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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도, 죽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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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11월 10일 (일) 13:56:27 [조회수 :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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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도, 죽어도
롬14:7-13
(2019/11/10, 창조절 제11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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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가운데는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또 자기만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죽은 사람에게도 산 사람에게도, 다 주님이 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대는 형제나 자매를 비판합니까?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신다. 내가 살아 있으니, 모든 무릎이 내 앞에 꿇을 것이요, 모든 입이 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나님께 사실대로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서로 남을 심판하지 마십시다. 형제자매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

∙거칠어진 사람들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입동에 이르렀으니 이제 겨울 채비를 서둘러야 할 때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마종기 시인의 ‘겨울 기도’라는 시를 떠올리곤 합니다. “하느님, 추워하며 살게 하소서./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잊지 않게 하시고/돌아갈 수 있는 몇 평의 방을/고마워하게 하소서(하략)”.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이라는 표현 때문일 겁니다. 외로운 이들이 주변에 참 많습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의 쓸쓸함이 깊고 깊습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뒤쳐진 사람들, 뒤쳐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바심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사람들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듯 실체가 없는 공포가 사람들을 확고히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대응하기도 어렵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라는 사회학자는 이런 현실을 ‘유동하는 공포’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불안은 우리 영혼을 잠식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알 수 없는 적대감과 분노가 쌓입니다. 세계가 점점 위험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신호가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며칠 전 어느 대학의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교수로 처음 임용되었던 20년 전의 학생들과 지금의 학생들이 좀 다르냐고 묻자 그분은 서슴없이 자기 고충을 털어놓았습니다. 이전에 비해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것 같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권리가 침해되는 듯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평가를 잠시 유보하더라도 사람들의 정신적 여백이 좀 줄어든 것은 분명합니다. 정신적 허용치가 많지 않습니다. 옛날 초등학교 다닐 때 책상에 줄을 그어놓고 옆 친구가 그 줄을 침해하면 즉시 응징을 하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그저 아이들의 장난이었는데, 지금은 사회적인 일상이 되었습니다. 공정(equality)을 요구하면서도 약자에 대한 공감력을 내포하는 정의(equity)에는 둔감합니다. 미슈팟(mishpat)을 요구하는 이들은 많지만 쩨다카(tzedakah)를 살아내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각자도생이라는 살벌한 말이 우리 삶을 요약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각자 알아서 살아야 한다는 말은 참 무정합니다. 이 속에는 우정이나 희생, 돌봄이 들어설 자리가 별로 없어 보입니다. 고립감이 심화될수록 돈이나 연줄에 의존하려는 욕구가 커집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교회 공동체를 허락하신 것은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함께 살기 위해서는 나 좋을 대로 하면 안 됩니다. 다른 이들을 존중하고 아끼고 참아주고 용서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함께’의 공동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서로’(allelon)라는 단어야말로 공동체를 공동체 되게 하는 핵심어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구원의 원리도 정밀하게 서술하지만, 구원을 받은 이들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도 정성껏 설명했습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나의 행동이 교회의 덕을 세우고 있는지 늘 살피라는 것과 특권을 누리려는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생각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순간 교회는 시장통으로 변하고 맙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복 되게 하기 위해 자기를 선물로 내주신 예수님을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고백하는 이들입니다.

바울은 그런 삶을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롬14:8)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일찍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갈2:20)고 말한 바 있습니다. 나는 아직 이 말의 깊이를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나’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죽은 사람만이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내려놓으면 자유롭습니다. 더 이상 지켜야 할 ‘자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며 삽니다. 따돌림 당하지 않을까 늘 염려합니다. 다른 이들의 말과 시선에 민감합니다. 삶이 고달프다고 느끼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서는 가면을 쓰지 않아도 괜찮아야 합니다. 그래야 쉴 수 있습니다. 공동체가 건강하려면 서로 용납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자기 방식대로 고쳐주려는 마음을 일단 내려놓아야 합니다. 고쳐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이들이 늘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곤 합니다. 사람들을 자기 방식대로 동화시키지 않으면 못 견디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폭력입니다. 고향에 돌아온 동생 야곱을 반갑게 맞이한 에서가 야곱에게 “갈 길을 서두르자”고 말했을 때 야곱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형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아이들이 아직 어립니다. 또 저는 새끼 딸린 양 떼와 소 떼를 돌봐야 합니다. 하루만이라도 지나치게 빨리 몰고 가면 다 죽습니다.”(창33:13) 야곱은 그들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가겠다고 말합니다. 상대방의 속도를 배려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바도 그것입니다. 아직 깊은 믿음의 자리에 이르지 못한 이들을 보고 비웃거나 책망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인내하는 사랑으로 그들을 아껴야 합니다. 아직 복음의 자유를 온전히 맛보지 못했기에 율법의 멍에를 벗어버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저 기다려주면 됩니다. 서두르면 생명은 죽게 마련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인 한스는 명민한 아이입니다. 그는 공부에 힘쓰지만 낚시질도 즐기고 계절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도 좋아하는 아이입니다. 영재들만 들어가는 수도원 기숙학교에 들어가면서 한스는 점점 파리해져갑니다. 성적이 지상 목표가 되면서 건강한 삶을 박탈당했기 때문입니다. 헤르만 헤세는 19세기 말의 독일 교육을 은근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당시 독일 교육은 학교의 사명은 치밀하게 계획된 훈련을 통해 아이들을 사회의 바람직한 일원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교육철학을 헤세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아이들의 내면에는 거칠고 무질서한 요소들이 있다. 그것들은 위험의 불씨이므로 마땅히 제거되어야 한다. 자연으로부터 태어난 인간은 예측하기 어려운 존재이다. 미지의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이며, 길도 없는 원시림이다. 원시림을 정돈하려면 강제로 나무들을 베어 내고 다듬어야 하듯이, 학교 또한 아이들을 다듬어야 한다.”(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이순학 옮김, 더스토리, p.57)

