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부퍼탈(Wuppertal)이라는 도시가 있다. 그곳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세미나를 했다. 주제는 독일 통일이었고, 동독의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목사들이 함께 참여했다. 삼십 년 전 일이다.

부퍼탈은 1929년 바르멘(Barmen)과 엘버펠트(Elberfeld) 둘을 합친 도시인데, 1934년 나치에 복종한 신학을 비판하고 그리스도에게만 복종하겠다는 고백교회의 바르멘 선언(Die Barmer Erklärung)이 나온 곳이다. 이런 배경으로 부퍼탈에는 복음적인 신학교(Wuppertal Kirchliche Hochschule)와 독일 개신교의 해외 선교를 담당하는 선교단체(Vereinte Evangelishe Mission)가 있다.

동독 민주화 운동은 라이프니츠 교회에서 시작한 월요 기도모임에서 비롯됐다. 기도모임은 시위가 됐고, 베를린으로 번진 후 장벽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힘이 됐다. 1989년에 일어난 큰 변화다. 유학생들은 잔뜩 기대를 하고,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동독 목사들의 말을 경청했다. 첫 발제자인 동독 목사가 말했다. “1961년 우리는 ‘더러운 자본주의’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장벽을 세웠다.” 내가 독일어를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다. 그런데 정확히 그렇게 말했다. 그는 동독 목사로서 서구 자본주의를 그렇게 봤던 것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이 공산혁명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때가 1949년이다. 마오 혁명에 동조하는 종교인들은 그 해 가을, 베이징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하고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를 만난다. 그 후 기독교인들은 상하이에서 지도자 40명이 서명한 ‘새 중국 건설에 중국 기독교가 할 일’이라는 문건을 발표한다. 내용은 이렇다.

첫째, 중국 교회는 신자들에게 제국주의의 죄악을 알리고 그들의 음모를 경계하도록 한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며 정부의 토지개혁 정책을 숙지하도록 교육한다. 둘째, 중국 교회는 신자들에게 ‘애국’과 ‘자존감’을 배양시킨다. 여기서 나온 것이 ‘삼자애국운동’이다. 삼자(三自)는 자치(自治), 자양(自養), 자전(自傳)을 뜻한다. 그 동안 기독교가 서구자본주의 침략의 도구로 사용됐음을 인정하고, 중국 교회들을 해외 교회나 기독교 선교단체에서 분리해 자립시키자는 것이다.

딩광쉰(丁光訓, 1915-2012)은 1942년 상하이에서 성공회 목사가 된 사람이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스위스 제네바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세계기독학생총연맹(WSCF)의 간사로 일할 때 중국이 공산화 됐다. 1950년 그는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독교가 중국 공산주의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했다. 사회주의자들이 새로운 중국을 세우겠다고 나서는데, 교회가 공헌하지 못하면 퇴출될 것이 뻔했다. 사회주의 통치를 거부하고 저항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주의 안에서 신학을 정립할 것인가? ‘삼자교회’의 지도자가 된 딩광쉰은 평생 이 주제와 씨름했다.

체코의 동쪽은 모라바(Morava, Mähren, Moravia) 지방이다. 이 지역에서 살던 개신교인들을 모라비안 신도라고 불렀는데, 1736년 북미 인디언 선교를 가던 존 웨슬리가 선상에서 만났던 신도들이 바로 그들이다. 18세기 가톨릭의 극심한 박해로 흩어지기 전까지, 이 지역은 개신교 경건주의자들의 고향이었다.

1889년 모라비아에서 로마드카(Josef Lukl Hromdka, 1889-1969)가 태어난다. 그는 유럽의 다양한 신학과 미국의 신학을 섭렵한 신학자였다. 1947년 미국 프린스턴에서 체코로 돌아왔을 때, 고국은 이미 사회주의 체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받아들였다. 낙관주의적 유토피아 역사관, 악에 대한 과소평가는 비판하면서도, 이론을 실천하는 방법, 역사를 보는 눈, 사회정의를 위한 노력은 받아들였다. 그는 이런 관점으로 기독교인과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의 대화를 주도하려고 했다.

