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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통일운동과 감리교회가 걸어온 길
하희정  |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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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1월 14일 (화) 11:06:53
최종편집 : 2020년 01월 15일 (수) 03:46:42 [조회수 :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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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통일운동 포럼

기독교 통일운동과 감리교회가 걸어온 길

 

하희정

들어가는 말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오려면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동시에 쪼아야 한다는 뜻이다. 기독교 통일운동이 걸어온 역사를 한마디로 표현하는데 이보다 더 적합한 단어를 찾기는 어렵다. 냉전의 한복판을 가로지른 한반도는 분단과 반공이데올로기에 기댄 독재시대의 장기화로 10배가 넘는 시간을 오랜 침묵 속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정지된 시간은 아니었다. 제3지대인 해외에 거주한 기독교인들과 세계교회가 철옹성에 균열을 내고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한마디로 기독교 통일운동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교회와 함께 호흡하며 국제공조의 형태를 띠고 진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분단구조의 해체가 국제 패권질서와 깊이 연동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연구는 기독교 통일운동의 역사적 흐름을 간략하게 스케치하고, 감리교가 어떤 방식으로 참여해왔는지 성찰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는 과거역사에 대한 세세한 사실관계 규명보다 분단체제의 해체와 평화정착이 통일한반도의 시대적 과제로 성큼 다가선 시점에서 감리교가 나아갈 방향과 정책을 논의하는데 작은 보탬이 되고자 함이다. 이와 더불어 시급히 진행되어야 할 과제도 간단하게 짚어본다. 다만 논문준비를 위한 시간이 촉박하게 주어진 관계로 감리교 기관에서 발행된 자료들을 꼼꼼히 살펴보지 못했음을 미리 밝힌다. 자료가 탄탄하게 보완된 후속 연구가 곧 나와 주기를 기대한다.

   
하희정 박사

I. 냉전 그리고 분단

 

분단과 통일을 논할 때, 흔히 독일을 함께 떠올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한반도의 상황과 비교하게 된다. 실제로 독일의 분단과 통일은 한반도의 미래를 예측해 볼 수 있는 하나의 모델로써 다양한 상상력을 선물해주었다. 이와 관련된 논문과 저서들이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겉모양이 비슷하다고 그 내용까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출발점과 성격이 다르면 방식과 선택지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독일의 분단과 한반도의 분단도 역사적 출발점 자체가 다르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발발에 원인을 제공한 패권국가 중 하나로 분단이 패배의 대가였다. 반면에 2차 세계대전 종결을 계기로 식민역사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한국은 패권질서의 재편과정에서 파생된 ‘또 하나의 전쟁,’ 즉 냉전에 다시 희생되어 분단이 주어졌다. 이로 인해 민족 간 전쟁을 치르지 않은 독일의 경우와 달리, 한국은 주도권을 상실한 채 내적 요인이 아닌 세계냉전 세력들 간의 대리전으로 내전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데올로기 전쟁의 상흔을 그대로 떠안게 되었다. 이는 반공주의가 깊이 뿌리내리는 환경을 만들어냈고, ‘끝나지 않은 전쟁’의 상태가 지속됨으로써 인위적 적대감을 극대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통일한반도로 가는 길목에서 가장 큰 내적 장애물로 떠올랐다. 따라서 분단체제가 탄생된 역사적 맥락과 세계교회의 대응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해방 이후 한국교회가 직면한 변화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변화 선택한 세계교회와 WCC의 탄생

2차 세계대전은, 끝을 모르는 욕망과 자본화된 탐욕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 재앙이 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었다. 기독교의 ‘세계정복’을 낙관했던 선교사들의 꿈은 서구 열강들의 식민정부 해체와 함께 물거품처럼 흩어졌다. 2차 세계대전의 종말로 근대문명에 대한 신화가 무너지자, 인류사회에 대한 책임론이 부각되었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창립된 것이 그 증거다. 단순한 ‘선교 연대’를 넘어 ‘기독교 연대’를 위한 에큐메니컬 기구가 탄생한 것이다.

이는 선교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예고했다. 확장주의 사고를 폐기하고 지구공동체를 위한 책임의식을 장착했다. 서구개신교는 2차 세계대전이 몰고 온 비극을 통해 서구열강들이 추구한 팽창주의의 폭력성을 확인했고, 이에 편승해온 자신들의 신앙체계에 대하여 근본적인 물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비서구권을 대상으로 실행한 “세계 선교 프로젝트”가 19세기를 지배한 정복주의 세계관 전파에 적지 않게 기여했음을 각성했다. WCC가 창립주제로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디자인”(Man's disorder and God's design)을 내세운 것이 이를 말해준다. 복음에 사회성을 부여했고, 교회를 “책임사회”(responsible society)로 새롭게 정의 내렸다. 자신들이 꿈꿨던 기독교 중심의 세계 변화 즉 “기독교를 위한 세계” 실현이 다름 아닌 일방주의 선교정책에 기초한 것이었음을 뒤늦게 인정한 것이다. 세계 도처에서 발생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공동책임의식을 각성한 서구개신교는 “세계를 위한 기독교”로 거듭날 것을 선언하고 새로운 행진을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이 서구 기독교인들에게는 근본을 돌아보게 한 성찰의 시간이 된 셈이다.

이를 계기로 선교주체에 대한 인식전환도 이루어졌다. 이른바 “하나님 선교”(Missio Dei) 개념이 등장했다. 선교주체는 교회나 선교조직이 아니라 교회의 경계를 넘어 모든 것에 가능성을 열어놓은 하나님 자신이라는 뜻이다. 이는 세계를 위한 종교로서 교회와 사회 사이에 경계를 따로 두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선교의 지향점도 새롭게 설정되었다. 바로 “인간화”다. “우리는 인간화를 선교의 목표로 주장한다...오늘날 근본적인 질문은 진정한 인간에 대한 문제다. 그러므로 선교공동체의 결정적인 관심은 선교의 목표로서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드러내는데 있어야만 한다.” 동시에 새로운 인간화의 징표로 “정의, 자유, 인간존엄”을 천명했다. 말 그대로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이라 불릴만하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능케 한 것은 다름 아닌 사회주의의 급속한 확장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종결로 식민정부들이 모두 철수했고, 식민지로 전락했던 국가들은 정치적 독립을 맞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제국들의 욕망이 막을 내린 것은 아니다. 식민정부들은 철수하면서 꼭두각시 정부를 내세워 경제적 종속관계를 영속화하는 ‘시즌 2’를 시작했다. 이른바 ‘포스트 식민주의 시대’를 연 것이다. 결국 신생독립국가들은 ‘제2의 독립투쟁’으로 탈식민화운동에 나섰다. 정치적 독립은 이루었으나 착취의 사슬에 묶여 ‘제3세계’라는 이름의 경제식민지로 전락해 민중들은 가난과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중들의 분노는 식민정부가 꼭두각시 정부로 세운 군부독재정권에 대한 정치적 저항으로 표출되었고, 진압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심각한 인권유린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악순환은 제3세계 민중들, 특히 청년들이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 갖게 만들었고, 반제국주의를 표방한 공산주의 진영과 연대를 촉진시켰다. 이는 이후 서구 청년들의 지지와 연대로 이어졌다. 유럽청년들이 주축이 된 68혁명과 베트남전을 계기로 미국 대학가에서 처음 시작된 반전운동이 그것이다.