이 폭력적인 교육 과정을 견디지 못한 한스는 결국 학교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고 맙니다. 지금 우리의 교육 과정도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고쳐주려는 마음보다 먼저 품어야 할 것은 그의 속에 있는 아름다운 가능성을 읽어내고 그것을 호명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교회는 이런 여유 혹은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해를 끼치지 말라
교회는 하나님께서 고립의 대안으로 주신 선물입니다. 교회를 가리켜 ‘의를 지향하는 죄인들의 모임’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이든 우리가 이 속에서 익혀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 방식의 사귐과 삶입니다. 택하심을 받은 이들의 삶이 어떠해야 할 지 골로새서는 아주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골3:12)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무정함과 무뚝뚝함, 오만과 사나움 그리고 성마름으로 가득 차 있지만 택하심을 입은 이들은 그런 세상 물결을 거슬러야 합니다. 이웃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누구를 대하든 친절하게 대하고,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깔아뭉개지 않고, 사람들이 머물러 쉴만한 공간을 마련하고, 자기답게 무르익어 갈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야 합니다.

존 웨슬리가 제시한 감리교인들의 생활지침은 세 가지입니다. 1. 해를 끼치지 말라(do no harm). 2. 선을 행하라(do good). 3. 하나님과의 사랑 안에 머물라(stay in love with God).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은 가장 소극적인 덕목처럼 보이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선행이 거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웨슬리는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한 지침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일단 교회 내에 갈등이 발생하면 그것을 가십처럼 소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갈등에 관련된 사람들을 얕보는 태도로 대해서도 안 되고, 사실을 왜곡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나와 견해가 다르다고 하여 깎아내려서도 안 됩니다. 이게 기독교 윤리의 기초입니다. 사탄의 전략은 ‘가르고 지배하기‘(divide and conquer)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사는 이들의 삶은 ‘결합하고 힘을 불어넣기(unite and empower)입니다.

∙신뢰 안에서
사실 이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결심만으로는 이렇게 살지 못합니다. 이런 삶은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지배할 때,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풍성하게 살아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우리 속에 평화가 있어야 다른 이들을 평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곁에는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쉽게 충고하거나 정답을 제시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저 그의 곁에 머무르십시오. 그가 홀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음악 치료를 통해 자폐아를 회복시키는 실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음악 치료사들은 아이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마룻바닥에 이런저런 악기를 놓아두고 아이들이 마음껏 가지고 놀게 해줍니다. 처음에는 쭈뼛거리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아이들은 악기를 가지고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치료사들은 아주 주의 깊게 그 소리를 듣습니다.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소리의 패턴과 리듬이 있음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치료사들은 그 패턴에 맞추어 다른 악기로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비로소 소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Rowan Williams, , New Seeds, 2007, p.83 참조)

같은 이치입니다. 심판하고 정죄하고 고쳐주려 할 때 갈등이 빚어집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긍정하고 사랑으로 감쌀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과 만난 이들이 다 변화된 것은 조금도 정죄하지 않는 큰 사랑과 만났기 때문입니다. 김춘수의 시 ‘꽃’은 호명행위의 중요성을 가르쳐줍니다.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것들이 그 이름을 호명하는 순간 내게 다가와 꽃이 된다지 않습니까. 그런데 시의 3연은 소통을 향한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 모든 이들 속에는 그리움이 있습니다. 무정한 세상이기에 그리움은 속으로만 흐릅니다. 그 그리움에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기독교인 수가 자꾸 줄어들고 있다고 걱정들이 많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전도를 아무리 강조해도 결과가 이 모양인 것은 왜일까요? 교회가 매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전도는 누군가를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매력의 감염이어야 합니다. 무정한 세상, 냉혹한 세상에 사느라 지친 이들이 찾아와 느긋한 평화를 경험하고, 함께 함의 기쁨을 누리고, 불의에 저항할 힘을 기를 때, 그리고 아름답고 창조적인 일을 함께 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친교와 나눔에 뛰어들 용기를 내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치유하려 하십니다. 이 거룩한 초대에 기쁨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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