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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의 “찬미가”(1892년)는 한국의 첫 찬송가
노종해  |  ro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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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3월 12일 (목) 22:43:00
최종편집 : 2020년 03월 18일 (수) 10:02:27 [조회수 : 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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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의 “찬미가”(1892년)는 한국의 첫 찬송가

-“한국인들의 심성에서 솟구쳐 오르는 가락으로 찬송할 수 있어야”-

 노 종 해(CM리서치)

 

   
▲ 필사본 찬미가(1892년)-사진출처:한국기독교박물관

 

     한국 기독교의 첫 찬송가(讚頌歌)는 감리교에서 1892년 발행 된 “찬미가”로 조원시(趙元時.George H. Jones.1867-1919)와 로드와일러(Louise C. Rothweiler.1853-1921) 선교사가 편집한 필사본(筆寫本) 찬송가이다. 이 “찬미가”는 “미감리회년환회” 발행으로 순 한글로 악보 없이 당지(唐紙) 39매(枚)에 30곡으로 수록된 찬송가이며, 초기 선교 착수 때부터 교회와 학교, 병원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모임에서 불러진 찬송이었다. 두 번째 찬송가는 장로교의 언더우드(H.G. Underwood)의 “찬양가”로 1893년에 발행 되었다.

     한국에 온 초기선교사들은 열정적으로 찬송 부르기를 즐거워하였다. 또한 이들은 새롭고 낮 설은 한국문화에 접할 때 두려움을 극복하고 믿음을 북돋는 길은 찬송하는 것이었다. 찬송과 기도와 성경은 예배의 중요한 요소로써, 복음 선교는 기도와 함께 찬송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조원시 선교사와 로드와일러 선교사

 

     아펜젤러의 1887년 부활주일(4월10일)이 지난 다음날 4월 11일(월)자 “일기”에 보면 찬송과 말씀증거 모습이 기록 되어있다. 여기에서 이미 예배와 기도회 모임 때 회중이 함께 부를 뿐만 아니라 특별 찬송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가대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경건하게 불렀다. 나는 '어떤 자가 묻는다,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삽니까?'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본문은 고린도 전서 15장35절이었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설교였다. 요점은 우리가 무덤에 묻힌 그 몸 그대로, 그 부분 하나가 다시 산다는 것이다.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리는 전달했다.”(참조-아펜젤러 1887년 4월11일 일기.)

      한국인들의 은밀한 예배에서 공개하여 예배드리기 시작한 1887년도에는 한글 성경번역이 시작 되었고, 예배 때 설교도 한국에로 설교하기 시작 하였으며, 찬송도 힘차고 아름답게 불렀다. 이러한 사실은 아펜젤러 “일기”(Diaries)를 보면, 1887년 성탄절(12월25일) 예배에 “예식서”를 사용하였고 “첫 한국어로 설교하였다”하였으며, 예배순서에 찬송이 2번 들어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즉

     “교회는 만원이었고 예식서에 따라 예배를 드렸는데 길모어가 사회를 보았다. 설교는 매우 짧았으나 핵심적이었다.

오후 2시 첫 한국어 설교를 하였다. 큰 사건이었으므로 설명을 해야겠다. 내기 직접 쓴 것 을 아니고 권서인 최씨(최성균)에게 내 생각을 말하면 그가 한극어로 옮겼다. 그렇게 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한국어 설교한 것이 몹시 기쁘다. 본문은 마테복음1장21절로,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였다.

물론 설교문을 그대로 읽었지만 영적인 의미를 최대한 살렸다. 예배는 다음과 같은 순으로 진행되었다.

1. 세례(김명옥), 2.찬송, 3.스크랜튼 박사의 기도, 4. 마태목음2장 낭독, 5.누가복음 낭독(스크랜튼), 6.설교, 7. 주기도문, 8.“하나님께 더 가까이”, 9. 축도.“(아펜젤러의 “Diaries”, 1887년12월25일.)

실제로 선교초기부터 선교학교인 배재(培栽學堂), 이화(梨花學堂), 구세학당(救世學堂) 등에서 영어를 가르칠 때 성경말씀과 찬송을 가르쳐 왔고, 선교 병원(病院)에서 선교사를 돕는 한국인들과 환자들에게 찬송을 불러주며 가르쳐 주었다.

특히 메리 스크랜튼(M.F. Scranton) 선교사는 1885년 여성해외선교회(WFMS) 보고서에서, “올갠”(Organ)을 요청하였고, 그의 첫 학생들에게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 일세” 같은 찬송을 가르쳤다.(M.F. 스크랜튼의 Annual Report of the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C.)