체제변혁에 대한 요구와 혁명에 대한 열망을 타고 정치적 급진주의 사상이 급속히 퍼져나가자, 기독교 청년들의 이탈도 가속화되었다. 이는 세계 선교 프로젝트의 완성을 기대했던 기독교 진영에 가장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서구 기독교는 전지구적 차원으로 번진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여 근본적인 자기변화를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개신교 진영은 서둘러 WCC를 결성해 ‘세계를 위한 기독교’를 선언했고, 가톨릭 진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를 개최하여 사회정의 실현을 교회의 책무로 공식화했다. 한마디로 WCC는 사회주의 사상의 급속한 확산과 공산주의 진영의 세력 확장에 대한 기독교 대안연대로 출발했다. 미국의 입김이 강했던 초기, 반공주의 노선을 견지한 것은 물론이다. 소련의 동방정교회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은 이유다.

물론 변화를 거부하는 반동의 흐름도 경험했다. 초기부터 용공조직으로 공격받은 것이다. 근본주의 신앙노선을 고수한 미국 개신교도들이 WCC를 공산주의와 연계시키며 창립을 반대했고, 급기야는 국제기독교협의회(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 ICCC)를 결성했다. 칼 메킨타이어(Carl McIntire) 등 극단적 분열주의 노선을 선택한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은 세계교회들의 사회적 책임각성과 국제사회를 향한 사회적 행보들을 기독교 전통에 어긋난 사회주의적 행태로 인식했다. WCC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이념공격과 정치공세는 1950년대 미국을 강타한 매카시즘 열풍에 기대어 힘을 얻는 듯했다. 이들은 흑색선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공격적이고 극단적인 행보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각성한 서구기독교 대중들에게 더 이상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들의 공격은 거셌으나 변화의 거대한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2. 한반도 분단, ‘또 다른 전쟁’(냉전)이 불러온 비극

해방을 맞은 한국은 세계질서가 냉전체제로 빠르게 재편되는 과정에서 직격탄을 맞아 분단체제로 들어섰다. 남한을 넘겨받은 미군정은 일제의 식민잔재를 그대로 흡수해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다. 이는 식민역사의 청산으로 제자리를 찾고 온전한 독립국가로 새로 태어나고자 했던 한국인들의 의지와 염원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엇박자는 피폐해진 한국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냈고 한국인들은 분열과 이념대결의 전장으로 내몰렸다.

한국교회는 일제 말기를 거치며 조직이 거의 와해된 상태였고 해방 후에도 쉽사리 회복하지 못했다. WCC의 참여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시도했으나, 이마저 쉽지 않았다. 대표 자격으로 감리교와 장로교 인사가 각각 창립멤버로 참석해 간신히 세계교회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WCC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반공주의 이념공격이 한국교회로 옮겨 붙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국에서는 ‘스캔들’로 끝났지만, 한국에서는 핵폭탄이 되어 회복불능의 상처를 입혔다. 식민잔재 청산을 두고 몸살을 앓았던 한국교회의 분열구도가 좌우의 이념대립으로 단숨에 바뀌었다. 파괴된 건물은 다시 세우면 되지만, 깊은 내상을 입은 민족동질성은 회복이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케 했다.

전후 국제환경은 한국기독교의 사회인식 지형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미국선교부가 공식 철수하면서 논의의 주체와 구성이 선교사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오롯이 한국교회 스스로의 선택으로 남겨졌다. 이는 한편으론 선교사들로부터의 온전한 독립을 의미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교회가 새로운 시험대 위에 올라섰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내한선교사들은 식민체제하의 국제적 고립 속에서도 한국사회가 국제사회와 소통할 수 있도록 국내외를 연결시켜준 브릿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들이 철수하자 국제사회와의 소통과 연대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논의의 이슈와 폭도 달라졌다. 한국교회의 관심이 국내문제로 좁혀지면서 점점 국제사회의 다양한 이슈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특히 친일청산 실패에 이어 전쟁과 분단으로 이어지는 상황에 봉착하면서 교파간의 갈등과 이념갈등에 빠져들었고, 이로 인해 점점 국제적 연대를 넓혀간 에큐메니칼 운동으로부터 뒤처지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국내적으로도 한국교회는 시대의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오히려 시대에 편승하는 선택을 했다. 사회통합과 치유 등 종교적 가치를 구현하기보다는 “기독교 정부”를 목표로 두고 정치권력을 발판삼아 새롭게 열린 종교시장에서 더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고자 무한경쟁에 뛰어들었다. 적대감을 증폭시키는 반공이데올로기의 모판이 되기를 서슴지 않았고 정치적 특혜를 교세확장의 기회로 삼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심지어 폭력도 불사했다. 통합보다 분열을 가속화하고, 화해보다는 적대를 통해 생존을 모색하는 방식으로 분단 고착화에 크게 공헌했다. 선교의 목적과 방향도 교회의 정치적 영향력 확장과 몸집 불리기로 재설정되었다. 이러한 선택은 집단적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는 악순환을 만들어냈다. 특히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안착되면서 이러한 흐름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는 사회적 책임을 위한 기독교연대를 고민하고 선교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한 세계교회의 흐름과 역행하는 것이었다.

 

II. 통일운동의 출발: 1970년대

 

1. 첫 이정표를 세운 7.4 남북공동선언

한국 사회에서 통일논의에 대한 역사는 분단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분단 이후 단 한 번도 끊인 적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통일운동으로 그대로 이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승만 정부 내내 반공주의에 입각한 ‘북진통일론’이 단일 지배담론으로 존재했다. 북한을 적으로 간주하고 이를 복속시키겠다는 것이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방적 당위에 머물렀다. 물론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이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감리교 권사로 강화에서 3.1운동에 적극 가담했고 해방 후에는 진보당을 이끌었던 조봉암이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4.19혁명을 한 해 앞둔 1959년 간첩혐의로 내몰려 이승만 정부에 의해 처형당했다. 한마디로 평화통일론은 죽음을 대가로 치러야 하는 위험한 ‘불온사상’으로 취급되었다.

한국사회가 통일운동을 향한 의미 있는 첫 걸음을 내디딘 것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다. 1972년 전격적으로 발표된 7.4 남북공동선언이 계기가 되었다. ‘평화통일 3대 원칙’에 합의하면서 통일한반도로 가는 첫 이정표를 세웠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 그것이다.

“1.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2.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한다.

3.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

 ‘멸공’과 ‘승공’만이 유일한 답으로 여겨지던 상황에서 남북정상의 합의로 평화통일 로드맵이 마련된 것이다. 이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내용으로 국민들은 물론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시기다. 1972년은 같은 분단국가인 독일 뮌헨에서 올림픽이 개최되고 남·북한이 모두 참가해 국제적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던 해였다. 재독 첫 한국인 개신교 목사로 교민들과 함께 했던 감리교 이영빈 목사의 기록은 갑작스러웠던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7월 4일 뜻밖에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우리들은 조국 통일의 꿈이 실현될 수 있구나 하는 흥분으로 부풀어 올랐다. 이렇게 남과 북이 통일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으니 우리 뮌헨의 동포가 양쪽 선수단을 함께 환영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인회의 태도는 몹시 실망스러웠다.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갑자기 북한 사람들을 만나는데 일종의 ‘접촉하는 두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7.4 남북공동선언이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의 산물이 아니었음은 곧 드러났다. 그해 11월 유신체제가 선포되었다. 한마디로 7.4 남북공동선언은 유신체제로 가기 위한 발판에 불과했다. 이승만 정부를 지배했던 ‘북진통일론’을 폐기하는 대신, ‘적대적 공생’의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부, 개신교 정치권, 미군정 사이의 삼각공조가 허물어진 틈을 타, 권력을 탈취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반공이념을 계승하고 경제성장을 권력기반으로 삼았다. 장기독재를 포석에 둔 법체계도 마련했다. 바로 일본 메이지유신을 모방한 유신헌법(1972)의 등장이다. 이는 국수주의를 바탕 삼은 소위 ‘한국식 민주주의’를 내걸었는데, 미국의 압력이나 국제적 간섭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평화통일 카드, 즉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대외명분으로 활용했다. 청일전쟁 승리 후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조선독립’을 명분으로 꺼내들었고, 1차 세계대전 종결 후 국제질서의 재편과정에서 미국이 유럽으로부터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해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운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4 남북공동선언은 그 역사적 의미가 적지 않았다. 첫째, 전쟁 발발 20여년 만에 제3자 개입 없이 남북한이 접촉점을 만들어냈고, 자력으로 통일한반도를 위한 미래청사진을 마련했다. 이는 이후 통일운동의 방향타 역할을 했다. 둘째,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원칙은 1919년 ‘독립대한’의 미래청사진을 확정한 3.1운동의 역사를 그대로 계승했다. 짧은 문구 안에 그 바탕이 된 대동평화사상과 정신, 실천에 대한 약속이 오롯이 담겨있다. 이는 분단 이전 민족이 하나 되어 일제에 항거하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힘을 모았던 역사를 회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에 다름 아니었다. 셋째, 해외에서 통일운동의 물꼬를 트는 마중물 역할을 했다. 꽁꽁 얼어붙은 동토와 같았던 국내에서는 통일운동에 대한 공개적 논의조차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에 해외, 특히 독일에 거주한 유학생들과 기독교 지식인들이 통일 시나리오를 준비하며 이에 착수할 수 있도록 먼저 길을 닦았다. 이들은 남한정부에서 파견한 국가정보원들의 감시와 납치의 위협을 감수해야 하는 위험을 무릅썼다. 1967년 동백림 사건이 말해주듯이, 독일에서 활동하는 해외거주 교민들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감시는 철저하고도 집요했다.

