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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의 ‘형님’과 ‘오 예스’
조진호  |  jino-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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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2월 14일 (금) 21:54:16
최종편집 : 2020년 02월 15일 (토) 03:06:55 [조회수 : 3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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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은 저의 쉬는 날이었습니다. 운 좋게도 아카데미 시상식이 한국 시간으로 그 날 오전에 열려서 생방송을 통해 역사적인 현장에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때는 2003년 가을이었습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이 큰 이슈가 되었을 때 인문대 어디선가 봉 감독을 초청했었습니다. 아직은 크게 유명해지기 전이라 스무 명 남짓의 학생들 틈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음대생은 저 혼자였습니다. 제가 이 분에 대해서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 것은 단지 올 해 거둔 아카데미의 업적 때문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첫 작품 ‘플란더스의 개’부터 봉감독과 그의 영화를 좋아했던 팬으로서 작금의 대중적 인기에 모종의 질투심을 느끼고 있지요. 제가 봉감독에 대해서 감탄하는 이유는 무명의 설움과 생활고를 갓 벗어난 17년 전 서른세 살 봉준호와 지금 세계적 명성을 얻고 대가의 반열에 들어선 봉준호의 모습이 살이 찐 것 외에는 전혀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렁설렁함 속에 숨어 있는 번뜩이는 눈빛 그리고 영화에 대한 재미 가득한 열정과 그 열정의 삶을 즐기고 있는 모습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이러기가 쉽지 않지요. 하지만 그 시절 봉 감독은 뭔가 달라도 달랐습니다. 임권택의 장인적 면모나 은근 퇴폐미를 추구하는 박찬욱, 시대를 향한 메시지를 쓰고 싶은 이창동의 모습은 없었지만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저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다른 감독들은 저마다의 색깔을 가지고 ‘진지한’ 느낌을 주지만 봉감독은 그저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에겐 거만함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겸손도 없었습니다. 그저 영화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음악에서의 모차르트처럼 말입니다.
     
목회자들의 세계에서도 부목이나 작은 목회지에 있을 때는 사람 눈치를 보고 사람을 의지하며 살다가 정작 그런 처세술로 얻은 큰 목회지에서는 제왕적인 모습으로 돌변하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봉준호 감독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매 순간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며 하나님과 함께 삶과 신앙생활을 만끽하는 것이 영적인 대가가 되는 길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 자잘한 일상을 소중히 여겨 기억하고 그 일상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디테일의 장인’ 봉준호와 그의 영화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영화에서 발휘되는 디테일의 힘은 결코 영화적인 트릭이 아닙니다. 디테일에 대한 관심은 삶을 바라보고 삶을 살아내는 그의 일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뤄야 할 목표나 당면한 문제점에 집중하느라 일상의 소중한 편린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봉준호 감독은 일상을 소중하게 다루며 마치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평범한 것들을 섬세하게 관찰하였고 그러한 삶의 자세가 지금의 그와 그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번 시상식에서는 봉감독 뿐만 아니라 그의 통역사인 샤론 최가 매우 민첩하고 재치 있는 통역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놓친 매우 중요한 한 단어가 있었으니 바로 ‘형님’이라는 우리말입니다. 봉감독은 감독상 수상 소감에서 “...저의 영화를 아직 미국의 관객들이나 사람들이 모를 때 항상 제 영화를 리스트에 뽑고 좋아했던 쿠엔틴 형님이 계신데 정말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는데 통역은 여기에서 ‘형님’이라는 단어를 빼 버렸습니다. 개인적 친근감과 존경심이 함께 담긴 우리말 ‘형님’이라는 ‘높임 형 애칭’을 영어로는 번역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brother'라고 하기에는 너무 경박하고 ’boss'라고 하기에도 어감이 좀 좋지 않습니다. 이 둘을 합한 ‘bross'라는 말이 영어에 있는가는 모르겠지만 ‘형님’은 한국인만이 느낄 수 있는, 사랑과 존경과 친근함을 모두 담은 호칭인 것이지요. 두 언어 사이의 한계라고 할 수 있고 오히려 섣불리 번역하려 들지 않은 것이 그녀의 실력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찬송가 중에서도 번역의 한계 때문에 안타까울 때가 간혹 있습니다. 다만 영어 가사의 느낌을 우리말로 온전히 옮길 수 없는 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지요. 찬송가 372장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는 ‘아프로-아메리칸 영가(Afro-American Spiritual)’입니다. 예전엔 ‘흑인영가’라고 불렀지만 이제는 인종차별적인 용어가 되어 사용을 지양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찬송가는 샤론 최의 통역처럼 아주 모범적인 번역입니다. 다만 두 언어의 사이의 한계와 찬송가의 음표에 맞춰야 하는 특수한 상황이 아쉬울 뿐이지요. 아무튼 이 찬송가의 1절 중간 부분에는 "나 자주 넘어집니다. 오 주여"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Sometimes I'm up, sometimes I'm down, Oh, yes, Lord!"입니다. 우리말로는 넘어지는 것(down)만 표현되지만 영어에서는 업(up)되는 것 또한 주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힘들어 쓰러지는 것만큼이나 인간적으로 ‘업’되어 있는 상태도 우리의 심각한 영적 문제입니다. 그 정도는 어쩔 수 없고 어느 정도 뜻이 통하고 있기에 이해할 수 있지만 정말 놓치기 아쉬운 영어표현은 ‘Oh, yes, Lord!’입니다. 우리말로 ’오 주여!‘라고 번역되었는데 음표가 세 개 밖에 되지 않기에 마땅한 대안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yes’라는 표현을 우리말 가사에 담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아쉽습니다. 이 ‘yes’라는 한 단어에 아프로-아메리칸의 영성이 깊이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굳이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맞습니니다 주님, 그래요,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내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주님을 의지하렵니다.’라는 의미가 그 ‘yes’한 단어에 스미어 있습니다. 우리말 가사에서는 절망적인 상황만 느껴지지만 영어 가사에서는 절망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희망을 함께 느낄 수 있지요.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로 이 곡을 들어보시면 바로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언어를 초월해서 소통하기란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날린 봉감독의 한 마디 말이 저에게 희망을 줍니다. “우리는 단 하나의 언어를 쓴다고 생각합니다. 그 언어는 영화입니다.” 어쩌면 이 한마디 말이 견고한 아메리카니즘에 둘러싸인 아카데미와 심사 위원들의 마음을 흔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영화감독이 존경하는 감독이나 작품에게 보내는 가장 큰 경의는 ‘오마쥬’입니다. 저도 봉감독께 경의를 표하는 맘으로 한 마디 남기렵니다.

