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 동방 정교회 주교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세계 정교회의 수장이면서 제 구실 못하는 콘스탄티노플 세계총대주교를 모스크바가 좋게 볼 리 없었다. “러시아의 부와 교회의 영향력은 다른 동방 교회들을 압도하지 않는가?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정교회도 총대주교좌로 격상됐지 않은가? 그리고 지금 그들의 교세가 시들해진 마당에, 왜 모스크바에 총대주교가 있을 수 없단 말인가?” 러시아 황제와 교회 성직자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모스크바의 총대주교좌 격상은 합당하다고 러시아 교회는 믿었다.

이반 4세가 죽고 다음 황제는 아들 표도르 1세(Fydor Ivanovich, 1557-1598)였다. 그는 심약했으므로 이반 4세의 고문이었던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 1551-1605)가 섭정했다. 그는 교회의 관심이었던 모스크바 총대주교좌 설치계획을 밀어붙였다. 앞으로 차르(황제)의 대관식을 총대주교가 집전하면, 러시아의 차르는 비잔틴의 황제와 같은 권위를 갖게 될 것이었다.

러시아는 이미 정교회 국가였지만 어떤 동방 총대주교도 러시아를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1586년, 시리아 안디옥 총대주교인 여호아김 5세(Joachim V, 1553-1592)가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모스크바 성직자들은 총대주교를 환대했다. 그가 찾아간 것은 경제원조 때문이었다. 안디옥에 성당을 세우며 진 빚을 감당할 수 없었던 여호아김 5세는, 거룩한 성물(聖物)들을 가져가 러시아 황제에게 손을 벌렸다. 러시아 황제와 섭정 보리스 고두노프는 이것을 모스크바를 총대주교좌로 격상시킬 호기로 봤다. 러시아 황제도 갖가지 값비싼 선물을 줬다.

러시아 황제와 섭정은 모스크바 총대주교좌 설치를 위한 작업을 벌였다. 러시아의 궁정과 귀족들의 모습은 화려했고, 안디옥 총대주교보다 아래인 모스크바 수도대주교의 권위가 더 높아 보였다. 모스크바 교회는 생각보다 훨씬 크고 화려했다. 안디옥 총대주교는 기가 꺾였다. 큰 대접을 받았으니, 여호아김 5세는 러시아 황제의 부탁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좌 격상을 다른 총대주교들과 함께 논의하겠다고 확답했다. 그리고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호위대와 사절단을 붙이고, 그들 편에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에게까지 값비싼 선물을 보냈다.

보리스 고두노프에게는 야심이 있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좌를 성사시키고 인기를 얻은 다음, 황제 자리를 찬탈하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플 세계총대주교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좌 설치에 부정적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이미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교회를 총대주교좌로 격상시켜 주었는데, 결과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권위 약화였다. 러시아 교회는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보다 훨씬 크고 강했으므로, 직영인 러시아 교회를 독립시키면 어떻게 되겠는가?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관할 구역이 쪼그라들 것이 뻔했다. 당시 세계총대주교 테올레프토스 2세(Theoleptos II, 1585-1586)는 답을 주지 않았다. 정성을 쏟았던 러시아 황제와 러시아 정교회는 크게 실망했다.

오스만 제국 안에 있었던 총대주교직과 주교직은 술탄이 좌지우지했다. 이들은 술탄에게 많은 돈을 주고 자리에 올랐다. 자리에 오른 후에도 빚을 갚지 못하면 폐위됐다. 세계총대주교 테올레프토스 2세도 그렇게 폐위되고 교회마저 빼앗겼다.

새로 자리에 오른 세계총대주교 예레미야 2세(Jeremias II, 1586-1596)도 마찬가지였다. 파탄 난 재정을 매울 수 있는 방법은 러시아 교회의 원조뿐이었다. 1588년 예레미야 2세는 술탄의 허락을 받고 러시아로 갔다. 역사상 최초로 세계 정교회 수장이 모스크바에 온 것이다.

이번이야말로 모스크바에 총대주교좌를 만들 수 있는 기회였다. 황제는 예레미야 2세를 왕궁에 가두고 아무도 허락 없이 만날 수 없게 했다. 그리고 시리아 총대주교의 방문 때처럼 세계총대주교에게도 화려한 궁정과 교회를 보여줬다. 값진 선물과 많은 돈도 안겨줬다.

예레미야 2세는 자신이 모스크바의 총대주교가 되었으면 했다. 자신이 두 군데 총대주교직을 맡는다면 오스만 제국 술탄의 눈치를 안 봐도 됐다. 예레미야 2세는 모스크바에 계속 있겠다고 했다. 러시아 교회는 속셈을 알아채고, 장차 모스크바 총대주교는 옛 러시아 수도인 블라디미르(Vladimir)에 거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블라디미르는 모스크바에서 서쪽으로 200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다. 예레미야 2세는 당황했다.

황제는 예레미야 2세를 압박했다. 보리스 고두노프도 러시아인 총대주교를 서품해 달라고 협박했다. 예레미야 2세는 어쩔 수 없이 모스크바 수도대주교좌를 총대주교좌로 격상시켰다. 그리고 의식도 러시아 교회의 전례를 따라 거행했다. 모든 행사가 끝난 다음에야 예레미야 2세는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할 수 있었다.

1593년, 로마 교구를 제외한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총대주교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모여서, 모스크바 교구를 5번째 총대주교좌로 승인해 줬다. 드디어 모스크바 정교회가 독립한 것이다. 앞으로 황제의 대관식은 러시아인 총대주교가 거행하게 됐다. 반대로 콘스탄티노플 정교회 세계총대주교는 더욱 초라해졌다.

동쪽 정교회 국가들이 이슬람인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하고 러시아만 건재했으니, 러시아가 정교회 수호자로 자처한 것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스크바가 콘스탄티노플의 정교회 유산을 이어받고 정교회 신앙의 수호자가 됐다는데 있지 않다. 러시아 황제의 권력과 러시아 정교회의 총대주교좌 설립이 서로 밀착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은 교회가 정치 권력과 밀착하면서, 교회의 지도자들이 러시아 민중 편에 서기 보다 권력의 시녀로 자처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