 

2. 감리교 바르티안들, 통일운동의 길을 열다

이 시기 감리교의 참여도 교회기관이 아닌 소수 개인에게 의존했다. 이영빈, 박순경 등이 대표적이다. 이영빈은 독일에서 목회자로 활동하며 통일운동의 길을 닦았고, 학자의 길을 선택한 박순경은 국내외를 오가며 통일신학을 정립하는데 몰두했다.

“나는 ‘통일신학’이라는 명칭을 1980년대 말부터 채용했으나, 통일신학에 이르는 전 단계는 긴 여정이었다. 특히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공표되자, 나는 더 이상 통일문제를 미루어 둘 수 없기에 안식년 연구교수로서 마르크스주의와 역사철학을 연구하기 위해 1974년 유럽으로 떠났다. 나는 튀빙겐대학 안에, 그리고 대학가에 있는 산더미 같은 마르크스-엥겔스 문헌들에 압도당할 지경이었는데, 당시 초기 마르크스-엥겔스의 책들을 읽었으며, 그들 사상의 광범위한 영향권을 가늠했다. 또 나는 칼 바르트 신학 계통의, 1960년대 유럽 ‘신좌파’운동의 대변자 헬무트 골비처(Helmut Gollwitzer)와 그의 후계자 Wm. Fr. Marquardt를 새롭게 발견했다.”

 두 사람은 신학수업을 시작한 해방정국의 감리교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동기로 처음 만났고, 칼 바르트(K. Barth)의 신학에 매료된 특징이 있다. 한국에 아직 소개되지 않았던 칼 바르트의 저서를 일본어 번역판으로 찾아 읽으며, 강독모임을 만들어 한국어 번역을 시도했다. 그 열매로 1950년 《복음과 율법》, 《사도신조》가 출판되었다. 불행히도 그해 전쟁이 발발하면서 보급에는 실패했으나, 아주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 WCC 채널을 통해 감리교 대표로 통일운동에 참여했던 김준영 목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1950년 6월 25일에 전쟁이 발발했다. 서울이 함락되는 것을 보고, 나는 80km나 떨어진 개성을 향해 이틀을 걸어서 갔다. 집에 있는 방공호 속에서 허혁, 이영빈, 박순경 세 사람이 공동 번역한 칼 바르트의 역작 《복음과 율법》을 독파했다. 밑줄을 그으면서 아마도 대여섯 번은 읽었을 것이다. 가슴이 벅찼으며 그리스도의 은총을 깊이 그리고 뜨겁게 맞이했다. 나로서는 어거스틴의 회개나 존 웨슬리의 얼더스케이트(Aldersgate) 체험을 바르트의 《복음과 율법》을 읽으면서 경험했다. 세 분이 번역한 《복음과 율법》에서 그의 신학이 지닌 심오함을 느꼈다. 이 번역을 이끌었던 박순경은 나의 일생을 지배한 신학사상에 영향을 준 여성 신학자다.”

 한마디로 감리교 측의 통일운동은 칼 바르트 신학의 영감과 공감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영빈과 김순환(부부), 박순경, 김준영 등은 모두 감리교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독학으로 만난 칼 바르트의 신학을 공동자산으로 삼아 통일운동에 참여한 공통점이 있다. 한마디로 이들은 한국 1세대 바르티안이었던 셈이다. 이영빈은 칼 바르트의 신학을 처음 만났던 순간을 잊지 못했다. 그의 기록이다.

“...신학적 절망 상태에서 우연히 신학의 희망을 엿보게 되었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제1차 총회에서 미국 국무장관이자 미국교회 대표단장인 존 포스터 덜레스의 냉전신학을 비판한 칼 바르트의 강연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구원사”[Man's disorder and God's design]를 접한 것이다. ‘동’은 악이고 ‘서’는 선이라고 자처하는 냉전이념은 신학이 아니라는 것, 전체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동방의 사회주의적 노력을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신중하게 보아야 한다는 것, 이렇게 동서구별을 이념적으로 절대화하지 않고 역사적 분석으로 그리고 사회적 관점에서 상대화하는 것, 서방의 자유주의와 복음의 자유와의 구별 등은 내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신학적 대답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신학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였다. 바르트를 접한 날부터 올바른 신학을 배우기로 다시 결심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우리 교회에서는 그러한 신학을 배울 수 없어 부득이 독일로 떠나야 했다.”

 칼 바르트는 히틀러의 나치즘에 순응한 독일교회에 철저한 자성을 촉구했고,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대화를 끊임없이 시도한 대표적인 신학자였다. 그의 저서에는 이미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만남에 대한 진지한 신학적 고민들이 깊이 녹아들어 있었다. 이영빈이 언급한 칼 바르트의 강연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구원사”는 WCC 창립 주제 강연으로 서구개신교의 변화를 예고함과 동시에 선교 패러다임 전환의 첫 출발점이 되었다. 한마디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심각하게 고민한 신학도들이 칼 바르트의 신학에 강하게 이끌린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피해갈 수 없는 운명적 만남이었다.

당시 냉전이 훑고 지나간 한국 사회는 대화가 아닌 대결로 치달았고, 해답을 제시해야 할 교회는 민족의 비극을 외면한 채 광란의 춤을 추며 적대감을 부추기고 다른 이념체계를 악마화 하는데 앞장섰다. 돌파구를 찾고자 시도한 젊은 신학도들은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화해 없이 민족분단은 결코 해결될 수 없음을 깨달아가고 있었지만 서구 중심적 전통신학을 떠받들던 교회와 신학교는 아무런 답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공허함과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신학교는 이런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하고 종교적으로 도피하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원래 신학적 작업을 소홀히 한 학교인데다가 냉전이념의 주류 속에서 반공십자군인 미군의 군정시대라 내가 지니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신학적 해답을 감리교신학교에서는 바랄 수 없었다. ‘서북청년회’란 테러단체가 좌익 동족을 대낮에 서울 한복판에서 타살해도 점령군 치안질서는 묵인하는 ‘흑백의 암흑시대’에 감히 입을 열 수 있는 기독교인이나 신학자는 감리교회 내 뿐만 아니라 남한 기독교계에서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신학공부를 포기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특히 한국교회의 몰역사성과 민족역사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관념에 갇혀 부유했던 신학들에 대한 실망이 컸다.

