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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많을수록 젊어지는 사람들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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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12월 05일 (목) 02:33:36 [조회수 : 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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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밥만 죽이며 사는 존재인가

 

일전에 동갑내기 고향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경기도 양평 양수리에 살고 있다 했다. 몇 개월 전에 전화했을 때에도 양평에 산다 했으나 그때는 양수리 아닌 다른 곳의 주택에 산다 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양수리의 자그마한 아파트에 산다 했다. 작다는 것을 강조한 것을 보니 작지 않은 큰 평수의 아파트임이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도 친구가 작은 아파트에 살지 않을 것이라는 건 분명했다. 얼마 전에 고향에 가 그 친구의 형님을 만났을 때는 그가 양평 생활을 접고 서울에 와 초대형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니까 1년도 안 되는 동안에 양평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또다시 양평 양수리로 옮겨 두 번이나 이사를 한 것이다.

자수성가하여 상당한 재력을 가지게 된 친구지만,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지내느냐 했더니 밥만 죽이며 산다 했다. 그건 비참한 거 아니냐며 말을 이으려 했으나 펄쩍 뛰며 아니라 했다. 재미나게 지낸다는 것이었다. 실은 필자도 그런 생활에 대해 말하려 했던 것인데, 친구가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필자는 사람이 나이 많아져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그냥 쉬며 즐길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의 수(壽)가 늘어 노인이 많아지자 이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노인은 어디를 가도 찬밥 아닌 쉰밥 신세가 된지 오래다. 나라에서도 사회에서도 노인은 처치 곤란한 존재로 여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생각하면 지금의 노인들은 참 억울하다. 필자의 젊은 시절에는 노인들이 나이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집에서도 집 밖에서도 공경의 대상이 되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죽을둥살둥 일을 했다. 오늘의 한국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노인들의 땀으로 일군 결과이다.

현 경제의 주역인 젊은이들도 나이를 먹지 않을 순 없다. 갈수록 수가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는다. 이대로 노인경시풍조가 속도감 있게 진행되어 간다면 그 끝은 어디일까. 노인은 경시당해야 하는 귀찮은 존재가 아니다. 어려울지라도 더불어 살아가야 할 공동운명체의 일원이다.

 

 

낡을수록 새로워지는 것

 

이러한 노인들에게 희망으로 가슴 부풀게 하는 말씀이 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16) 우리의 육체는 나이가 많아질수록 늙어 쓸모가 없어져 가지만, 그 속의 사람 즉 영적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져 젊어진다는 것이니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성경의 이 말씀보다 조금 뒤인 고후5:17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기에서의 ‘새로운 피조물’이나 ‘새것’은 같은 것으로 4:16의 ‘새로워’진 ‘속 사람’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의 ‘피조물’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떠올리게 되는데, 따라서 이 말 ‘새로운 피조물’에서는 새롭게 창조되었다는, 그러니까 재창초되었다는 의미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사람이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요3:3)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새로워진 속사람’과 ‘새로운 피조물(새것)’과 ‘거듭 난 사람’이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우리의 자아(自我)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해 새롭게 변화됨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변화란 어떠한 것일까. 한마디로 말해 우리 자신이 세상(세속)에서 하나님의 영역으로 옮겨진 상태를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가치의 중심축이 육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으로 옮겨진 것을 말한다. 고후4:16식으로 말하면 겉 사람을 위해 살던 사람이 속사람을 위해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런 현상을 가리켜 우리는 성화되었다고 한다.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니 성화되어 가고 있는 것, 거룩을 향해 진전하고 있는 것이라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거룩’이란 말 자체가 본래 ‘구별’을 의미한다. 무엇과? ‘세상(세속)’과이다. 세상과 구별되어 새로워진 속사람으로 사는 것이 거룩한 삶, 성화된 삶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하나님 안에 산다 하면서 한 발은 세상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 실은 두 발이 다 세상을 딛고 있으면서, 그러며 하나님 주변만 어슬렁거리면서 입으로만 하나님 안에 살고 있다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서 자신에게 속아 하나님 안에 살고 있다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빛의 반사체인가, 발광체인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내 안에 거하라’ 하신다. 그리고 ‘내 안에 거하면’이라는 말씀도 자주 하신다. ‘내 안에’란 당신의 뜻 안에 라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내가 너희 안에’라는 말씀도 하시는데, “너희 안에 이 맘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라고 하는 말씀도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안에 계신다는 말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의 ‘뜻’은 ‘마음’과의 치환도 가능한 말이다. 같거나 비슷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안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우리 각자는 성전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빛”(마5:14)이라 하신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빛을 낼 수는 있어도 빛 자체는 아니다. ‘참 빛’(요1:9)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기 때문이다. 더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낸다는 빛 또한 우리 자체가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내는 것이다.