서유럽인과 미국인의 삶을 기독교적 삶의 전형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는 생각을 로마드카는 깨부쉈다. “서구인들은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스스로 의롭다 여기고, 세계에서 자신들이 누리는 혜택을 당연하게 여긴다.” 로마드카는, 서유럽 기독교를 우월하게 여기고 미국식 신앙을 최고로 여기는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했다. 나는 공산주의가 무너진 지금도 그의 말이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축복된 일만이 아니다.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이 닥칠 때, 기독교인들은 행동해야 한다. 받아들일 것인가 맞설 것인가, 아니면 타협하거나 회피할 것인가?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심각한 상황에서 길을 찾아야만 하는 고단한 일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선택하고, 주저 없이 길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젖어 자기 주장을 절대 포기 않는 한국 교인들이 많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서 서로 화해하자고 말하면, 교회는 사단 난다. 그러나 생각해 봐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은 이데올로기보다 위대한 것이 아니었던가? 인간이 만든 반공 이데올로기 밑으로 우리 신앙을 쑤셔 넣어서야 되겠는가? 우리 신앙은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는 ‘자기 성찰인 회개’를, 남에게는 ‘화해인 구원’을 말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표트르는 러시아를 개혁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성격이 불 같았던 그는 개혁을 가슴에 품고 있다가, 때가 되자 밀어붙였다. 표트르의 개혁은 흔히 알고 있는 ‘서구화’가 아니다. 그것은 ‘세속화’다. 자신과 국가가 개혁의 주체이므로 모두 국가 밑으로 들어오라는 강력한 명령이었다. 자연히 저항과 분열이 일어났다. 가장 심한 저항과 분열은 ‘거룩한 정교회’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황제와 함께 통치하던 정교회가 황제에게 복종하고 국가의 부분이 되어야 했으므로.

총대주교 이오아킴(Joachim, 1674-1690)과 아드리안(Adrian, 1690-1700)은 총대주교직을 지키려 애썼으나 황제의 권력에 속수무책이었다. 1700년 총대주교 아드리안이 죽은 후, 황제는 스테판(Stefan Yavorsky, 1700-1721)을 임시대리인으로 앉혔다. 그 후 대주교는 뽑아도, 정교회의 최고인 총대주교는 뽑지 않았다. 총대주교 부재는 1918년까지 지속됐다.

표트르의 통치체제는 스탈린 체제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경찰국가’였다. 표트르는 비밀경찰을 풀었다. 그리고 러시아에 속한 개개인이 국가를 위해 봉사하도록 만들었다. 개인의 보호자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닌 국가다. 교회는 국가가 개인에게 하는 일을 도와야 한다. 1721년에는 ‘신앙 법규’(Spiritual Regulation)를 만들고 교회와 신앙생활을 세세하게 간섭했다. “국가에 복종하지 않는 교회는 ‘교황주의’다.” 정교회가 가장 싫어하는 로마 가톨릭 교황에 빗대어 정교회를 공격한 말이다. 정교회는 영적 권위마저 내려놓고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러시아인의 영적 지도자는 국가가 됐다.

모든 작업이 표트르의 생각에서 비롯됐을까? 세속화 작업은 페오판(Feofan Prokopovich, 1681-1736)의 작품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키예프 출신으로 코사크 지도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신의 고향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로마 가톨릭이었다. 그는 1698년 키에프 정교회 신학교에 입학했다. 다시 폴란드 국경 근처 가톨릭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재능을 알아본 주교가 그를 로마로 유학 보냈다.

로마 가톨릭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바티칸 도서관에 파묻혀 로마 가톨릭과 르네상스 문화와 과학을 접했다. 그리고 스무 살에 졸업도 않고 로마를 떠났다. 예수교(Jesuits)에 입회할 기회가 있었지만 거절했다. 프랑스를 거쳐 스위스로, 그리고 독일 할레(Halle)로 갔다. 거기서 독일 종교개혁과 프로테스탄트를 많이 알게 됐다.

1704년 키에프로 돌아온 그는 회개하고 서원한 후, 로마 가톨릭 신앙을 내던지고 정교회 수도사가 됐다. 그리고 자신이 공부했던 키예프 정교회 신학교에서 가르치며 다방면에 걸쳐 글을 썼다. 그는 1711년에, 표트르 황제의 승리로 돌아간 우크라이나 폴타바 전투(Battle of Poltava, 1709)를 기념하는 설교를 했다. 황제는 감명을 받았다. 그는 표트르의 개혁을 칭찬하며 대놓고 지지했다. 1716년 표트르는 약관 35세 신학자 페오판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불러들였다. 이때부터 페오판은 개혁의 기수가 됐다. 개혁의 목표는 정교회를 ‘세속화’하는 것이다.

페오판은 ‘신앙 법규’를 만들고, 정교회 총대주교의 권위를 시노드(the Most Holy Synod, 1721-1918)로 대체해 버렸다. 시노드는 루터교에서 차용한 것이다. 시노드 구성원 10명도 황제가 임명하도록 했다. 페오판은 시노드에서 두 번째 지위였지만 실권은 그에게 있었다. 정교회 개혁은 가차 없었고, 표트르 대제가 죽은 후에도 계속됐다.

표트르와 함께 일한 페오판은 러시아 정교회를 개혁했는가 그르쳤는가? 아무튼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으로 300여 년이 지나서야 시노드가 끝나고 총대주교가 부활했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