인도 없을 것이다. 그들의 의식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더 이상 열등의식이 아니다. 우월감과 자긍심은 국가주의의 과잉이라는 우려조차 반갑기만 하다.

  1990년대 독일에서 목회하던 시절, 복흠교회 교인들은 국내에서 종종 발표되는 ‘시국에 관한 목회자 1000인 선언’과 같은 문서에서 담임목사의 이름이 빠지면 몹시 서운해 하였다. 독립선언서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닌 시류성 문서였으나, 목사의 이름만 올려있어도 자부심을 느끼고는 하였다. 돌아보면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런 까닭에 국가는 국가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대로 그리고 목사는 목사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대표노릇을 잘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