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외국인이, 아직도 한국인들에게 양인과 천민을 나누는 양천제(良賤制)나 양반과 상민을 구별하는 반상제(班常制)가 잔존하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 답할까? 오십 년 전만 해도 그렇다고 답했을 것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 동안 이룩한 한국 사회의 민주화 덕분일 것이다.

러시아인과 러시아 사회의 바탕에 깔려있는 의식을 간추린다면, 나는 다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러시아 국가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통치자의 개혁’,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국민이 느끼는 공포’다. 이 둘은 맞물려 있다. 이조 오백 년과 비슷한 세월을 유지한 로마노프 왕조와, 공산혁명, 스탈린 체제, 페레스트로이카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것은 한결같았다.

이런 의식의 근원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반 4세(이반 뇌제 Ivan the Terrible, 1530-1584)부터 이어진 차르(황제)의 무자비한 통치와 17세기 러시아 정치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러시아 정교회의 역할이 있었다. 이것을 살펴보는 건 꽤 의미 있다.

1589년 모스크바 수도대주교가 총대주교로 격상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위기가 찾아왔다. 이반 4세의 장남인 이반은 아버지에게 맞아 죽었다. 다른 아들 표도르 1세(Feodor I of Russia, 1557-1598)가 뒤를 이었지만 그도 일찍 죽었다. 후사가 없었다. 이반 4세의 다른 아들들은 병약해서 일찍 죽었으므로, 황제를 이을 사람은 이반 4세의 일곱 번째 아내가 낳은 어린 드미트리(Dmitry of Uglich, 1582-1591)뿐이었다. 그도 9살에 죽었다. 표도르 1세가 죽은 후, 그의 처남이며 이반 4세의 고문이었던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 1551-1605)가 차르에 선출됐다. 그러나 그는 왕족이 아니었다.

러시아 상황은 나빴다. 계속되는 가뭄으로 아사자가 속출하고 민심이 흉흉했다. 그러자 드미트리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황제를 참칭하는 가짜 드미트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가짜 드미트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도망갔다가 1604년 폴란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내전이 일어나고, 와중에 황제 고두노프가 죽었다. 가짜 드미트리는 모스크바로 쳐들어와, 황제 고두노프의 뒤를 이은 아들 표도르 2세를 죽여버렸다. 가짜 드미트리는 황제로 등극하고, 자신을 옹위해 모스크바로 온 폴란드인들을 등용했다. 폴란드인들을 죽도록 싫어했던 러시아인들은 반기를 들었다. 결국 가짜 드미트리의 정체가 밝혀지고 처형됐다. 10개월 동안 일어난 난동이었다.

이후 가짜 드미트리 사건은 두 차례나 더 있었다. 러시아는 스웨덴 군대를 끌어들였다. 그러자 모스크바와 우크라이나 땅은 폴란드와 스웨덴과 러시아가 물고 물리며 싸우는 전쟁터가 됐다. 황제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2대 모스크바 총대주교는 이그나티(Ignatius of Moscow, 1605-1606)였다. 그는 그리스 크레타 사람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보리스 고두노프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러 왔다가 러시아 총대주교가 된 인물이다. 그는 1605년 가짜 드미트리의 대관식을 주재했다. 가짜 드미트리가 처형되면서 총대주교는 수도원에 감금됐다. 그런데도 다른 가짜 드미트리가 등장하자 또 그를 지지했다. 총대주교가 이러하니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이그나티는 1611년 모스크바를 탈출해서 리투아니아로 갔고, 1618년경 거기서 죽었다. 리투아니아에서는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까지 했다. 1655년 러시아 군사가 리투아니아 빌니우스를 점령했을 때 수도원에 있는 그의 무덤을 파헤쳤다. 러시아인은 역대 러시아 총대주교의 명단에서 그를 지워 버렸다.

반면 3대 총대주교 게르모겐(Hermogenes, 1606-1612)은 달랐다. 1610년 폴란드인들이 모스크바로 쳐들어왔을 때 그는 러시아 각지에 서신을 보내서, 이단 폴란드 가톨릭 교도들에게 저항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수도원에 감금되어 굶어 죽었다.

1613년 미하일 1세(Michael I Romanov, 1596-1645)가 러시아 황제로 선출되고, 황제의 아버지가 모스크바 총대주교에 오르면서 안정되는 듯싶더니, 곧 반란이 난무하는 ‘동란의 시기’가 왔다.

1645년 미하일 1세의 뒤를 이어 알렉세이 1세(Alexis of Russia, 1629-1676)가 황제에 올랐다. 그는 군대를 유럽식으로 개편하고, 1649년 농노제(農奴制)를 법으로 만들었다. 서유럽에서 르네상스와 더불어 사라지기 시작한 농노제가 러시아에서 견고해진 것이다. 농노는 영주에게 종속되어 영지를 벗어나 이동할 수 없었다. 세금을 냈고 영주를 위해 강제 부역을 했다. 전쟁에도 나가야 했다. 허락되지 않은 상업과 사냥 등도 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노예였다.

