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상징은 독수리다. 유럽에서 이주한 개신교인들이 시작한 나라가 미국이 이므로 성경에 나오는 독수리를 상징으로 삼았을까? 그렇지 않다. 미국 독수리 국장의 뿌리는 로마의 독수리다. 미국은 나라를 운영하는데 로마 제국을 본으로 삼는다. 다른 나라들을 효율적으로 지배했던 제국의 제도와 운영을 천착하는 것이다. 미국 정부에 외무담당 장관이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은 국무장관이 외교도 맡는다. 미국 일이 세계의 일이고 세계 일이 미국의 일이라는 발상이다.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문장도 독수리였다. 그러다가 15세기 무렵에 머리가 둘인 쌍두독수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 제국도 쌍두독수리를 문장으로 사용했다. 황제의 호칭이 카이저(Kaiser)였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의 성을 황제로 호칭했던 로마 전통을 따른 것이다.

러시아 국장도 쌍두독수리다. 러시아인들은, 러시아가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고 있어서 그런 문장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몰라서 하는 소리다. 러시아 쌍두독수리는 비잔틴 제국의 영화를 이어간다는 뜻이다. 러시아 황제 짜르(Tsar)라는 이름도 카이사르에서 비롯됐다. 아무튼 머리가 하나인 독수리든 머리가 둘인 독수리든, 이 문양을 쓰는 유럽 국가들은 제국주의 사고를 갖고 있다고 보면 된다. 과거 영화를 그리워하든지 지금 그러하든지, 그것은 제국주의적 사고다.

기독교가 전래되면서 슬라브인들은 10세기경부터 비잔틴 콘스탄티노플에 선을 대고 있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이 가장 문명화된 도시였기 때문이다. 1453년 비잔틴제국이 무너졌다. 몽골 킵차크 칸국(Golden Horde, 1240-1502)에게 조공을 바치며 살던 모스크바 공국이 지배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을 때다. 모스크바 공국이 자유로워지는 시점에 비잔틴 제국이 몰락한 것이다.

그리스 지도를 보면 북동쪽에 ‘서 있는 삼지창’처럼 생긴 반도가 있다. 데살로니가(Thessaloniki) 남쪽이다. 가장 오른쪽 반도의 끝자락에 아토스(Athos) 산이 있다. 이곳이 수도원 20곳이 자리잡고 있는 ‘아토스 자치주’다. 우리가 보통 ‘아토스 수도원’이라 부르는 이곳은 동방 정교회의 심장이다. 정치적으로는 그리스에 속한 자치주이지만, 아직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총대주교가 관할한다. 14세기부터 러시아는 아토스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아토스 수도원을 본받아 러시아에서 수도원 부흥이 일어나고, 이콘(icon)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1453년 새 로마(Nova Roma)인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 기독교 왕국이 무너진 것이다. 슬라브 교회는 이것을 종말의 징조로 보았다. 그리고 왜 무너졌는지 이유를 찾았다. 답은, 타락한 콘스탄티노플과 변절한 정교회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제 정통 기독교 신앙을 지키는 국가는 끝났는가? 슬라브 교회는 아니라고 했다. 마지막은 모스크바가 될 것이다. 그리고 루시(Rusy, Russia)인들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정통 교회와 신앙을 지키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믿기 시작했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틴 11세(Konstantinos Palaiologos XI, 1405-1453)는 오스만 터키가 쳐들어왔을 때 전사했다. 후계자가 없었다. 황제의 동생 토마스(Thomas Palaiologos, 1409-1465)는 형에게서 물려받은 옛 스파르타의 땅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전제군주(Despotate of the Morea)였다. 1460년 오스만 터키에 멸망하자 그는 이탈리아 반도로 도망쳤다. 그리고 거기서 죽었다. 그에게 딸 소피아(Sophia Palaiologina)가 있었는데 로마 교황의 보호를 받았다.

