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3년 보야르(Boyars)가 미하일 로마노프(Mikhail Romanov)를 차르(황제)로 선출하고부터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됐다. 보야르는 서유럽의 기사단처럼 동유럽 국가들에 존재했던 의회 형태의 귀족집단이었다. 로마노프 왕조는 1917년 공산혁명으로 끝났다. 표트르(피터 대제, 1672-1725)는 로마노프 왕조의 4대 차르였다. 1672년 태어났는데 어려서 왕위 계승에 얽힌 복잡한 일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1682년 이복 형과 공동 황제에 오르고, 이복 누이 소피아가 섭정했다. 표트르의 나이 10살 때였다.

표토르의 어머니 나탈리아(Natalya Naryshkina, 1651-1694)는 어린 표트르를 모스크바 외곽 북동쪽 ‘쿠쿠이 지역’(Sloboda Kukui)으로 보냈다. 그곳은 ‘독일인 지역’(German quarter)으로도 불렸는데, 쿠쿠이 하천 가에 독일인들이 많이 살아서 붙은 이름이었다.

러시아말로 독일은 ‘게르마니아’(Germania)지만, 독일 사람은 ‘니에미츠’(Niemits)다. 동사 ‘니미에트’(nimiet)가 ‘벙어리가 되다’ 혹은 ‘죄수가 되다’라는 뜻이므로, ‘니에미츠’는 독일인을 낮춰 부르는 말이다. ‘쿠쿠이 지역’에는 전쟁에서 잡혀온 포로들과 외국인들이 살았는데 그들을 모두 ‘독일인’이라고 불렀다. 그들을 왜 모스크바 가까운 곳에 살게 했을까? 앞선 유럽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모스크바는 내륙에 있지만 유럽과 교역이 어려웠던 것은 아니다. 모스크바 북쪽 백해(White Sea)에 있는 아르한겔스크(Arkhangelsk)는 1584년 이반 4세의 명령으로 개발되어 유럽 무역의 창구 역할을 했다. 그곳은 과거 바이킹이 드나들던 관문이었다. 바이킹은 아르한겔스크로 들어와서 강과 호수를 따라 남쪽 지중해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아스한겔스크는 부동항이 아니었다. 유럽과 교역을 하려면 발틱해로 진출해야 했는데, 그러려면 스웨덴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그리고 튜튼 기사단을 몰아내야 했다.

발틱 연안에는 튜튼 기사단(또는 독일 기사단, Ordo Theutonici)이 세운 나라가 있었다. 튜튼 기사단의 출발은 3차 십자군(1189-1192)으로 소급한다. 3차 십자군은 다국적 군대였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튜튼 기사단은 이스라엘 북부 해안 아크레(Acre) 요새의 야전병원에서 결성되어, 가톨릭에 충성을 서약한 기사 수도회(Ordo Millitaris)가 됐다. 기사 수도회는 수복한 성지를 찾아오는 순례자를 보호할 목적으로 생긴 수도회였지만, 말이 수도회지 요란한 철갑으로 무장하고 전쟁터를 휘젓던 공포스런 군사 조직이었다.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 튜튼 기사단은 베네치아를 거쳐, 폴란드 북부 마리엔부르그(Marienburg, Malbork)를 중심으로 삼고, 여러 나라 정치에 관여했다. 그러다가 1226년 폴란드 공작 콘라드 1세로부터 프로이센 지역을 점령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당시 프로이센 지역은 폴란드 북부와 현재 발틱 3국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일대였다.

기사단의 임무는 프로이센 지역의 이교도 퇴치였는데, 이교도는 다름 아닌 정교회 신자였다. 이들은 프로이센 원주민을 무자비하게 쓸어버리고 독일인들을 이주시켰다. 그리고 튜튼 기사단의 나라(State of the Teutonic Order, 1230-1525)를 세웠다. 이 나라는 몽골인이 서진하며 대륙을 휩쓸 때도 존속했다.

종교개혁 당시 튜튼 그랜드마스터(기사단장)는 알브레히트(Albrecht von Hohenzollern, 1490-1568)였다. 그는 루터의 개혁을 지지했다. 루터를 비롯한 개신교 지도자들과 교류했던 그는 1525년 루터교로 개종하고, 가톨릭 사제직과 기사직을 내려놓았다. 결혼도 했다. 그리고 폴란드 왕 지그문트 1세로부터 프로이센(Preussen) 공작에 임명됐다. 이때부터 등장하는 ‘프로이센’은 1871년 프로이센의 왕이 독일 제국의 황제를 겸하게 되면서, ‘독일 제국’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알브레히트는 나라를 종교국가가 아닌 세속국가 형태로 운영했다. 중심은 쾨닉스베르히(Koenigsberg), 현재 러시아 땅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였다. 그는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을 지지했고, 개신교 학자들과 협력해서 정확한 달력을 만들었다. 1544년에는 사재로 루터교 대학인 쾨닉스베르히 대학을 설립했다.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에, 17세기 후반에는 프랑스 종교전쟁(1562-1598)으로 탄압 받던 캘빈주의자 위그노(Huguenot)들도 프로이센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뛰어난 기술자들이어서 프로이센의 상업과 공업 발전에 많은 영향을 줬다. 훗날 쾨닉스베르히에서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자유로운 개신교 분위기 때문이었다.

