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4호선 지하철이 한산했던 지난 주중, 신촌으로 나들이를 갔다. 올 봄에 발간해야 할 책의 편집의무 때문이었다. 독일에서 나그네의 삶을 마치고 2018년 12월에 소천한 고(故) 이영빈 목사님을 기억하는 책이다.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최병천 장로(신앙과지성사)가 용기를 주었다. 돌아보니 언제 준비된 돈을 가지고 일했던가, 싶었다.

  하긴 1994년 4월, 한국사회에 그를 소개한 첫 책 <통일과 기독교>는 그야말로 믿음으로 준비한 것이었다. 남북이 공동으로 합의한 한반도 희년을 앞두고 귀국이 엄금된 재독 통일운동가 이영빈-김순환 부부를 초대하면서 고난모임이 기획하였다. 무려 600쪽에 가까운 책의 출판사는 딱 한 권의 책을 내고 출판등록을 반납한 ‘도서출판 고난함께’였다. 겨우 30대에 불과했던 우리는 그런 믿음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영빈 목사님의 진가는 자서전 <경계선>에서 잘 드러난다. 이 책은 신앙과지성사에서 1996년 11월 23일자로 출판하였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출판기념회를 한 날과 같은 날이었다. 하마터면 빠듯한 일정 때문에 정작 주인공도 없이 기념식을 할 뻔 했던 기억이 난다. 파울게하르트교회에 재독 동포와 독일인 교우들이 가득 모였는데, 그 가운데 베를린에서 온 북한대사도 있었다. 행사 진행 중 프랑크푸르트 썬여행사의 선경석 사장이 그날 저녁 대한한공을 통해 날아온 책 세 권을 겨우 전달해 주었다.

  <경계선>은 2005년 8월, 두 장(章)을 추가해 10년 만에 증보판을 냈다. 두 분의 역사적인 귀국에 맞추어서 김순환 선생의 이야기를 보완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두 분은 이 책을 통해 독일시민으로 사는 4남매와 여러 손자손녀에게 조상의 이야기를 전해주길 원했으나 언어의 장벽이 너무 높았다. 2014년 6월에 이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다시 출판한 배경이다. 독일어판 경계선인 <Grenzgaenger>는 그가 17년 동안 목회했던 헤쎈 나사우 주(州) 교회가 출판비를 후원하였다.

  이영빈 목사님은 비록 이승의 경계선을 떠났지만, 아직 우리에게 미련을 남겨주었다. 생전에 그는 칼 바르트, 한스 요아킴 이반트, 헬무트 골비처 교수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들려주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그가 감리교신학대학교 동기생들과 함께 칼 바르트의 <복음과 율법>을 번역했다니 놀랍다. 번역한 이유는 당시 우리나라 신학적 풍토가 매우 심각하여 그 길을 찾으려는 모색이었다고 하였다(91세를 맞아 독일어로 낸 감사문서 중).

  2007년 가을, 이 목사님은 1950년 3월 김룡(金龍)출판사에서 낸 한자투성이의 <福音과 律法>(카-ㄹ · 빨트 著) 사본을 국제우편물로 보내면서 재출판을 하길 소원했는데, 한동안 이를 잊고 지낸 것이다. 게다가 헬무트 골비처가 쓴 <개신교 신학입문>도 대기 중이었다. 이 작업은 일찍이 이영빈 목사가 번역하고, 손규태 교수가 감수한 것이었다. 이미 급격히 변한 한국적 신학 풍토는 아무런 염두를 두지 않음에도, 한평생 칼 바르트와 골비처를 한국에 소개하려는 그들의 목마름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고(故) 이영빈 목사를 진정으로 추모하는 길은 그의 생애를 회고하는 것이 의미가 있겠으나, 오히려 자신의 길을 모색하면서 빛으로 삼았던 세계 신학의 두 거장이 쓴 역작을 소개하는 일도 가치가 있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두 편의 육필 번역글과 함께 이영빈 목사의 마지막 작품인 ‘91세를 맞이하여 독일사회에 낸 감사문서’(Mein Dankes Wort)를 번역하여 묶기로 하였다.

  그야말로 <복음과 율법>은 역사적인 작품이다. 공동번역자 세 사람은 아직 20대 청년이었을 신학도 허혁, 이영빈, 박순경이었다. 그들은 해방 이후 낯선, 위험한 세상에서 길을 찾던 젊은이들이었다. 시대의 길을 모색하고, 신학의 뜻을 찾았다. 그리고 칼 바르트의 ‘말씀의 신학’에서 빛을 찾았고, 스스로 길을 찾아 나그네가 되었다. 그 길은 위험하고, 불안했으며, 불확실한 믿음의 순례였다. 

  새삼 <복음과 율법>이 무려 70년이 지나 주목을 끈 것은 2020년 1월, 감리교평화통일위원회가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논문을 발표한 교회사 연구자의 안목 덕분이다. 논문은 감리교 선교국 총무를 지낸 고 김준영 목사의 회고담을 소개한다.

  “1950년 6월 25일에 전쟁이 발발했다. 서울이 함락되는 것을 보고, 나는 80km나 떨어진 개성을 향해 이틀을 걸어서 갔다. 집에 있는 방공호 속에서 허혁, 이영빈, 박순경 세 사람이 공동 번역한 칼 바르트의 역작 <복음과 율법>을 독파했다. 밑줄을 그으면서 아마도 대여섯 번은 읽었을 것이다. 가슴이 벅찼으며 그리스도의 은총을 깊이 그리고 뜨겁게 맞이했다. 나로서는 어거스틴의 회개나 존 웨슬리의 얼더스케이트 체험을 바르트의 <복음과 율법>을 읽으면서 경험했다”(하희정, ‘기독교통일운동과 감리교회가 걸어온 길’). 
  
  올해는 한국전쟁 70주년이다. 당시 젊은 신학도들이 찾은 길은 양 극단으로 갈라진 이념과 그에 대한 강요나 선택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쟁 중에 하나님의 뜻을 찾았고, 미래의 길을 물었다. 비록 정답처럼 길은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들은 기꺼이 경계선을 향해 믿음의 길을 걸어 나갔다. 그런 청년의 가슴을 우리 시대에서 다시 회복하고 싶은 까닭에, 새삼 낡은 선배들의 해묵은 원고를 뒤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