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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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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11월 24일 (일) 13:50:11 [조회수 :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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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빌2:5-11
(2019/11/24, 왕국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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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생명의 본질은 자기 비움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성령강림절기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교회력에서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왕의 이미지가 지배와 관련되기에 적절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주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심을 기억하자는 취지입니다. 지금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중심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로 살고 있나요? 비루한 일상에서 허덕이느라 마땅히 가야 할 목표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요? 예수를 믿는다는 말과 예수를 따른다는 말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예수를 우리 삶의 중심이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도 예수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론을 다루는 이들마다 반드시 인용하는 대목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7절에 나오는 자기를 ‘비워서‘(헤케노센 hekenosen)라는 표현에 들어있는 ‘케노스‘라는 단어에 근거해 케노시스 기독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 혹은 ‘겸비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자기 비움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본질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모든 생명의 본질은 ‘자기 비움’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무는 나뭇잎을 떠나보냄으로 겨울을 준비합니다. 나뭇잎을 떠나보내지 않으면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습다. 메리 페이가 쓴 어른을 위한 동화에서 나이가 많은 나무 ‘신실’은 잎이 사라질까봐 겁을 내고 있는 어린 나무 ‘기쁨‘에게 가장 좋은 일은 놓아주는 순간에 일어난다며 “내가 자연과 하나가 되는 순간, 나 역시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훨씬 큰 계획의 한 부분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려 합니다(메리 페이 글, 존 인세라 그림, <이제는 놓아줄 시간>, 이은진 옮김, 비아토르, 2019). 실개천이 모여 개울을 이루고, 개울이 다른 개울을 만나 시내를 이루고, 시내가 흐르다 강에 합류하고, 강이 흘러 바다를 이룹니다. 작은 것 속에 이미 큰 것이 있고 큰 것 속에 작은 것이 있습니다. 둘은 나뉘지 않는 하나입니다. 무릇 생명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요? 어떤 분은 그렇게 큰 세계에 당도해 작은 ‘나’가 스러지는 것을 일러 ‘초월’이라 했습니다. 자기를 비울 때 생명은 더욱 커집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도 자기를 비우시는 분이십니다.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지존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높은 차원에 그저 머물러 계시지 않습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 현실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시편 시인들은 이 사실을 깨닫고 깊이 감격합니다.

“주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어디에 있으랴? 높은 곳에 계시지만 스스로 낮추셔서, 하늘과 땅을 두루 살피시고,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셔서(시113:5-7)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철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철학자들이 시도했던 ‘신 존재 증명’을 통해 입증되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들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신’이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신은 인간들이 자기들의 바람을 투사해서 만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성서를 통해 증언된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절대자이고 지존자이신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두루 살피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의 살 권리를 회복시켜주신다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예수의 자기 비움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마음에 간직해야 할 태도를 몇 가지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 일에만 마음 쓰지 말고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아 주라는 것입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런 요구는 불합리해 보입니다.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자기 생의 무게를 감당하기도 버거운 판에 다른 이들을 돌보아 주라는 것은 좀 과도한 요구 같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정말 과도할 정도로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영혼이 납작해진 괴물들을 낳게 마련입니다. ‘갑질‘ 이야기가 도처에서 들려옵니다. 힘 있는 이들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리고 굽신거리면서도, 힘 없는 이들에게는 군림하는 태도를 보이는 이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남을 존중할 줄 모르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품는다’는 뜻의 헬라어는 ‘느끼다, 생각하다’는 뜻으로도 풀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이들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느끼고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대하시던 것처럼 대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복음서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마음을 저는 ‘공감’, ‘아낌’, ‘귀히 여김‘, ‘연약한 존재에 대한 슬픔’ 등으로 요약하고 싶습니다. 이것을 또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아가페적 사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랑, 자기를 사람들에게 기꺼이 선물로 내주는 사랑 말입니다. 우리가 이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 신앙생활의 보람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그런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 공간적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으로는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었지만, 그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종’의 대조가 극단적입니다. 마크 트웨인의 동화 ‘왕자와 거지’는 둘이 잠시 옷을 바꿔 입은 것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존재의 철저한 변화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버리는 사랑이 곧 십자가입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를 설명하면서 “그는 자기도 연약함에 휘말려 있으므로, 그릇된 길을 가는 무지한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하실 수 있습니다”(히5:2)라고 말합니다. 아까 영혼이 납작해진 사람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고통과 슬픔에 무감각하고, 돈을 매개로 하지 않은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를 맺을 줄 모릅니다. 시인 정현종 선생은 ‘두터운 삶’을 제안합니다. 두터운 삶이란 다양한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받는 삶, 영원에 잇대어 오늘을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해주신 하나님 나라가 가리키는 것이 바로 그런 삶입니다.