교황은 소피아를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Ivan III)에게 시집 보냈다. 그래서 1472년 이반 3세는 콘스탄틴 11세의 질녀 소피아와 혼인하게 됐다. 로마 교황의 의도가 있었을 터. 동로마가 멸망한 상황에서, 로마 교황은 가톨릭의 영향력을 슬라브인 지역으로 확대하려고 했다. 그러나 의도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모스크바 대공은 동로마 마지막 황제의 질녀와 혼인했으므로, 로마 황제를 잇는 후계자임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황제는 로마 제국과 로마 교회의 수장이었으므로, 모스크바 대공도 정통 교회인 정교회의 수장이 될 것이었다. 이반 3세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를 잇는 후계자 자격을 갖췄다는 의미로 쌍두 독수리 문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름도 카이사르의 러시아식 칭호인 차르(Tsar)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제 모스크바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전통과 권위를 이어받은 도시가 되어야 했다.

1393년 지금의 불가리아 땅이 오스만 터키에 넘어가면서 성직자들이 모스크바 쪽으로 피난 왔다. 러시아인들은 이들에게서 콘스탄티노플 소식을 들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모스크바 근처 트베리(Tvery)의 수도사 포마(Foma, Thomas)는 ‘경건한 대공 보리스 알렉산드로비치를 찬양함’이라는 글을 쓰며 ‘제3 로마’를 언급했다. 모스크바가 제2 콘스탄티노플, 즉 제3 로마라는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라트비아 쪽으로 가면 국경 근처에 프스코프(Pskov)라는 도시가 있다. 유럽으로 가는 관문이기도 하고, 철을 생산하고 제련하는 곳이어서 도시가 일찍 발달했다. 십자가를 가져가지 않으면 친하더라도 송병구 목사에게 사랑 받지 못하므로, 십자가를 구하러 프스코프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에 오래된 수도원이 몇 군데 있다. 옐리자로브(Yelizarov) 수도원 원장이었던 필로페이(Filofey)가 1510년 대공 바실리 3세(Vasili III Ivanovich)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두 로마는 무너졌습니다. 셋째 로마가 설 것입니다. 넷째는 없습니다. 누구도 당신의 기독교 왕국(Tsardom)을 대신하지 못할 것입니다.” 포마가 주장한 ‘제3 로마’를 반세기 후 필로페이가 확고히 했으므로, 이 이데올로기를 만든 주역은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이었던 셈이다.

모스크바는 제3 로마이므로 모든 정교회들이 모스크바로 모일 것이라 했다. 모스크바가 전 세계의 중심 나라가 되는 것이니, 왕의 입장에서 보면, 모스크바 공국의 왕이 전 세계의 황제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러시아의 정교회가 정치화 되고, 정치가 종교화 될 요소가 숨어 있다. 이것은 러시아가 이 세상 마지막에 기독교 국가가 된다는 유혹이고, 한 나라의 왕이 국가를 벗어나 온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제국의 황제가 된다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이다. 이데올로기에 맞추려니까, 모스크바의 언덕이 로마처럼 일곱인 것도 모스크바가 제3 로마인 근거라는 주장까지 등장했다. 교회와 목회자의 위치가 중요하다. 러시아가 타타르에 벗어나며 국가로서 태동하던 때, 사제들은 전제 군주를 떠받드는 시녀를 자처했다. 순수한 신앙 전통을 잇고 지킨다는 환상과 함께 말이다.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소비에트 연방이 출발하면서 모스크바가 제3 로마라는 주장은 잠잠해졌다. 그러다가 지금 정권에 이르러, 이 말은 다시 강력한 힘을 갖게 됐다. 이번에도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이 주장을 폈다. 그리고 물론, 교회는 정권의 대단한 후원을 받고 있다. ‘순수한 종교’라는 말만큼 어설픈 말도 없다. 예수를 믿는지 묻지도 않고, 모두 자기 교회 신자라고 하는 국가가 어디 있으며, 더럽혀지지 않는 신앙을 고수하는 교회가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 쉼 없이 변하는 시대에, 교회와 목회자는 처한 상황 속에서 복음을 찾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