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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부축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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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3월 15일 (일) 15:17:57 [조회수 :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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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부축하는 사람들
레25:35-38
(2020/03/15, 사순절 제3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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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 동족 가운데, 아주 가난해서, 도저히 자기 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너희의 곁에 살면, 너희는 그를 돌보아 주어야 한다. 너희는 그를, 나그네나 임시 거주자처럼, 너희와 함께 살도록 하여야 한다. 그에게서는 이자를 받아도 안 되고, 어떤 이익을 남기려고 해서도 안 된다. 너희가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안다면, 너희의 동족을 너희의 곁에 데리고 함께 살아야 한다. 너희는 그런 사람에게, 이자를 받을 목적으로 돈을 꾸어 주거나, 이익을 볼 셈으로 먹거리를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고,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나는 외로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늘 드리는 인사말이지만 시절이 시절인 만큼 그 의미가 각별하게 다가옵니다. 주중에 바울 서신의 인사말을 찾아 몇 번씩 반복하여 읽었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인사말이 제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문안드립니다. 또 각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도 아울러 문안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사람들의 주님이시며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고전1:2-3)

저는 정말 이런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용어가 이제는 익숙해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교우 김용찬 집사님이 한겨레신문 칼럼에서 제안한 용어인 ‘잠시 서로 떨어져 있기’를 용어가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왠지 차가운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부득이 떨어져 지내야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from socially distancing to spiritually connecting) 잊지 말아야 합니다. 들리진 않지만 제가 여기서 ‘여’ 하고 부르면 여러분들도 ‘여’ 하고 응답하시겠지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이 별 저 별 여행을 하다가 지구에 도착했습니다. 그의 앞에 높은 산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산에 올라가면 별 전체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높은 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바늘 끝처럼 뾰족한 바위산들뿐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무작정 인사를 했습니다. “안녕”. 그러자 메아리가 대답했습니다. “안녕......안녕......안녕......” “너희들 누구니?” 메아리가 대답했습니다. “너희들 누구니......너희들 누구니......너희들 누구니.....” “내 친구들이 되어줘, 나는 외로워.” 메아리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외로워......나는 외로워”. 어린왕자는 참 이상한 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남의 말을 반복만 하니 말입니다. 그는 늘 먼저 말을 걸어주곤 하던 꽃 한 송이가 있는 자기 별이 그리웠습니다.

손택수 시인은 ‘먼 곳이 있는 사람’이라는 시에서 “걷는 사람은 먼 곳이 있는 사람/잃어버린 먼 곳을 다시 찾아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걷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우리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라는 중심을 향해 걸어갈수록 우리 사이의 거리도 좁혀질 겁니다. 하나님과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거룩한 삶으로의 초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거룩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거룩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도쉬qadowsh는 ‘신성하다‘, ‘구별되다‘라는 뜻입니다. 신성하여 하나님이 받으실만하다는 뜻인 동시에 세상의 가치관과 다르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끝없이 우리를 경쟁으로 내몹니다. 경쟁이 삶의 원리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승자와 패자가 갈립니다. 그러나 거룩하다는 말은 그런 세상의 가치관에 맞서며 사는 것입니다. 경쟁보다는 협동, 독점보다는 나눔, 지배보다는 섬김, 무시보다는 존중, 낭비보다는 아낌을 지향하는 삶이 거룩한 삶입니다.