“해방 후 감리교회 내부는 ‘신사 참배’ 문제로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학교는 이 중대한 교회 역사의 자기비판과 반성 작업을 외면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교장 변홍규 박사부터 교수진 전체가 신사 참배한 사람들이었으니까!...그들의 신학은 모두 ‘역사와는 관계없는 신학’이었다. 그들의 신학은 나의 역사적 경험에서 나오는 물음에 답을 해주지 못했다.”

 물론 감리교신학교 교수진이 모두 친일인사였거나 반공주의 이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니다.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한명인 김창준 교수는 기독교 사회주의를 표방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한 내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했고 결국 월북을 선택했다. 미군정을 등에 업은 이승만 정부가 반공주의를 표방하면서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협력을 모색했던 인사들은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가 아주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들에게 영향을 받은 소수가 칼 바르트 신학을 통해 통일운동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 몽양 여운형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박순경은 당시 경직된 감리교회와 감리교신학교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해방과 분단에 부딪치면서 나는 나의 존재 깊이에서부터 들려오는 말을 들었으니 그것은 ‘그리스도교와 공산주의는 만나야 한다. 그것은 역사의 필연이다!’라는 외침이었다. 물론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직관했을 뿐, 이해할 수는 없었다...1946년 나는 학력 미달로 감신대(당시 감리교 협성신학교, 전문대) 전수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정치계의 한 여론조사 때, 나는 몽양 여운형 선생이 주도하던 ‘인민공화국’을 지지한다고 표명했다. 그것은 “빨갱이 마귀가 거룩한 하나님 동산에 틈타 들어왔다”는 물의를 일으켜 쫓겨날 지경이었으나, 윤성범 교수를 비롯한 학생 서너 명의 변호에 의해서 축출되는 일은 모면했다. 나는 처음으로 한국교회의 반공이라는 벽에 부딪쳐, ‘한국교회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 하는 물음을 끌어안고, 한없이 어렵고 먼 신학의 길을 걸어왔다.”

박순경의 경험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당시 한국교회가 시민사회의 요구를 대변하기는커녕 그 정서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같은 해인 1946년 9월 미군정이 8천 명의 남한 주민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경제체제의 경우 자본주의를 선호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13%에 불과했고, 사회주의 70%, 공산주의로 답한 사람이 10%였다. 이는 일제 식민시대를 거치며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해방 후 경제파탄 속에서 남한사회에 사회주의 사상이 쉽게 전파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라는 분석이 따른다. 실제로 해방정국에서 일제의 식민착취에 더하여 친일을 대가로 일본정부의 특혜를 받아 부를 축적한 상인·지주계급이 경제를 독점해 토지재분배 문제가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로 떠올랐다. 정리하면, 초기 감리교의 통일운동 참여는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대화를 끊임없이 촉구한 칼 바르트의 신학에 매료되었던 1세대 바르티안들의 개인적 도전에 힘입은 바가 크다.

 

III. 통일운동의 진일보: 1980년대

 

1. 세계교회와 협력하다

남북정상이 정치적 에드벌룬으로 띄운 한반도의 통일구상을 지속적인 대화가능성으로 구현해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다. WCC와 해외거주 한인기독교인들이 팔을 걷어 붙였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시작이 된 ‘광주학살사건’이 세계에 알려지며 큰 충격을 주었고 해외교민들뿐 아니라 세계교회를 움직인 모멘텀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관심 차원에 머물렀던 통일문제가 세계교회의 논의 테이블에 올랐다.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본격적인 산업화가 진행되고 경제도약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국가주도 경제성장정책은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부작용을 야기했다. 도시빈민층의 급증, 열악한 노동환경과 노동착취로 인한 사회 갈등, 부의 불평등,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말살 등 총제적인 문제들이 분출되며 압축성장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했다. 1970년 감리교 청년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사건이 노동현장의 열악함과 노동자들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한 경제정책의 폭력성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이에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에 힘입어 장기집권 체제를 구축한 박정희 군사정권에 항거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갔다. 그 틈에서 통일논의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실제로 1970년대 민주화운동은 통일운동과 연계되지 못했다. 한마디로 ‘선 민주화-후 통일’ 프레임이 작동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선 개발-후 통일’ 프레임과 유사한 흐름을 갖는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해외교민사회와 한국 사회가 ‘선 민주화-후 통일’ 프레임에서 깨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광주의 학살이 미국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모두가 큰 충격을 받았다. 세계 언론을 통해 소식을 먼저 접한 해외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이영빈 목사의 회고다.

“...광주 비극을 겪으면서 비로소 미국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은 남한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옹호하는 우방이 아니라 미국의 지배권의 안보를 위하여서는 이를 능히 희생하는 나라라는 사실을 이제야 인식하게 되었다...이런 새로운 인식이 확립되면서 우선 외세, 즉 미국에서 민족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운동 방향이 정립되고, 민족이 자주하려면 외세에 의해 분단된 조국의 남과 북이 빨리 통일되어야 한다. 조국통일은 남, 북, 해외의 민족연합으로서 비로소 성립된다.”

 1980년 9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기통회)가 조직되었다. 그 뿌리는 1978년 발족된 ‘민주민족통일해외한국인연합회’(한민련)였다. 이들은 제3지대에 머물며 남북 간에 “화해와 평화의 다리”가 되고자 했다. 이를 함께 주도한 이영빈은 월간저널 <통일과 기독교>를 발행하며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화해를 설득하고, 그 필요성을 교민사회와 세계교회에 적극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상세한 기록으로 남겼다.

“민주와 통일은 쌍둥이 형제와 같아 ‘선민후통’이니 ‘선통후민’이니 하는 전후질서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한민련의 3대 운동 중 통일운동을 활발하게 만드는 일원으로 우리 기독자 회원들은 1980년에 ‘기통회’를 발족하고 1981년 평양을 찾아가서 기독자와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통일대화를 시작할 것을 제의하였다. 북쪽의 적극적인 대응으로서 1981년 빈 에서 제1차 통일대화, 1982년에는 헬싱키에서 제2차, 그리고 제3차는 1983년 또다시 빈에서, 1985년에도 빈에서 제4차 대화를 가지게 되었다.”

 해외한인기독자들의 각별한 노력으로 1981년 6월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첫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평양에서는 북한 측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초청을 받아 방문한 해외기독자대표 이화선, 이영빈, 김순환이 조국통일을 위한 기독자간 대화를 이어가기로 합의했다. 서울에서는 한국과 독일교회 대표들이 “분단국에서의 그리스도 고백: 죄책 고백과 새로운 책임”이란 주제로 한독기독교교회협의회를 열어 양국 교회의 긴밀한 협력을 약속하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안에 통일문제 연구기관을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전자가 통일 당사자 간 민족연합의 의미를 담았다면, 후자는 WCC 채널을 통해 세계교회의 연대와 협력을 이끌어내고 통일을 위한 논의구조를 확대시키는 의미가 있었다.

이후 통의논의는 두 채널을 기반으로 다각적으로 이루어졌다. 평양에서 합의된 북과 해외 기독자간 대화는 1981년 11월부터 1985년까지 오스트리아 빈과 핀란드 헬싱키 등에서 4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전쟁 직후인 1956년 일찍이 독일로 건너간 이영빈이 칼 바르트와 함께 평화운동 실천에 앞장선 독일교회의 기독교지성들과 만나며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구축한 휴먼 네트워크가 있어 가능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독일에서 활동한 첫 한국인 개신교 목사였다. 해외에서는 늘 교민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모이고 교회가 한인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한 전례로 미루어보아도, 한인사회 전체를 아우르며 통일운동을 이끈 그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북한 방문 후 독일교회에 협력을 요청했고 독일교회는 만남 장소와 경비까지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WCC도 비공식적인 형태로 지원에 나섰다.