∙뒤집힘
어쩌면 커진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시인은 하류가 위대하다고 말했습니다. 왜 상류가 아니고 하류일까요? 하류는 상류에 비해 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저런 지천과 합류하면서 온갖 잡다한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기만 하면 더러워지지만 바다를 향해 끝없이 흐르기에 더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 추한 것을 다 가슴에 받아 안으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서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스스로 깨끗하다 여기는 종교인들은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유대교와의 갈림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기신 삶을 간략히 소개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이셨다고 말합니다. 저 낮은 자리에서 끌어올려 높은 자리에 올리셨다는 말일까요? 저는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깊이를 뒤집으면 높이가 됩니다. 바다는 가장 낮은 자리에 있지만 모든 물의 어머니입니다. 주님은 가장 낮게 처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높이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인 것은 모두 위에 군림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바탕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두터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인 것은 가장 낮은 자리에 서서 모두를 받아 안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이들은 낮은 곳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역사상의 위대한 영혼은 모두 자기 부정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맹자 고자 장구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그의 근골을 힘들게 하며, 그의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의 생활을 곤궁하게 하며, 어떤 일을 행함에 그가 하는 바를 뜻대로 되지 않게 어지럽힌다. 이것은 그의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을성 있게 하여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함이다”(天將降大任於是人也인댄 必先苦其心志하며 勞其筋骨하며 餓其體膚하며 空乏其身하여 行拂亂其所爲하나니 所以動心忍性하야 曾益其所不能이니라).

∙남강 이승훈의 경우
평안북도 정주에서 유기 그릇 장사를 하던 남강 이승훈(1864-1930) 선생은 1907년 평양 모란봉에서 열린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들은 후 삶이 바뀐 분입니다. 도산은 그때 어려움에 빠진 조국을 지키려면 옛날의 나쁜 버릇을 버리고 새 힘을 길러야 한다며 국민이 일체가 되어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그 연설에 크게 감복한 남강은 돌아가서 머리를 깎고 술과 담배를 끊기로 결심하고 도산을 도와 신민회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인재 양성을 위해 오산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는 설립자이자 교장이었고, 심부름하는 사환이자 목수였고, 청소부이자 학생이었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910년 어느 날 그는 신민회 동지들을 만나러 산정현교회에 갔다가 거기서 한석진 목사가 전한 ‘십자가의 고난’ 이야기를 듣고 신자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46세였습니다. 유교적 학식을 흠모하던 그가 개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불퇴전의 용기로 신앙적 삶을 살았습니다.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3.1운동 때도 민족 대표의 일인이 되어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가 재판정에서 한 말은 하나님의 믿는 사람의 의기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내실 때 각각 자유를 주었는데 우리는 이 존귀한 자유를 남에게 빼앗겼다. 자유를 빼앗긴 지 10년 동안 심한 고난과 굴욕이 우리를 죽음의 골짝으로 이끌었다. 일본이 오랜 옛날 한국으로부터 입은 은의를 원수로 갚되 이렇게 심할 수 있느냐. 우리는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까지 적의 칼 아래 쓰러질지언정 부자유 불평등 속에서 남에게 끌리는 짐승이 되기를 원치 않노라. 우리의 이번 일은 제 자유를 지키면서 남의 자유를 존중하라는 하늘의 뜻을 받드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1922년 7월 21일 3.1운동 민족대표로는 맨 마지막으로 출옥할 때까지 3년 4개월 20일 동안 옥중에 머물며 구약 스무 번, 신약 백 번 이상을 읽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결단했습니다. 3.1운동의 좌절을 겪으며 당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측면을 도외시한 채 도피적이고 내세적인 신앙으로 급격히 기울고 있었습니다. 지식인들 가운데는 사회주의에 빠지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남강 이승훈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가르쳤습니다. 그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겼기에 사람들의 사표가 될 수 있었습니다.(남강문화재단 편 <南岡 李昇薰과 民族運動>, 남강문화재단출판부, 1988 참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이 냉혹한 세상에 하나님 나라라는 봄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른 이들의 일을 돌보아 주려는 마음을 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더디더라도 꾸준히 우리 삶의 지향을 바로 할 때 자유와 기쁨이 스며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왕의 권세를 믿고 함부로 산다는 말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일임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그리스도라는 중심을 향해 인도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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