“우리는 민족마다 다른 언어로 찬양하지만 단 하나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음악듣기 : 루이 암스트롱의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https://youtu.be/SVKKRzemX_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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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웅석 (121.132.47.48)
2020-02-15 08:42:51
환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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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김경환 (222.100.38.174)
2020-02-15 01:38:39
오스카 작품상에 빛나는 기생충에 관하여
나는 영화 약 4,000편을 소장하고 있는 영화광이지만 1990년대부터는 한국영화는 아예 외면했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영화계를 쥐고 흔드는, CJ엔터테인먼트를 쥐고 흔드는 이재현, 이미경(미국아카데미회원)이가 左派的 시각으로 만드는 영화에 학~~을 떼고부터는 한국영화와는 아예 담을 쌓았습니다. 한국영화계를 장악한 좌파 나부랭이 감독이나 제작사나 배급사에게 나의 귀한 돈을 갖다 바치기 싫어서라도 그랬습니다. 관중 천만 명 어쩌고저쩌고하여 궁금하면 시중에 떠도는 영화평이나 읽어보는 정도였습니다.

아카데미 1회~91회까지의 작품상 받은 영화를 소장하고 있는 나로서는 92회 작품상 받은 영화도 소장하기 위해 마지못해 기생충을 보았습니다. 내가 아주 경멸하는 종자인 CJ엔터테인먼트 등에게 돈을 갖다 바치기 싫어 ulozto.net에서 인터넷으로 다운로드 받아서 보았습니다.

기생충을 본 소감은... 엘리아 카잔 감독 냄새가 강하게 풍겼습니다. 反共감독이란 이유만으로 한국과 마찬가지로 좌파들이 장악한 미국영화계에서 왕따 당했던 엘리아 카잔 감독과 유사한 연출이었습니다. 말론 브란도 주연의 워트프론트(27회 아카데미 작품상)를 한 두 번 뒤집어 놓은 것 같았습니다. 엘리아 카잔 감독은 <부두노동자>를 비비꼬았고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인간>을 비비꼬았습니다. 워트프론트는 무겁게 착 가라앉았다면, 기생충은 약간 코믹했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오스카 수상식에서 배급사 자격인 이미경이가 수상소감을 밝히는 장면에서는 참으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배급사도 수상소감을 밝히는가? 완전 촌티가 드러나는 장면이었습니다.

내가 아주 경멸하는 CJ엔터테인먼트가 관계한 작품이긴 하지만... 세계 영화인들이 우러러보는 제92회 오스카 작품상을 수상한 데 대해선 축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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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3
김경환 (222.100.38.174)
2020-02-15 03:26:21
좌파가 완전 장악한 미국영화계가 트럼프에게 한방 먹이기 위해 트럼프가 싫어할만한 유색인종이 만든 영화인 기생충을 일부러 선택했다는 해석도 심심치 않게 들려옵니다. 백인우월주의자인 트럼프에게 할리우드가 자기 방식으로 보복한 거죠. 워렌 비티, 로버트 드 니로, 알렉 볼드윈 등 트럼프를 씹어대는 극좌파들이 판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미국국민가수 겸 배우인 바바라 스트라이샌드는 한술 더 뜨고 있는 실정이고요. 작품상이 기생충으로 발표되자 좌파 나부랭이 감독, 배우 등이 트럼프 보란 듯이 열렬하게 박수를 쳐댔다고 합니다.

이렇게 좌파 감독, 영화배우들이 아주 열심히 노력한 결과 미국민주당은 거의가 좌파 일색입니다. 힐러리, 샌더스, 부티지지 등등... 이에 비추어 보면 한국민주당이 득세하는 이유도 다를 바 없습니다. 좌파가 장악한 삐딱한 스크린, 그 무신 영화를 본 멍청한 문재인이가 그걸 사실로 받아들여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겠다고 나설 정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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