서울에서 시작된 모임은 WCC를 통해 세계교회가 남북한 교회대표를 모두 초청한 ‘도잔소 회의’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논의구조가 빠르게 확대되었다. 우선 미국교회가 통일운동에 합류했다. 1984년 개최된 3차 한북미교회협의회에서 한반도를 분단시킨 나라 중 하나가 미국임을 명시한 공동성명이 채택되었다. 이를 통해 미국교회는 한국교회와 함께 한반도 통일을 위한 공동책임을 져야한다고 밝혔다. 197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결성된 ‘한국 민주화 기독자동지회’도 힘을 보탰다. 이들은 통일문제를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시아의 평화’라는 개념으로 확장시켰고, 안전한 공론화를 위해 WCC에 협력을 요청했다. WCC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 WCC 산하조직인 국제문제위원회가 1984년 10월 일본 도잔소에서 ‘동북아시아 평화와 정의 협의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일명 ‘도잔소 회의’다. 한국감리교회를 대표하여 당시 서병주 감독과 함께 도잔소 회의에 참석했던 김준영 목사의 증언(2001년 8월)이다.

“한국 대표 가운데는 회의 벽두 북한 대표가 올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듣고 귀국해버린 사람도 있었지요. 결국 북한 대표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대신 조총련을 통해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걸 읽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장시간 토론을 벌였고 읽지 않기로 하고서야 회의를 시작했어요. 그만큼 한국 대표들의 ‘레드 콤플렉스’가 강했던 겁니다. 북쪽 사람과 접촉만 해도 반공법에 걸려 들어가던 시절이니 어쩔 수 없었지요. 그러나 도잔소 회의를 통해 한국교회 대표들이 깨달은 것은 북한 대표들과의 만남은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도잔소 회의는 통일논의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크게 두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이듬해인 1985년 북한 측 기독교 채널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초청을 받아 처음으로 세계교회 대표들이 북한을 공식 방문하게 되었다. 둘째, 이 과정을 통해 남북한 교회대표들이 직접 만날 수 있는 역사적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 열매로 1986년부터 1995년까지 4차에 걸쳐 남북교회 대표들이 직접 만나 대화의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이 일명 ‘글리온 회의’다. 첫 모임을 스위스 글리온에서 갖게 되어 붙여진 이름인데, 1차 글리온 회의에는 북한 측 대표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4인과 남한 측 대표로 NCCK 6인을 포함해 22명이 참석했다. 이는 분단 30여년 만에 남북민간교류의 첫 페이지를 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4일간 열린 1차 글리온 회의에 참석한 남측 NCCK 대표는 김소영, 김봉록, 강문규, 김준영, 이영찬, 김윤식 등이었다. 그중 김봉록과 김준영이 감리교를 대표했다. 감독이었던 김봉록 목사의 증언이다.

“모두가 지쳐 있었고 성찬식만 끝나면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착잡한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희랍정교회에서 나온 주교가, ‘지금 봐서는 남북통일이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지만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38선이 문제겠는가? 라고 하였어요. 그 말이 우리 마음을 움직였어요. 그리고 성찬 집례자 미국교회협의회 엡스(D. Epps) 목사가 ’성찬 초대‘ 순서 중에 화해와 평화의 인사를 나누라고 하였어요. 처음에는 가볍게 악수하는 정도로 시작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분위기가 고조되어 서로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어요. 우리보다 북쪽 사람들이 더 울었던 것 같아요. 그 순간 마음이 하나가 된 겁니다. 성령의 역사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장면이었지요.”

이 시기 통일운동은 민족 간의 대화시도가 제3지대에서 이루어진 특징을 갖는다. 분단체제 안에서 남북 간의 긴 공백이 하루아침에 메워지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 날로 높아지던 민주화운동에 대한 열망과 통일운동이 연동되면서 남한의 전두환 정권이 ‘국가보안법’을 내세워 통일논의를 철저하게 차단하고 탄압했다. 결국 제3지대에서 지속적인 대화의 공간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채널과 국제 네트워크를 가진 WCC가 적극 협력하고 나섰기에 가능했다.

 

2. 외면과 탄압 속에 피어난 통일신학

해외에서 먼저 통일한반도를 위한 대화의 장이 마련하자, 국내에서도 대화에 합류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해외와 달리, 국내에서는 ‘국가보안법’을 앞세운 반공주의가 길목을 막아섰다. 통일이라는 단어가 여전히 금기시되었다. 아니 금지된 언어였다. 결국 세계교회(WCC)의 채널을 가진 NCCK가 길을 여는 통로가 되었다. 1985년부터 매년 ‘통일문제협의회’를 개최해 국내에서 통일을 위한 대화논의를 이어갔다. 그 첫 열매로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즉 이른바 ‘88선언’이 탄생했다. 이 선언의 역사적 의미는 적지 않았다.

첫째, 통일운동의 첫 이정표가 된 7.4 남북공동선언의 3대 원칙인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계승함과 동시에 ‘인도주의’과 ‘민주적 참여’ 원칙을 추가하여 한 단계 진화된 형태의 이정표를 다시 세웠다. 국가가 처음 제시한 청사진을 민간에서 이어받아 새롭게 발전시킨 의미가 있다. 둘째, 반공주의에 내포된 증오와 적개심을 죄로 고백함으로써 오랫동안 당연시되었던 남한교회의 이념적 근간을 흔들었다. 이는 NCCK로 연결된 세계교회와 반공주의를 포기할 수 없었던 한국의 기성교회들 사이에 무시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함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통일운동이 새로운 환경을 맞는 위기와 도전의 씨앗이 되었다. 1990년대 ‘북한선교론’의 등장이 대표적이다. 셋째, 지속적인 대화와 논의를 통해 마련된 통일구상을 구체적인 현실로 가져가기 위한 실천방안들이 제시되었다. 새로운 시작의 의미로 해방 50주년인 1995년을 ‘평화와 통일 희년’으로 삼자고 제안했다. 한마디로 ‘만남’에서 ‘대화’로, ‘대화’에서 ‘실천’으로 한 단계 더 나간 셈이다. WCC가 이에 화답했고, 1988년 11월 남·북 교회대표와 해외 및 세계교회 대표가 함께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글리온 선언”을 발표해 이를 공식화했다.

 

“1. 1995년을 “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하고 매년 8·15 직전 주일을 공동기도일로 지킬 것.

2.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원칙을 재확인.

3. 통일의 주체는 남북의 민중 당사자임을 확인.

4.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한(조선)반도의 통일이 이룩되어야 함.

5. 양쪽으로 갈라진 민족 당사자 간 신뢰성 구축.

6. 군비의 대폭 감축과 평화협정으로의 전환 및 불가침선언의 채택.

7. 이산가족의 재회와 남북 간의 각종 인도주의적 교류 추진.

8. WCC, 조선그리스도교련맹, NCCK의 긴밀한 협조.”

‘선 민주화-후 통일’ 공식이 깨지기 시작한지 10년도 안 되어 이룬 성과요 쾌거였다. 한국교회가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이 연동될 수밖에 없고 이는 분단체제의 극복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1980년대 중반이다. 1984년 NCCK 멤버인 감리교는 한국선교 100주년 기념대회를 열고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한반도의 40년에 걸친 분단의 비극을 직시하면서 어떤 형태로건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조속한 시일 내에 조국통일이 실현되기를 갈망한다. 이것은 자유와 인권에 기초한 민주적인 정치제제의 확립, 민중을 기초로 한 정의로운 사회실현을 목표로 해서 성취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형태의 독재주의도 배격한다. 오랜 역사를 통해 국제정치에 희생되어 온 우리 조국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이제는 뚜렷한 민족적 주체성을 확립하여 강대국들의 패권주의를 배격하고 어떤 형태의 살생이나 전쟁도 거부하는 입장에서 평화적인 조국통일을 위해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전력을 다할 것이다.”