신학자들은 레위기 17장부터 26장까지를 성결법전(Code of Holiness)이라 부릅니다. 그곳에는 거룩한 백성들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법전의 핵심은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19:2)는 구절입니다. 그 거룩한 삶은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레19:18)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회적인 약자들을 억울하게 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웃 사랑이 사회 제도 속에서 구현된 것이 바로 안식년과 희년입니다. 안식년에는 사람은 물론 땅도 쉬어야 했습니다. 땅을 쉬게 할 때 하나님은 자유민들은 물론이고 남종과 여종, 품꾼과 나그네들에게도 먹거리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십 년이 시작되는 해에는 전국의 모든 거민에게 자유가 선포되었습니다. 부득이 남의집살이를 하던 이들은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 자유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삶은 개인 윤리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현되어야 할 목표이기도 한 것입니다. 감리교회는 개인적 성화와 더불어 사회적 성화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소외됨이 없는 세상, 저마다의 삶의 몫을 온전히 누리는 세상을 이루라고 명하십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합니다. 무한경쟁, 소득의 양극화로 인해 세상은 차갑고 냉랭하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우리 문명을 다시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원주에 살고 있는 제 선배 목사님은 자기 집 대문 위에 ‘불편당不便堂’이라는 택호를 붙여놓았습니다. 한옥집 기둥에는 ‘다소 불편하지만 제법 행복합니다‘라는 주련도 걸어놓았습니다. 불편하게 살기로 작정하면 결핍에 대한 비애도 줄어드는 법입니다. 풍요로움과 편리함 중독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이웃들에게 눈길을 줄 수 있습니다. 그들을 맞이할 수 있고, 그들 곁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사랑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어야 합니다.

성결법전은 현실을 무시한 채 이상적인 이야기만 늘어놓는 책이 아닙니다. 현실은 늘 불완전하고 또 개선되어야 할 점이 많지만, 현실을 급격하게 변화시키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다 때가 있습니다.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은 평등 공동체의 꿈을 품고 탄생했지만, 정착생활은 결국 계층질서를 만들 수밖에 없음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현실을 송두리째 부정하기보다는 좋은 방향으로 이끌려 하십니다. 그래서 신신당부하십니다. 가난에 몰리다가 종으로 전락한 이들을 “고되게 부려서는 안 된다”(레25:43, 46), “그 종을 심하게 부려서는 안 된다”(레25:53). 하나님은 그들의 신음소리를 당신을 향한 탄원으로 들으십니다. 오늘 본문도 같은 취지의 말씀입니다.

“너희 동족 가운데, 아주 가난해서, 도저히 자기 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너희의 곁에 살면, 너희는 그를 돌보아 주어야 한다. 너희는 그를, 나그네나 임시 거주자처럼, 너희와 함께 살도록 하여야 한다”(레25:35)

‘곁에’와 ‘함께‘라는 단어를 무심히 보아 넘기면 안 됩니다. 거룩한 삶이란 곁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허용할 뿐 아니라 그들을 함께 살아야 할 소중한 이들로 여기는 것입니다. 필요할 때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지탱하고 설 수 있는 땅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곁에 머무시는 하나님
델리아 오언스의 장편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인종차별과 빈부격차가 극심했던 196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카야는 6살 때 홀로 버려졌습니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엄마와 오빠가 서둘러 지옥 같은 집을 탈출하고, 술주정뱅이인 아빠는 카야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살던 곳은 마을 사람들에게조차 천대받던 습지였습니다. 범죄자들, 마약꾼들이 흘러 들어와 살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카야는 살기 위해 홍합과 굴을 채취하여 팔아야 했습니다. 그가 물건을 가져올 때마다 필요하지 않은 데도 그것을 다 받아준 이들이 있었습니다. 마을과 습지의 경계에서 가게를 하던 점핑이라는 흑인이었습니다. 그는 카야에게 먹을 것도 주고, 옷도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카야의 보이지 않는 품과 설 땅이 되어주었습니다. 그 한 사람 덕분에 카야는 절망의 심연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점핑은 소설에서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아닐지 모르겠지만 제게는 그 점핑이 마치 어두운 밤하늘의 영롱한 별처럼 느껴졌습니다.

지금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내는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적대감이 만연한 우리 시대는 서로 따뜻하게 맞아들이며 살라는 주님의 뜻을 저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몇 번 말씀 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6년, p.192)입니다. 이 마음을 잃을 때 인간은 추하게 변합니다. 자기만의 기준으로 어떤 사람들을 열등한 것으로 범주화하고 멸시하는 이들은 실은 자기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타락한 존재인지 알지 못합니다. 냉혹한 세상은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밀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결법전은 놀라운 말씀을 전해줍니다.

