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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허영과 영적 궁상
지성수  |  sydneytax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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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11월 24일 (일) 14:45:00 [조회수 : 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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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화감독의 인터뷰 기사에서 다음의 대목을 발견하고 무릎을 친 일이 있었다.

“스크린 속 허구의 세계를 구성해 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모든 실재를 깊고 넓게 아는 것이다. “

한국에서 심심해서 극장에 가서 ‘봉오동 전투’를 보았었는데 도무지 만화 같이 느껴졌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화 탓이 아니고 전적으로 나의 탓이다. 나는 영화에서 어떤 장면이든 몰입을 하지 않고 “영화니까 그렇지!” 하는 생각으로 보는데 유독 전투장면만 나오면 자동적으로 주의를 집중해서 보는 습관이 있다. 아마도 월남전에서 전투를 많이 해 본 것이 아니라 많이 보아서 그런 증세가 있는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로 볼 때 내가 겪어서 잘 알고 있는 내용이 나올 때는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된다. 그런데 영화를 찍는 데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아는 사실과 너무 다를 때는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영화가 Real 할수록 부딪혀 오는 느낌이 강해지는 법이다.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Real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신도 인간이 픽션을 꾸미는 것 보다는 논픽션으로 행동하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예식에서 자기를 찾는 것보다 삶의 현실에서 자기를 찾는 것을 좋아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전에서 수만 명이 모여서 경건, 엄숙, 장엄하게 드리는 미사 보다는 오히려 처참한 난민캠프의 현장에서 신을 찾는 사람들의 물음에 더 가까이 있지 않을까?

십 여년 전에 LA에서 네바다 사막 한 가운데에 있는 라스베가스로 가다가 사막에서 차를 세우고 한 시간 정도 머물러 기도를 했었다. 사막의 바람 소리는 어떤 장엄한 파이프 올간 소리 보다 엄숙했고 앉아 있던 메마른 모래는 어떤 장엄한 성전보다도 나를 압도했다.

30 여 전 어느 날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부천 역 앞의 재래시장에 갔다가 질척질척한 시장에서 하반신이 없는 장애인이 배에 두꺼운 고무를 대고 장갑을 낀 두 손으로 수레를 밀면서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좁은 시장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노점상을 대상으로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파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세상에 저 보다 더 거룩한 몸짓이 어디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장애인 당사자는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종교적 초월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내 삶은 내가 궁극적인 책임을 지고 살 뿐이라고 생각이 된다. 즉 삶의 초월이나 미래적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현재의 삶이 중요한 것이다. 즉 기도나 명상 보다는 삶의 실재에 부딪칠수록 절대자에게 다가가게 된다. Reality를 외면한 Spirituality라는 것은 말장난, 혹은 관념의 유회일 뿐이라는 것이다.

허영에는 물질적 허영뿐만 아니라 영적 허영도 있다. 영적 허영은 직업적 종교인들이 갖기 쉬운 것이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그들은 신도들에게는 영적 궁상을 가르치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신도들이 영적으로 궁상을 떨어야 자신의 영적 허영이 빛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폴 틸리히는 ‘존재에의 용기(COURAGE TO BE)’에서 실존세계에서 지나치게 지식적, 도덕적, 권력적, 정신적으로 고상한 척하는 교만한 인간의 비겁성을 다루었다. 이 세상의 '실존적 곤경'을 거부하는 무지하고 교만하고 위선적인 인간의 비겁성은 역설적이게도 지적, 도덕적, 권력적, 영적 교만으로 나타난다는 지적인 것이다

요즘 내 몸의 일부분에 사소한 암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부지런히 병원을 드나들게 되면서 비로소 나도 유행(?)하는 암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몸의 이곳 저곳에서 이상이 발견되면서 “기도를 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사소한 일로 신을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하던대로 하기로 했다. 즉 내 삶은 내가 궁극적인 책임을 지고 살 뿐이라는 입장이다. 부처가 임종 전에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자등명 법등명 (自燈明 法燈明’)이다. 즉

‘남에게 의지하지 마라. 너 자신에게 의지하라. 법을 등불로 삼아라. 법 아닌 것을 등불로 삼지 마라.’

기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굳건히 서고 말씀을 등불로 삼아라.’정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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