 

국내의 경우, 철저한 언론통제로 광주학살의 역사적 진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분단체제에 대한 새로운 각성도 늦어진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의 폭압정치 아래서 교회의 공식입장을 당당히 밝힌 것임을 고려할 때, 감리교가 시대의 요구에 침묵하지 않고 나름의 목소리를 내온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장로교 통합 측에서도 1886년 총회를 열고 분단의 지속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은 모든 원수 관계를 없게 하고, 화해의 대업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민족을 화해시키고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를 발표했다. 이는 통일문제를 언급한 첫 신앙고백서로 평가받는다. 기독교장로회의 경우, 이보다 앞선 1980년에 처음으로 통일을 교회의 선교 과제로 천명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공식화한 선언이 공동체의 지속적 대화에 기초하거나 공감대를 형성한 합의의 결과물로 보기는 어렵다. 분단체제가 만들어낸 ‘적대적 공생’에 편승해 군부독재정권을 유지하고자한 정치권력 아래서 개인적 차원이든 조직적 차원이든 통일에 대한 공개적 대화와 논의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따라서 이 시기 통일에 대한 국내교회의 공식선언은 교회대표들의 입장이 짙게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통일한반도를 위한 대중운동이나 의식공유를 위한 사회적 공간을 마련하기 어려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NCCK의 멤버교회로서 갖는 공식 입장과 반공주의를 극복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한 교회대중 사이에 이념적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엄연한 현실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시대에 대응하는 한국교회는 양분화된 흐름을 보였다. 대다수 기성교회들은 경제성장 논리에 편승해 교세확장에 나섰던 반면, 에큐메니즘을 공유한 기독교 지성들과 청년조직, 사회선교단체들은 NCCK를 주축으로 도시빈민, 노동자, 농민 등 경제적 취약 계층과 사회적 연대를 구축해나갔다. 이는 정치적 이념지형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6.25 이후 반공주의로 단일지형을 형성했던 한국교회가 독재체제에 대한 수용여부에 따라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으로 나뉘게 되었다. 보수진영은 ‘국가조찬기도회’와 ‘대규모 신앙집회’라는 종교적 기제를 통해 국가권력과 대중권력을 동시에 관리해 나갔다. 정부가 내세운 성장 이데올로기는 경제적 풍요를 갈망한 대중들의 욕망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산업화 물결에 편승한 교회들은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고 성장과 부흥에 몰두했다. 전국단위의 부흥집회 열풍에 기대어 1970년대 중반부터 신도 늘리기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마치 새마을운동을 벤치마킹 한 듯, 목표달성을 위해 교회전체가 내달렸다. 물론 이런 흐름은 시대가 바뀐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교회는 이를 연료 삼아 성장가도를 달렸고, 1990년대 대형교회들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물론 ‘평화적 공존’을 지향한 세계교회들의 에큐메니칼 연대와 ‘적대적 공생’의 분단체제에 편승한 한국의 기성교회들 간의 간극을 메우고자 한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시기 통일신학의 단초가 마련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통일운동의 새로운 차원이 열렸다. 감리교 신학자 박순경이 그 출발점을 만들어냈다.

“나는 통일 문제와 더불어 한국 신학으로의 전환을 궁리하고 있었는데, 1975년 독일의 동아시아 선교부가 주최한 ‘독일-한국 세미나’를 위한 강연을 그러한 전환의 계기로 삼았으며, 그 강연에서 비로소 우리 민족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민족분단과 통일 문제를 한국 신학의 주제로 설정했다. 그 강연에서 나는 민족과 통일 문제는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외에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에 대한 연구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1976년 귀국했다.”

 

미국유학 후 이화여대에 몸담았던 박순경에게 분단문제는 오랜 관심이었고 과제였다. 하지만 그가 이를 학문의 주된 과제로 삼기 시작한 것은 7.4 남북공동선언 이후다. 그는 답을 얻고자 1974년 독일을 찾았고, 그곳에서 역설적으로 민족사의 중요성을 각성하게 되었다. 처음엔 사회주의와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칼 바르트 신학에 열중했으나 점차로 사회주의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었다. 독일에 머문 1년 반 동안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에 몰두한 이유다. 훗날 한 인터뷰에서 박순경은 “사회주의와 관련된 서적들을 당국의 간섭 없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난 ‘학문여행’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오랜 전 친구인 이영빈 목사와 재회하고 서로 다른 곳에서 같은 길을 걸어왔음을 확인하며 재발견의 시간을 갖게 된 것도 이 시기다. 박순경에게 신학자 골비처를 소개한 것도 이영빈 목사였다.

그 과정에서 박순경은 독일과 한국의 역사적 경험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한국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구신학에 종속되지 않는 한국 민족사에 뿌리 내린 신학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학문적 방향에 큰 전환점이 찾아온 것이다. 이는 그가 귀국하기 전, 그의 신학여정에 ‘정신적 지주’였던 칼 바르트의 무덤을 찾아 새 출발을 결단한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유럽에서의 1년 반을 마감할 무렵의 일화가 바로 ‘무덤순례’다. 박순경은 바젤에 있는 칼 바르트의 무덤, 키에르케고르와 칼뱅의 무덤을 차례로 방문했다. 이는 칼 바르트를 숭상했던 학문적 여정에 작별을 고하기 위함이라기보다, 이를 기반으로 앞으로 ‘한국적 신학’이라는 방향을 명확히 세워가겠다는 결심을 담은 순례였다. 유럽방문을 마지막으로 방황을 끝낸 박순경은 이후 강단을 넘나들며 ‘통일신학’을 강의했다.”

 

귀국 즉시 박순경은 한국근현대사 공부에 몰두했다.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문일평 등의 민족인사들의 논문이나 역사저서들을 “통곡하며 읽어내려 갔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그 학문적 열매로 《하나님나라와 민족의 미래》(1983) 《민족통일과 기독교》(1986), 《통일신학의 여정》(1992), 《통일신학의 고통과 승리》(1992), 《통일신학의 미래》(1997) 등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그의 통일신학과 강연은 환영받지 못했다. 교회가 외면했고 학계도 냉담했다. 그를 인터뷰한 정지영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금기시 되던 시대 상황에서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두려워했고, 쉬쉬하며 ‘박순경 변했다’고 말했다. 통일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인혁당, 남민전 사건 등을 겪으며 모두 지하에 숨어있던 때였다. 오랜 유학생활을 해온 그가 통일운동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통일’을 외치는 그가 외로운 투사처럼 보일 뿐이었다.”

 

‘강단의 학자’로 머물기를 거부하자 국가 차원의 탄압도 거셌다. 1991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준비위 결성에 참여했다는 이유와 재일대한기독교회가 주최한 ‘평화통일과 선교에 관한 기독자 도쿄회의’에서 발표한 일명 ‘도쿄 강연’이 빌미가 되어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는 주체사상과 대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국가보안법의 올무가 된 것이다. 그가 몸담았던 감리교회조차 철저하게 외면했던 박순경의 행보는 그야말로 “남한사회의 냉전 성역에 직격탄을 날리는 것”이었고, 불 섶을 이고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격이었다.” 법정에서 박순경의 최후변론 장면을 직접 참관했던 양심수후원회장 권오헌의 증언이다.