“너희가 사는 곳에서 나도 같이 살겠다. 나는 너희를 싫어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 사이에서 거닐겠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레26:11-12)

우리가 서로 아끼고 사랑할 때, 다른 이들이 우리 곁에서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곁을 내줄 때, 하나님도 우리 가운데 머무십니다. ‘하나님이 거니시는 땅‘, 얼마나 아름다운 비전입니까? 우리는 우리 곁에 와서 머물고 또 거니셨던 분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요한복음은 그 놀라운 진실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요1:14)

바울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현존을 세상에 드러내라는 소명 앞에 서있습니다. 바울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고전3:16)라고 말합니다. 점핑 부부가 카야에게 보여준 것은 사람됨의 아름다움입니다.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등불을 밝혀든 사람들
며칠 전에 김종현이라는 칼럼니스트가 투데이신문에 쓴 글을 읽었습니다. 제목은 ‘숙주가 되지 않는 법’이었습니다. 코로나19가 창궐하는 시대에 우리가 그 바이러스의 숙주가 되어 다른 이들을 감염시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러주는 글이었습니다. 글의 마지막 대목을 길지만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인천에 사는 한 70대 노인은 대구에 전해달라며 응원의 손편지와 돈봉투를 남기고 사라졌다. 포항의 한 건물주는 자신의 건물을 의료시설로 무상제공 했다. 고양시 일산의 한 청소년 남매는 저소득층 감염 예방에 사용해 달라며 40만1000원을 기탁했다. 대구의 한 의류 쇼핑몰 직원들은 땀에 젖은 의료진 사진을 보고 면 티셔츠 500장을 기부했다. 한 배우는 대구로 달려가 트럭 위에서 마스크 1만2000개를 나눠주며 힘내라는 응원을 했는데 이 사실은 SNS를 통해 며칠 뒤에야 언론에 알려졌다. 인천 한의사회는 비상근무중인 공무원들의 건강을 위해 인천시에 보약 50박스를 전달했다. 대한항공 일반직 노동조합은 절체절명의 혼란을 겪던 우한 교민 긴급수송 업무에 감염우려를 무릅쓰고 자원했다. 장애인 봉사 활동가 정지원씨는 자가격리된 장애인을 돌보기 위해 2주 동안 함께 살며 약과 식사를 챙기는 일에 자원했다. 이창수씨는 코로나바이러스보다 혼자 격리된 생활이 더 위험할 수 있다며 확진 판정이 난 장애인 돌봄에 자원했다. 대구지역 감염이 확산돼 의료인 모집을 한지 나흘만에 전국에서 간호사 247명, 의사 58명 등 850여명의 의료인들이 자원했다. 여의도의 한 상가 소유주들이, 인천지역 전통시장 건물주들이, 경북대 인근 건물주가, 묵호시장 상인회가 여러 달에 걸쳐 10~50%에 이르는 임대료를 자발적으로 인하했다. 대구 지역 한 식당은 직원들이 휴무까지 반납해가며 의료진에게 매일 150인분의 도시락을 나눠준다.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식당에 3만원, 5만원씩 소액의 후원금과 쌀 등을 보내고 있다.“

이분들뿐이겠습니까? 정말 이 난감한 시기에 인간의 등불을 밝혀드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이상한 사람들도 많지만 좋은 사람이 더 많다고 믿고 싶습니다. 힘겨운 이들을 곁부축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드리는 거룩한 예배입니다. 우리도 지난 주 중에 교우 여러분들이 보내오신 헌금을 가장 필요한 곳에 우선적으로 보냈습니다만, 이런 일은 더욱 확장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이용해서 자기 뱃속을 채우려는 것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위기의 시대야말로 우리 사랑이 진실한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우리 교우들이 머무는 곳 어디에서나, 아름다운 환대와 사랑의 향기가 넘쳐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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