나의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면, 다시 말해 나의 안에 품은 그리스도 예수의 그 마음으로 살면 그것이 바로 빛인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마513)이라고도 하시고, 우리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향기”(고호2:15)라고 하는 말씀도 있는데, 이들 ‘빛’과 ‘소금’과 ‘향기’는 본질적으로 볼 때 다른 것이 아니다. 시각적으로 말하면 ‘빛’이요, 미각적으로 말하면 ‘소금’이며, 후각적으로 말하면 ‘향기’가 된다.

로마서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몸’은 ‘육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음 절인 2절에 나오는 ‘마음’도 포함한 우리의 전존재, 즉 인격체로서의 ‘몸’을 말한다.

그 2절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라고 하는데, 그렇게 분별하여 사는 것이 우리 자신을 제물로 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산제사요, ‘영적 예배’ 즉 하나님께서 향기로 받으시는 예배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라 하신 말씀에 이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하심으로, ‘빛’을 비춤이 곧 ‘착한 행실’이요, 우리가 그 착한 행실을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박제화 된 종교의식으로서의 예배

 

우리는 형식을 갖추어 드리는 예배에 너무 경도되어 있는 경향이 있다. 심한 경우는 그런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 신자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예배는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을 예배라 생각하고 삶 자체는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하나의 박제화 된 종교의식에 지나지 않게 된다. 삶 자체를 예배로 드릴 때 우리가 형식을 갖춰 드리고 있는 예배는 참 예배가 되어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받으신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것이 있다. ‘착한 행실’ 즉 ‘행위’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믿음’이라고 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기 쉽다는 것이 그것이다. 착하다는 면만을 보면 불신자들 가운데에도 믿는 사람들 못지않은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착한 행실이나 행위로 구원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도 없다. 우리가 의롭다함은 믿음으로이지 행위로가 아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 이신득의(以信得義)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다. 순종이다. 하나님과의 바르고도 튼튼한 관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안에 들어와 살기를 바라시고 우리 안에 당신을 모시고 살기를 바라신다. 그러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이고 믿음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예수님 안에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뜻 안에 산다는 말도 되지 않는가. 그리고 하나님을, 예수님을 나의 안에 모시고 산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분의 마음으로 산다는 말도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렇게 사는 우리의 삶은 어떻게 나타나겠는가. 악한 행실로 나타나겠는가. 그럴 리는 없다.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받으시는 ‘착한 행실’로 나타날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2:26)이 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렇게 살 수 있는가. 하나님 안에 살며 그분을 나의 안에 모시고 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하여야 그렇게 하나님과의 바르고도 끈끈한 관계를 가지고 살 수 있는가. 그렇게 살고 싶다고 해서 그리 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기도,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 자체가 이미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이다. 온몸과 온 마음으로 하는 기도, 더 나아가서는 온몸과 온 마음을 다 바쳐서 드리는 기도,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과의 더 깊어질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도 또한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도의 영적 행위로 하나님의,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처음에는 기도를 도와주시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좋다. 몸과 온 마음으로 기도하게 해 주시라고, 그리고 온몸과 온 마음을 다 바쳐 기도하게 해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성령님께서는 기도의 모든 것, 기도의 내용까지도 인도해 주실 것이고, 나는 그에 따라 기도하면 된다.

그런데 기도에 또 하나 필수적인 것이 있다. 말씀, 성경말씀이 그것이다. 익히 아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주의환기를 위해 다시 한 번 말한다면, 말씀 없는 기도는 곁길로 빠지기 쉽고, 사단이 틈타기 쉽다. 그리고 말씀은 기도를 이뤄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힘도 있다. 그러기에 말씀과 기도는 기독교 신앙을 이루는 양대 산맥이요, 일주문의 두 기둥이다. 말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고, 기도 없는 신앙은 속 빈 강정이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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