“통일운동의 이론과 실천에 앞장서 온 박순경 교수를 존경하고 공명하며 굳게 믿던 많은 사람들이 첫 재판을 지켜보기 위해 달려왔었다. 이윽고 조금은 초췌해 보였지만 빛나는 눈빛을 보이며 노교수[박순경]가 법정에 들어왔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재판부는 매우 곤혹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이날 법정을 압도한 것은 바로 박순경 교수님의 수십 쪽에 이르는 모두 진술이었다...대학 강단에서, 아니면 학술 심포지엄에서 연구 논문을 발표하는 전형적인 신학자의 모습이었다. 스스로 말한 신학적 해명은 반공기독교에 대한 비판, 민족문제와 민족복음화, 주체사상의 선교신학적 재해석, 자주 평화 통일의 전망, 혁명 원리와 신학적 재해석과 기독교 선교 등 그 어떤 국가보안법 재판에서도 볼 수 없는 심오한 사상 이론이었다.”

그의 통일신학은 교회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감리교회조차 냉담했다. 한마디로 이 시기 감리교의 통일운동은 노 신학자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처지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통일신학은 교회도 신학교도 아닌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된 법정에서 낭독되었고, 기독교 밖에서 시대를 고민한 수많은 지성과 청년들에게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박순경은 자신을 구속시킨 ‘도쿄 강연’의 일부를 2003년 감리교신학대학교가 주최한 웨슬리 탄생 300주년 기념강연에서 소개하며 감리교회의 미래과제를 던져주었다.

“반공을 넘어서는 교회선교는 남북의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주하는 교회의 사역으로서 새로운 형태의 민족선교를 의미하며, 이것은 먼저 남한교회가 북한의 사상과 체제로 접근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시도 없이 남한교회가 북한선교 운운한다는 것은 세계의 자본주의적 지배세력과 결탁해온 교회를 그대로 북녘 땅에 이식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선교는 남한교회를 갱신할 수 없고, 따라서 세계교회에 새로운 선교의 전망을 열어놓지 못한다. 교회가 어떤 사상과 체제를 절대적으로 거부하고 대립한다면, 교회는 신앙의 자유와 신적 화해의 사역을 상실한다.”

 

IV. 통일운동의 확장과 도전: 1990년대 이후

 

1. 시민사회로의 확장 v 북한선교론의 등장

교회 대표들의 연석회의 형태로 진행되었던 통일운동이 시민운동차원으로 진화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국내외 정치지형의 변화가 새로운 환경과 공간을 만들어냈다. 우선, 남한사회가 “세계화”라는 슬로건 아래 개방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을 통해 40여 년간 지속된 독재시대를 마감한 것이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학생시민연대로 대통령 직선제를 획득했고 직접민주주의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국가권력에 짓눌렸던 시민사회가 새롭게 기지개를 켜고 변화의 주체로 나서면서 국가보안법이 점점 힘을 잃기 시작했고, 이에 발목 잡혔던 통일운동에 대한 관심과 기대감도 급증했다. 동시적으로 냉전 이후 오랫동안 대결구도를 유지했던 국제사회의 패권질서에 균열이 시작되었다. 1990년 독일의 통일과 소련을 위시한 동구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붕괴가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동했다.

갑작스럽게 찾아든 정치지형의 총체적 변화는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정치적 자유를 갈망해온 시민사회에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었다. 경제성장이냐 민주주의 실현이냐의 양자택일로 늘 환원될 수밖에 없었던 이념적 대결구도에서 점차 벗어나 시민사회의 다양한 역량들을 모아낼 수 있는 새로운 미래좌표를 함께 만들어갈 기회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위기감의 총체적 분출이 이루어졌다. 급속한 해빙기에 접어든 국내외 환경이 적대적 대결구도에 오랫동안 편승하며 반공주의를 절대교리로 신봉해온 보수진영에 치명적인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특히 억압체제가 무너지면서 반공주의의 이념적 보루 역할을 자임한 보수진영의 교회들이 수면 아래 감춰진 위기감을 적극 발산하기 시작했다. 결국 통일논의가 시민사회의 관심과 실천으로 확장되면서 한국교회는 양분되는 양상으로 흘러갔다.

7.4 남북공동선언의 3대 원칙인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계승 발전시킨 NCCK의 ‘88선언’이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을 가르는 분기점으로 작동했다. 88선언은 반공주의의 기저에 흐르는 상대에 대한 증오와 적대감을 죄로 명백히 규정했다. 즉 북한체제를 민족분단의 원흉으로 인식해 일방적 적대감을 키웠던 ‘반공반북’ 프레임의 폐기를 선언한 것이다. 이에 더해 한반도의 평화체제 수립과 더불어 미군철수를 주장한 것이 다수를 차지한 보수교회의 반발을 불렀다. 반공주의 세례를 받고 미국을 ‘피의 동맹’으로 인식해온 보수진영 교회들로서는 동의는커녕 수용 불가한 주장이었다. 이들에게 북한 땅은 “사탄의 소굴”로 인식되고 있었다. 해빙기에 터져 나온 보수진영의 총체적 위기감은 결국 1989년 개신교 보수교단 연합체로 출범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세계가 해빙모드로 가던 전환점에서 오히려 한국교회는 잠재적 이념갈등이 분출되며 분화의 길로 들어섰다.

물론 88선언이 내부갈등의 요인으로만 작동한 것은 아니다. ‘반북반공’의 기치 아래 철저한 배타주의로 일관했던 보수진영에 작은 변화를 가져왔다. 보수진영 교회들이 반공주의의 이념적 틀 안에서 북한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독일 통일과 사회주의권 붕괴를 계기로 형성된 통일한반도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여, 진보진영의 1995년 통일희년 선포와 ‘남북 인간띠 잇기’ 등 시민참여형 통일운동 전개가 관심을 받게 되자, 이에 대한 대안카드로 ‘북한선교론’을 꺼내 들었다. 1990년 한기총이 ‘사랑의 쌀 나누기운동본부’를 설치해 북한에 쌀 지원하기에 나선 것이 대표적이다.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나눔운동’을 통해 북한에 식량 지원을 시도하기도 했다. 물론 이는 WCC와 NCCK를 중심으로 진행된 ‘평화적 공존’에 기초한 통일운동과 근본적으로 결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한기총이 주도한 북한돕기운동은 민족동질성 회복 차원이 아닌 세계선교의 확장 차원에서 진행된 소위 북한교회의 재건을 목표로 삼았다. 1995년 북한교회재건위원회를 조직하고 1997년 북한교회 재건백서를 발간한 이유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뚜렷해진 한국교회의 양분화는 통일운동에 새로운 도전이 되었다. 성장논리에 기대어 교회의 물적 토대를 축적해온 대다수 보수진영의 경우, 기독교의 세력확장 개념에서 북한체제를 선교 대상으로 삼았고, ‘상호존중’이 아닌 북한정권의 일방적 굴복이 통일의 첫 출발점이라고 인식했다. 대형교회들이 이를 주도했다. 정치세력화를 꾀해 국내 기반을 다지는 한편, 국외선교 활성화를 통한 종교시장 확장과 해외기반 구축에 나섰다. 북한선교론은 이러한 자본시장의 무한확장에 기댄 세계선교 프로젝트의 한 부분이었다. 사회변화보다 개인의 생활안정화를 추구한 중산층들이 교회대중으로 대거 편입되면서, 그 인력과 재력이 보수진영의 정치세력화와 해외시장 확장에 핵심연료가 되었다. 한마디로 자본에 종속된 거대교회의 탄생이 북한선교의 중요 엔진이 되었다. 이들의 북한돕기운동이 인도적 차원이 아닌 선교확장의 차원에서 이루진 것임은 김대중 정권의 대북지원정책을 ‘퍼주기’로 규정하고 이를 적극 반대해온 것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는 1997년 외환위기 사태 이후 신자유주의 물결이 대거 유입되고, 개개인의 극대화된 욕망이 시민사회의 공적가치를 압도하면서 그 위력을 더했다. 한기총이 구심점 역할을 했다. 보수정권과의 밀착관계를 강화해 정치력 영향력을 확대하고, 기득권 카르텔의 지킴이로 자처하며 스스로 반공이념의 보루가 되어 ‘평화적 공존’을 지향한 통일운동을 좌파운동으로 폄하하고 민주정부의 개혁정책들을 무력화시키는데 앞장섰다. 한마디로 사회의 공공적 가치가 아닌 ‘교회성장’과 ‘선교’라는 이름으로 교회라는 종교집단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대변했던 것이다. 이는 교회대중과 시민사회 간의 간극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이명박 정권의 탄생과정에서 정치세력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후 보수주의를 표방한 기독교 진영은 사회변화의 동력이 아닌 사회개혁의 걸림돌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한반도 통일의 최대장애물로 떠올랐다.