표트르와 정교회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표트르가 등장할 당시 러시아 서쪽 지역 상황을 알 필요가 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여전히 가톨릭이었고, 발틱 연안은 가톨릭에서 루터교로 바뀌었고, 남하하는 스웨덴 군대도 루터교였다. 황제 표트르는 이들과 맞서서 정교회를 수호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표트르는 제3 로마이고 정교회 신앙의 마지막 보루인 모스크바 공국(러시아)을 철저하게 세속화해 버렸다.

표토르의 어머니 나탈리아(Natalya Naryshkina)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유럽의 문화를 알았던 가정에서 자란 여자였다. 어머니에 의해 ‘쿠쿠이 지역’에서 살게 된 표트르는 외국인들과 어울리면서 유럽 기술을 접하게 됐다. 호기심 많던 그는 실제 전투처럼 하는 전쟁놀이를 즐겼고, 수학, 기하학, 성을 쌓는 축성술, 총포술 등을 습득했다. 특히 배를 짓는 일에 깊이 몰입했다. 그는 무역하는 사람들, 외국인 기술자들과 사귀면서 유럽 생활과 기술을 익혔다.

1689년 표트르의 어머니는 17살 표트르를 모스크바로 불러, 3살 연상 예브도키야(Yevdokiya Lopukhina, 1669-1731)와 혼인시켰다. 아내는 아들을 3명 낳았다.

같은 해 표트르의 이복누이, 섭정 소피아는 근위병과 같이 표트르를 제거하려다실각해 수도원에 감금됐다. 실권은 총대주교 이오아킴(Patroarch Joachim of Moscow, 1620-1690)과 어머니 나탈리아에게 주어졌다. 표트르는 여전히 이복 형 이반과 공동 차르였다.

청년 표트르는 키가 2미터 넘게 성장했다. 그는 모스크바 왕실과 귀족들의 정치, 그리고 정교회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표트르는 친구들과 어울려 쿠쿠이 지역에 자주 드나들었다. 친구들과 술에 취해 교회를 조롱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는 온갖 기행을 일삼았다. 표트르는 개신교(루터교)를 알게 됐다. 후에 정교회 성직자를 자신이 직접 임명하고, 정교회를 장악해 루터교처럼 운영했다. 정교회 총대주교직이 황제 표트르에 의해 폐지되고, 1917년 공산혁명으로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쿠쿠이 지역에 네덜란드 상인 요한 몬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술 장사와 여관 운영을 했는데, 안나 몬스(Anna Mons, 1672-1714)라는 딸이 있었다. 1691년 표트르는 동갑내기 안나와 사랑에 빠진다. 안나는 표트르에게 육체의 즐거움을 가르쳐준 여인이었다.

1694년 어머니 나탈리야가 죽었다. 1696년 공동 황제였던 이반도 죽자, 표트르는 혼자서 러시아를 통치하게 됐다. 홀로 황제가 된 표트르는 그 해 젊은 귀족들을 데리고 일년 반에 걸친 유럽 견학 길에 올랐다. 리가-브란덴부르크(베를린)-네덜란드-영국-빈을 거치는 동안 신하들과 같이 일하며 유럽 문물을 익혔다. 표트르 미하일로프라는 가명을 쓰며 신분을 숨겼지만 워낙 키가 큰데다 호기심이 두드러져 신분을 숨길 수 없었다.

유럽에서 돌아온 표트르는 1698년 예브도키야와 이혼하고 그녀를 강제로 수녀원에 보내 수녀로 만들었다. 안나는 공식적으로 표트르의 정부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안나가 표트르에게 러시아인의 무례함과 불결함을 지적하는 말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표트르와 친구들은 모일 때마다 술 도가니에다가 광란이었다. 황제는 러시아인을 깔본 애인에게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1703년 러시아를 방문한 프로이센 대사 키세를링이 안나에게 청혼했다. 그녀는 갑자기 청혼을 받아들였다. 표트르는 화가 나서 그녀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모두 가택 연금 시켜버렸다. 그러나 표트르는 화를 풀고 안나의 혼인을 허락해 줬다. 아마도 표트르가 사랑한 새 애인 마르타(Marta Skowronska)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르타는 귀족이 아닌 라트비아 지방 농민 출신이었지만, 불 같던 표트르를 잘 다스렸다. 그녀가 어루만지면 화를 내던 황제는 곧 잠잠해졌다. 마르타는 표트르와 혼인하고, 표트르의 뒤를 이어 여제 예카테리나 1세(재위 1725-1727)까지 됐다. 안나 몬스는 1714년 결핵으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