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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란의 시기 그리고 분리파
박효원  |  hyo1956@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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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1월 12일 (일) 03:25:43
최종편집 : 2020년 01월 12일 (일) 03:27:02 [조회수 : 2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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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끼어서 수난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폴란드도 강성했던 때가 있었다. 16-17세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1569-1795) 때다. 체제는 왕정이었지만 왕은 입법부에서 뽑았고, 귀족들의 의회가 왕권을 제한하는 입헌군주제였다. 영토는 현재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흑해 연안까지 미쳤다. 1610부터 1612년까지 모스크바를 점령한 적도 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17세기 초에 강성한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유럽을 휩쓸었던 30년 전쟁(1618-1648)에 휩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유럽은 30년 종교전쟁으로 피폐해졌지만 폴란드는 동쪽에서 번영했다.

러시아 지도를 보면, 흑해 쪽으로 흐르는 큰 강이 넷 있다. 남독일에서 동유럽을 지나 흑해로 흐르는 도나우(Donau, Danube) 강, 러시아에서 백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지나 크림반도 서쪽 흑해로 흐르는 드네프르(Dnepr) 강, 러시아 크림반도 동쪽 흑해로 흐르는 돈(Don) 강, 러시아 카스피해로 흐르는 볼가(Volga) 강들이다. 흑해 연안 우크라이나와 돈 강 하류가 넓고 비옥한데, 이곳에 공동체를 이루며 살던 코사크(Kozak, Cossack)가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슬라브어를 사용했다는 것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러시아 제국에서 자유를 찾아 이주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코사크라는 낱말이 ‘자유한 자’라는 튀르크어에서 비롯했으리라 추측한다. 이들은 선거를 통해 우두머리를 뽑았고, 합의로 결정하는 자치기구를 갖고 있었다. 반유목민이었던 코사크는 말을 타고 전투를 벌였으므로 이동이 빨랐고 용맹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정부와 러시아 황제는 서로 이들에게 물자를 제공하고 회유했다. 그래야 자신들의 영토를 넓히고 방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코사크 덕분에 북쪽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의 북진을 막을 수 있었다.

코사크는 17세기 중반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종교탄압이 이유였다. 폴란드는 가톨릭 국가였지만 코사크는 정교회를 믿었다. 러시아 황제가 코사크를 지원하자 이들은 러시아 황제에게 붙었다. 러시아 황제는 코사크를 영토 확장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1649년 러시아 황제 알렉세이 1세 (Aleksey I Romanov, 1629-1676)는 우크라이나 땅을 차지하기 위해 폴란드와 전쟁을 벌이고, 발트해 연안을 두고 스웨덴과 전쟁을 벌였다. 그는 농민들의 이동을 금하고, 농민이 지주에게 예속되는 농노제도를 실행했다. 이 때문에 많은 러시아 농민들이 자유를 찾아 코사크 땅으로 이주해 왔다.

황제의 억압과 경제적 예속으로 불만이 쌓이자 봉기가 됐다. 그 중 유명했던 것이 1670년 코사크 스텐카 라진(Stepan Razin, 1630-1671)의 봉기다. 스텐카(Stenka)는 스테판을 낮춰 친하게 부르는 이름이다. 그만큼 그는 무산자 농민들에게 친근한 지도자였다.

라진은 농민들과 돈 강에서 볼가 강으로 옮겨 갔다. 그는 의적(義賊)이었다. 부유한 상인과 배를 습격하고 귀족의 재산을 약탈해서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라진이 이끄는 코사크와 농민 세력은 마구 커져 2만 명이나 됐다. 이들은 러시아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귀족과 장교들을 처형했다. 세력은 러시아 중부까지 이르렀다. 놀란 러시아 황제 알렉세이 1세는 황태자에게 반란 진압을 명령했다. 결국 라진은 잡혀 고문을 받고 모스크바 광장에서 사지가 잘리는 처형을 당했다.

17세기 러시아에서는 다른 봉기도 많았다. ‘동란의 시기’였다.

여섯 해 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서 살았던 집 근처에 ‘라스콜니코프’의 집이 있다. 가까운 곳에 도스토옙스키가 살았던 집도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곳에서 ‘죄와 벌’을 썼다. 책의 주인공이 로디온 라스콜니코프(Rodion Raskolnikov)다. 왜 하필이면 이름이 라스콜니코프일까?

‘라스콜’은 분열, 분리라는 뜻이다. 라스콜이 고유명사로 쓰일 때는 ‘분리파 정교회 신자’를 뜻한다. 그러니까 도스토옙스키가 지은 라스콜니코프라는 주인공 이름에 특별한 의미가 없을 수 없다.

분리파는 17세기 러시아 정교회에서 떨어져 나온 신자들이다. 17세기 이후 분리파는 러시아 종교와 정신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흐름을 짚어 보면 다음과 같다.

몽골 타타르의 지배에서 벗어난 모스크바 공국은 왕권을 강화한다. 비잔틴 제국이 무너지면서 러시아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의 유산과 전통을 잇는 교회로 자부한다.

콘스탄티노플이 중심이었던 비잔틴 제국은 황제가 교회의 수장이었다. 그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부터 천 년을 이어온 동로마제국의 전통이었다. 서유럽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간 반면, 비잔틴의 전통을 이은 러시아는 왕권과 교회가 유착했다.

러시아 황제 알렉세이 1세 때 농민 봉기가 극심했다. 이 시기에 러시아 정교회는 교회 개혁을 추진한다. 교회 엘리트 사제의 개혁이었다. 이것이 교회의 분열을 야기해 많은 사제들이 정교회를 떠난다. 이들은 흩어져 민중 속으로 들어간다. 라스콜 즉 분리파가 생긴 것이다.

18세기 피터 대제의 제국이 시작되고, 모든 러시아 교회는 황제가 좌지우지했다. 교회는 서구화 됐고 세속화 됐다. 분리파는 민중 속에서 잠잠했다.

1812년 러시아로 쳐들어온 나폴레옹 군대와 전쟁을 치르면서, 분리파는 조국을 지키는데 앞장 선다. 전쟁이 끝나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난다. 논쟁은 서구파와 슬라브파로 갈렸는데, 내용은 ‘과연 러시아적인 것이 무엇이냐’였다.

도스토옙스키는 서구파의 논쟁에 휘말려 시베리아로 유형을 갔다가 슬라브파가 되어 돌아왔다. 슬라브파는 신앙의 뿌리를, 17세기 교회를 떠나 민중 속으로 들어갔던 분리파의 신앙에서 찾았다. 거기에 러시아 정교회의 순수한 신앙이 담겨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러시아 정교회가 세계를 구원할 것이라는 사상으로까지 발전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의 주인공을 라스콜니코프로 지은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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