 

   
▲ 필사본 찬미가(1892년)-사진출처:한국기독교박물관

 

    한국 기독교는 1887년 이후 평양, 인천 등지에 선교를 확장해 나갔고, 1890년에 들어서서 전국으로 개척해 나가면서 예배 및 집회, 모임에 사용 될 찬송가의 필요성을 절감케 되었다. 또한 복음전파를 위해 한글 찬송이 필요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개별적으로 영어 찬송을 한글로 번역해서 사용하였지만 한글로 찬송시(讚頌詩)를 번역하였지만 한글 뿐 아니라 한국인들의 심정과 문화를 이해치 않고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때에 음악을 전공한 마가렛 벤겔(Miss Margaret Bengal) 양이 1890년 선교사로 내한하여 이화학당에서 1891년부터 성악(聲樂)과 올갠(Organ)을 가르치기 시작 하였고, 인천 영화학교 개척설립하고 교사로도 교육전도 하였다. 이때 이화학당에는 한국인 최초 여교사(女敎師)이며 전도부인(傳道婦人)인 이경숙 선생이 1889년4월부터 한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조원시 선교사는 1887년 20세 때 내한한 선교사로써 배재학당에서 가르며 전국을 다니며 순행 전도하였고, 특히 제물포지방을 개척전도한 분이다. 벤겔 선교사는 제물포에서 1892년 조원시(G.H. Jones) 선교사와 교제하였고 결혼하였다.

     조원시 선교사와 로드와일러, 벵겔 선교사는 최병헌(崔炳憲) 선생과 이경숙 선생 등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영어 찬송 30여곡을 선택하여 한글로 번역하였고, 1892년 최초 찬송가인 “찬미가”를 감리교 출판사(삼문출판사)에서 발행한 것이다. “찬미가”는 배재학당장인 조원시와 이화학당장인 로드와일러의 공동편집으로 발행되었다.

 

   
▲ 찬미가 표지와 목록(1895년)-사진출처:한국교화역사자료관

 

     한국 최초 찬송가인 “찬미가”는 그 서문(序文)에서 “한국인들의 심성에서 솟구쳐 오르는 가락으로 찬송할 수 있도록 한국인 찬송가 작곡 작사가들이 나와야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번역 된 찬송시(讚頌詩)의 표현에서 불완전성을 절감하였기 때문이다. 찬송만큼은 “한국 백성들 틈에서 그들 마음 그대로 솟구치는 가락”으로 노래할 수 있어야 함을 깨달은 것이다. 이점은 오늘날 한국 기독교에서도 눈여겨보고 유의해야할 점이다.

     “찬미가”는 1892년 최초 한글 찬송가로 발행 된 이후 중판하였고, 개정 증보를 거듭하여, “찬미가” 제3편은 81곡 수록(1895년), 제4편은 90곡 수록(1897년), 제5편은 176곡 수록(1899년), 제6편은 205곡(1902년)을 수록하였다.

     오늘 우리는 첫 “찬미가”의 서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인 마음에서 솟구치는 가락”으로 작곡 작사된 진정한 ”한국 찬송가“는 이제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이루어야할 과제이다.(rch)

 

   
 
   
 
   
 
   
 

<찬미가목록과 가사(1895년)>

   

   
▲ 오늘날 한국교회의 회중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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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웅석 (218.153.165.20)
2020-03-13 05:31:18
2020-03-13 금요일 = 경월


[ 기독교대한감리회 (목사)가 기독교대한감리회 (성도)를 형사고발.!!! ]



1. 안산상록경찰서 사이버수사대에서 '업무방해부분', '명예훼손', '모욕'으로 조사 받으라고 통보 왔다.


2. 안산상록경찰서로 조사 받기 힘들면 송파경찰서로 직접가서 최*대조사관이 조사 하겠다고 했다.


3. 안산상록경찰서 최*대조사관에게 1)범죄장소 관할 2) 피고소인 관할에서 조사 받을 권리가 있다고 반박했다.


4. 안산상록경찰서 최*대조사관은 '업무방해부분'이 있어 송파경찰서로 이송이 안된다고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경찰서에서 근무하신 분 위 내용이 맞는지 확인 부탁.)


5. 최*대조사관에게 전화해서 안산청문조사실에 기피선청서를 제출하여 송파로 이송 하겠다고


6. 고발자와 사건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하니, 고발자는 가르쳐 줄 수 없고, 사건번호(2020-000880)만 가르쳐 줬다.(경찰서에서 근무하신 분 위 내용이 맞는지 확인 부탁.)


7. 안산상록경찰 최*대조사관에게 그런데 사건번호가 있는데 왜 '법무부 형사사법포털 사이트'에 사건이 등록 안되어 있냐고 물으니 어떻게 절차를 그렇게 잘아냐고 물었다.(경찰서에서 근무하신 분 위 내용이 맞는지 확인 부탁.)


8. 몇분 후 안산상록경찰서 최*대조사관이 전화가 와서 '기피신청서'를 제출도 안 했는데, 송파경찰서로 사건을 이송하겠다고 통보가 왔다.(경찰서에서 근무하신 분 위 내용이 맞는지 확인 부탁.)


9. 사건 이송이 몇주 걸린다고 한다.


10. 무고죄, 직무유기, 직권남용으로 고발하고, 조사에 맞대응 하겠다.


11. 녹음파일을 가지고 있다.


12. 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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