1652년 황제의 비호를 받는 니콘(Patriarch Nikon of Moscow, 1605-1681)이 일곱 번째 모스크바 총대주교좌에 오르면서 혼란은 거세졌다. 이유가 있었다. 이 시기에, 러시아 정교회의 의식서가 그리스어 원본과 일치하는지 논쟁이 일어났다. 교회 의식의 표준을 정하려고 했고 성경 편찬이 이루어졌다.

러시아어로 번역한 첫 완본 성경은, 노브고라드(Novgorod)와 프스코프(Pskov)의 대주교였던 겐나디(Gennady, 1484-1504)가 지시하여 만든 ‘겐나디 성경’(Gennady’s Bible, 1499)이었다. 손으로 쓴 완본 성경이다. 그 후 ‘오스트로그 성경’(Ostrog Bible, 1581)이 나왔다. 이것은 겐나디 성경을 기반으로 해서, 우크라이나 오스트로그에서 인쇄한 첫 완본 성경이다.

두 성경이 나오면서 슬라브어 규범과 문법이 자리잡았다. 1619년 모스크바에서 문법서가 나오면서, 교회에서 사용하는 슬라브어 문법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문법이 정리되자 모스크바 성직자들은 성경 교정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1663년 러시아 땅에서 처음으로 ‘모스크바 성경’(Slavonic Bible)이 출간됐다. 니콘이 총대주교로 있던 때다.

경건한 예배를 위하여 정확히 번역된 성경과 의식서를 갖는 것은 좋은 의도였겠지만, 총대주교 니콘이 이것으로 교회개혁을 밀어붙이자 큰 문제가 일어났다.  당시 러시아 상황은 동란으로 말이 아니었다. 민중은 농노로 전락해 좌절하고 난을 일으키는데, 러시아 황제와 교회는 계속 부유해졌다.

황제 알렉세이 1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서 성 소피아 성당에서 로마 가톨릭 교황을 포함한 모든 총대주교들과 함께 성찬식을 거행하고 싶어했다. 다른 총대주교들의 나라가 오스만 제국에 속해 있고, 로마 가톨릭 교황을 이단으로 여기는 마당에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니콘은 황제 알렉세이 1세의 꿈을 뒷받침했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 성 소피아 성당에서 모든 총대주교들과 성찬식을 거행하려면, 옛 그리스(콘스탄티노플) 의식으로 치러야 할 것이었다. 그러려면 그리스 의식에 충실한 러시아 의식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크라이나 정교회도 문제였다. 러시아와 동유럽 중간에 있는 우크라이나는 이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땅이었다. 우크라이나 교회는 브레스트 조약(The Union of Brest, 1595-1596)을 맺고 동방 정교회와 관계를 끊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황 밑으로 들어갔다. 폴란드 가톨릭은 우크라이나에서 영향력을 넓혀갔다. 가톨릭 예수회(Jesuit order) 선교사들이 이 지역에서 활발히 선교했다.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점차 로마 가톨릭 교회로 변해 가고 있었다.

흑해 연안에 살던 코사크는 정교회 신자였다. 이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맞서 봉기(1648-1657)를 일으켰을 때 러시아 황제가 개입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동부가 러시아로 넘어왔다.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의 관할이 되고, 러시아 정교회는 우크라이나까지 포괄하는 큰 세력이 됐다.

1551년 당시만 해도, 우크라이나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전례와 고유한 정교회 의식을 많이 갖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콘스탄티노플에 가까웠고, 러시아 정교회보다 더 역사적인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 정치적인 이유에서,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러시아 정교회 밑으로 들어갔다. 요즘 우크라이나 정교회 사태를 보는 것 같다.

모스크바 총대주교 니콘은 이 문제를 천착했다.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모스크바 총대주교 밑에 있으려면, 두 정교회의 예배와 의식을 일치시켜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권위가 손상될 것이었다. 열등감이었을까? 미국 교회의 의식이라면 표준으로 생각하고 무조건 받아들이는 한국교회의 모습과 닮았다.

니콘은 러시아 교회의 의식을 개혁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의 의식이 형식에 치우쳤고 또 정통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유는, 러시아 정교회가 콘스탄티노플 교회와 분리되어 연락이 끊어졌기 때문이고, 러시아 정교회에 이교적인 요소가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전래 양식과 일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려면 러시아 정교회의 의식을 고쳐야 했다.

황제 알렉세이 1세는 우크라이나를 완전히 병합하려 했으므로 니콘의 교회개혁을 지지했다. 반대로, 총대주교 니콘이 황제 알렉세이 1세의 정책을 뒷받침했다고도 볼 수 있다. 둘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황제와 총대주교는 서로 우위에 있으려고 했으므로 둘 사이에는 긴장이 있었다. 그러나 동란의 시대에, 황제와 총대주교는 공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