 

2. 감리교의 통일운동의 현주소와 서부연회 조직

개방화 시대에 들어선 후로도 감리교는 주로 NCCK 멤버교회의 공식입장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통일운동에 참여했다. 주목할 만한 사건은 1997년 9월 NCCK 총무와 국장 자격으로 김동완 목사와 김영주 목사가 평양을 방문하고 북측과 합의해 대북지원의 물꼬를 연 것이다. 이후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에 힘입어 민간 차원에서 다양한 방식의 협력과 교류가 진행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1990년대 말 20여개에 불과했던 민간교류단체가 2000년대 중반 80여개로 증가했다. 국제기아대책기구, 한민족복지재단, 남북어린이 어깨동무, 굿 네이버스, 월드비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참여확대의 흐름과 달리, 기독교의 통일운동에 대한 관심은 하락곡선을 그렸다. 통일희년을 눈앞에 둔 시점인 1994년 북한의 핵무기 이슈로 한반도의 위기가 고조되면서 10여 년 간 준비한 노력들이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또한 연이어 발생한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진보진영의 통일논의도 큰 타격을 입고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했다. 무한경쟁체제의 완전개방화가 이루어지고 한국 사회 전체가 생존경쟁으로 내몰리며 경제이슈가 모든 사회적 공유가치들을 잠식해 들어갔다. 결국 NCCK 채널의 통일운동도 새로운 고민을 떠안게 되었다. 특히 NCCK가 침체기에 빠져든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를 연구해온 손승호는 1997년을 기점으로 교단연합체로서의 조직적 상징성은 한기총에 내주고, 소수자 보호라는 가치적 상징성은 경실련 등의 신생 시민연대나 이웃종교들에 넘겨주었다고 진단한다. 사회적 가치실현을 위한 교회연대보다는 교단연합체라는 형식만을 고수하는데 그치고, 교회연대를 위한 리더십 확장보다는 교단장들의 나눠 먹기식 구조로 운영해온 것이 고질적인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통일운동이 급격히 퇴조하게 된 원인도 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NCCK의 사회적 영향력이 잦아들자, 감리교는 교단차원에서 보수진영이 주도한 북한교회 재건운동에 더 큰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독자적으로 북한선교에 나선 것이다. 교단차원에서 북한교회재건운동에 시동을 걸었다. 1991년 서부연회 재건을 결의했고 그 이듬해 박성로 감독을 초대관리자로 임명하여 서부연회를 조직했다. 1995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서부연회는 1998년부터 북한지역에 388개의 감리교회 재건을 목표로 준비하며 북한선교 홍보, 대북 인도적 지원, 북한선교 사역자 양성, 북한 선교 기금 조성 등에 박차를 가했다. 1997년부터 감리교신학대학교와 협성대학교에 북한선교 강좌를 개설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이 시기 감리교의 통일운동 참여는 NCCK 채널에 의존하는 형태에서 한 발짝도 더 나가지 못했다. 개방의 시대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교단조직 차원에서 진지한 통일논의나 정책적 고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과거 역사에 대한 성찰 없이 확장주의식 선교에 입각한 보수진영의 북한선교론에 편승해 북한교회 재건운동에 나선 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 선교’(Misso Dei)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에 형성된 일방주의 선교방식의 다름 아니며, 2차 세계대전으로 종말을 맞은 정복주의 세계관의 재연에 불과한 것이다. 이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이루어지는 북한교회 재건이나 북한선교는 박순경 교수가 앞서 경고했듯이 자본에 종속된 교회의 이식에 불과한 것으로 남한교회를 갱신할 수 없고 세계교회에 새로운 선교의 전망을 제시할 수도 없다. 더욱이 내용이 채워지지 않은 조직만으로는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기도 어렵다.

이는 감리교가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연대 기구에 창립멤버요 회원교단으로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교회가 지향한 시대정신을 함께 호흡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통일운동에 있어 확고한 정체성도 정책도 확보하지 못한 채, 목소리는 진보진영의 NCCK에 의탁하고, 몸은 보수진영에 편승하는 자기모순을 곳곳에서 확인하게 되는 이유다.

 

나오는 말: 통일한반도를 위한 제언

한반도는 이제 새로운 평화공동체로의 도약을 눈앞에 두고 있다. 통일한반도는 민족의 동질성 회복 차원을 넘어 동북아의 평화지렛대로 떠올랐다. 새로운 변화를 앞두고 마지막 진통을 겪고 있는 시점에서 감리교회는 지금까지 유지해온 소극적 태도와 과감히 결별하고 대담한 걸음을 시작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지나온 역사에서 먼저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첫째, 통일운동의 씨앗을 심은 1세대 통일운동가들의 역사를 보듬어 안아야 한다. 앞에서 살폈듯이, 1세대 바르티안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영빈과 김순환은 독일에서 세계교회를 설득하며 협력과 연대를 끌어냈고, 박순경은 국내외를 오가며 통일신학의 단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감리교회는 이들의 역사를 철저하게 외면해왔다. 이제라도 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들의 역사가 통일한반도의 미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1세대 통일운동가들이 남겨놓은 역사적 신학적 과제를 떠안아야 한다. 한편으로는 반공주의의 극복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대화가능성 연구다. 두 주제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서로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다. 이는 바로 칼 바르트가 고민했던 주제였고, 해방 이전부터 감리교가 낳은 인물 손정도와 김창준이 고민한 주제였고, 해방 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희생된 조봉암이 고민한 주제였고, 이제는 통일한반도 시대를 열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하는 산이다. 물론 이에 대한 시도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3년 10월 평양에서 개최된 ‘손정도 목사 기념 남북학술토론회’에 참석해 “손정도 목사의 생애와 종교 사상”을 발표했던 감신대 이덕주 교수가 이후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통일 이후의 신학 연구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러한 시도는 개인적 차원의 연구에 머무르고 있다. 이를 감리교의 미래신학으로 적극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는 동시에 해방 이후 그대로 덮어둔 역사를 새롭게 만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셋째, 평화와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시민조직을 활성화하고 시민운동 차원에서 실천할 수 있는 평화교육 등 다양한 콘텐츠 개발과 이에 대한 지원을 정책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 1989년 조직된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이후 고난함께)가 하나의 롤 모델이 될 수 있다. ‘고난함께’는 반독재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진행과정에서 전향서 강요를 거부해 큰 고초를 겪었던 일명 비전향 장기수들을 후원하는 활동을 벌였다. 통일은 지리적 통합을 넘어선 사상과 이념의 화해이며 정체성의 회복이고, 사회주의 신념을 가진 비전향 장기수들은 통일의 징검다리로서 존중받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이들과의 대화는 통일연습 그 자체였다. 고난함께의 활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통일의 열매가 될 미래세대를 위해 통일한반도의 주역을 위한 준비가 필요했다. 2005년부터 매년 평화·인권·통일을 주제로 1년에 두 차례씩 ‘평화캠프’를 개최하고 있다. 평화콘서트, 통일세미나, DMZ 평화기행, 청소년 인권, 평화영화제 등으로 프로그램이 구성된다. 이는 청소년 통일교육의 새로운 모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일은 한 사람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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