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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박이
황은경  |  hallofreun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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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2월 14일 (금) 00:49:37 [조회수 : 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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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운전 때다. 의정부에서 서대문으로 출근을 할 때면 도봉산을 지나 서울 시내를 관통하는 것보다 북한산이 훤히 보이는 송추 쪽으로 가는 도로를 택했다. 약간 우회하는 느낌이 있긴 했지만 좁은 도로에서 정차를 반복하며 가느니 굽이치는 도로의 스릴과 쌩하고 달리는 시원함을 동시에 즐기고 싶었다. 그리고 계절마다 보여주는 산의 경치도 드라이브 하는 맛을 주어 그곳을 자주 지났다.

그 가는 길은 부대가 많았다. 하루는 한 부대를 지나는 중에 앞의 신호가 주황색으로 바뀌려고 했다. 초보 시절이니 주황색 이후 빨간색으로 바뀐다 생각하고 횡단보다 앞에서 차를 세웠다. 파란색 신호가 되기를 기다리는데 신호는 계속 주황색이었다. 게다가 깜빡깜빡하기만 했다. ‘저 신호는 뭐지?’ 아리송했지만 ‘후훗! 난 제법 법을 지키는 시민이니 신호에 따라 운전해야 돼’ 하며 기다렸다. 그러고 있는데 뒤에서 어떤 차가 빵빵거렸다. 백미러를 통해 바라보니 차 한 대가 계속 클락션을 울렸다. 난 또 생각했다. ‘뭐야? 파란신호도 아닌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몇 초 그러고 있는데 뒤의 차가 차선을 바꿔 내 옆으로 오면서 창문을 내리고 인상을 막 구겼다. 그런 뒤 내 앞으로 와서 부대 정문으로 쑤욱 들어가는 거였다. 어랍쇼!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 했지만, 순간 깨달았다. 아! 주황색 점멸등은 천천히, 서행하라는 신호지. 깜박거리는 신호를 제대로 알았더라면 그런 웃픈 경험은 안했을 것이다.

요즘 인터넷 기사 중에 치매 관련한 기사가 뜨면 손가락이 저절로 눌러진다. 최근에 들어 깜박깜박이 잦아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깜박깜박하면 건망증으로 여기고 넘어갔는데, 요즘 같아서는 무척 걱정이다. 가령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려놓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들어오면 냄비 속 음식을 까맣게 태우는 게 다반사다. 나갈 때는 생각한다. 가스 불에 올려놓은 주전자를 기억하자. 그러나 마당에 발을 내딛는 순간 깜박한다. 충직한 한라와 애교만점 고양이들과 잠깐 얘기를 나누고 들어오면 이미 낭패다. 깜박 3초 사이에 before, after 변신이 되는 상황이다. 이런 실수가 잦아들면 마음에 병이 든다. 간혹 이런 실수를 ‘이제 그럴 때가 됐지’라며 나이에 슬쩍 올려보기도 한다. 그렇게 스스로 책하고, 스스로 위로하고 치매 관련 기사를 읽어 내려가며 나의 뇌를 정비하고 마음을 다스린다만 그래도 깜박이는 쉬이 꺼지지 않는다. 그런 연유로 주변에 치매로 고생하는 분들의 소식을 들으면 괜히 남일 같지 않다. 아직 멀 일이다 싶어도 동병상련은 어쩔 수 없다. 치매를 예방하는 방법을 보니 나의 깜박이는 늘어진 삶에 찾아온 경고등이라 할 수 있다. 에고! 정신 차리자.

운전에도, 일상에도 깜박이가 찾아오듯 신앙의 길에도 깜박이가 작동한다. 고난은 신앙을 담금질한다고 하는데 평온의 세월이 강같이 흐르는 지금, 그 말이 새롭게 다가온다. 평화의 계절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잔잔하고 고요한 중에 깜박깜박하는 증상은 분명 내게 무엇인가 말하고자 함이 있는 것이리라. 주님은 고요한 중에 하나님을 더욱 찾으셨는데, 나는 고요한 중에 무엇을 찾고 무엇에 집중하였는가.

홀로 된 시간이 많을수록 더 깊은 영성수련을 할 것으로 여겼다. 그랬을까? 아니다. 오히려 망가진 자신을 바라본다. 기독교 전통 중에 사막에서 독거하며 기도한 교부들이 있다. 분주한 때에는 사막의 교부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앉으나 서나, 눈을 뜨나 감으나 늘 기도의 삶을 살았으니. 그리고 교부들이 기도 중에 악마와 싸우는 여러 문장들은 마치 판타지 영화나 무협 소설과 같아 유치하면서도 신기했다. 그러나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혼자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인내와 끈기와 훈련이 필요한지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일을 핑계로 인내와 끈기와 훈련을 요하는 기도를 과감히(?) 미루게 되니 어찌 영혼의 깜박이가 켜지지 않았겠는가. 막다른 골목에 와 있는가 싶을 정도로 신앙의 깜박이가 자주 켜지는 요즘, 이제야 나는 내 영혼을 천천히, 서행하며 돌아보는 중이다. 주여! 이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2020.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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