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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송병구  |  sbkboch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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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11월 10일 (일) 01:23:48
최종편집 : 2019년 11월 10일 (일) 17:09:24 [조회수 : 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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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새 11월 중순에 접어들었다. 습관적으로 달력을 넘기다보니 이젠 시간의 속도에 대해 감각이 무뎌졌다. 속도감에 대해 적응할 만한데 쉽지 않다. 심리적 나이가 미처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 탓만은 아니다. 요즘 시간이 빠르다는 말은 젊은이들이 더 자주 한다. 엊그제 2학기가 개강을 했는데 어느새 중간고사를 치루었고, 곧 학기말이 닥친다고 비명이다. 심리적 나이는 세대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모양이다.

  마냥 어린 아이 같던 자녀들이 혼인을 한다. 또래 친구들 가정의 혼사가 절정에 이르고 있는데, 올 가을에만도 꼭 찾아야 할 결혼식이 두 자리 수에 이른다. 얼마 전까지 수능이다, 취업이다, 코앞에 닥친 현실 때문에 부모의 심신을 고달프게 했던 아이들이다. 어느새 훌쩍 자라 새 가정을 이루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훌쩍 흘러간 세월을 실감한다. 자녀 세대의 성장은 부모 세대의 변화와 맞물려있다. 다 무심히 지나간 세월의 반영이다.    

  과연 세월은 얼마나 빠른 걸까? 누군가 1초라는 세월의 속도를 수학적으로 계산하니 초속 430미터라고 하였다. 지구의 자전속도를 세월로 본 것이다. 지구가 한 바퀴 맴을 도는 속도로 세월이 흐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따지면 세월은 KTX 열차보다 5배가 빠르다는 결론이 나온다. 더 놀라운 것은 지구의 공전속도는 무려 1초에 30킬로미터라고 한다. 1년 동안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를 돌려면 그야말로 우주공간을 휙~ 날아가야 한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어질어질하다. 그렇다고 인위적으로 세월을 멈추거나, 속도를 줄일 수는 없다. 현기증이 난다고 날아가는 지구에서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 점점 빨라지는 속도감에 주눅들 일은 아니다.

  이십 년 전에 카자흐스탄을 방문한 일이 있다. 쏘련 연방에서 해체된 지 10년이 되었지만 도시는 생동감이 없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무기력해 보였다. 골목마다 사람이 넘쳐났는데 남자들은 대부분 쭈그려 앉아 한담하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일하지 않는 하루는 정말 길고, 지루했을 것이다. 바쁜 여행객이 그곳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은 느림이란 여유였다.

  당시 수도인 알마티인들 별반 다를 게 없이 한가하였다. 시내 한 복판 굼 백화점 앞 인도에서 한 사람이 꼼짝 않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지나는 사람도 별로 없었지만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그 사람 앞에는 작은 저울이 놓여있었다. 집에 흔히 있는 체중계였다. 그는 무엇을 파는 것이 아니었다. 달랑 체중계 하나 앞에 두고 몸무게를 잴 사람을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종일 손님이 있을 리 만무인데, 그는 돈을 벌기는커녕 세월을 낚고 있었다. 마치 ‘세월이 좀 먹냐?’는 태도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0년 전에 어느 날 저녁 루마니아 부카레스트에서 불가리아 소피아로 이동 중이었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 보통 신작로였는데, 마을로 접어들 때 마다 눈길을 끄는 풍경이 죽 이어지고 있었다. 여성들이 집 앞 길가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이었다. 자기 집 담장 앞에 의자를 놓고 마치 달빛을 맞이하는 자세였다. 서로 대화를 하기에는 간격이 너무 멀고, 단체행동이라 하기에는 그 의자들의 행렬이 길고 또 멀었다. 그들은 마치 마네킹처럼 정지한 채 앉아있었는데, 언뜻 보기에 대개 할머니였다. 깊어가는 밤에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과연 기다리는 사람이 있기는 한 것일까, 싶었다.

  올 여름 스페인을 방문하였다. 여러 목회자 부부와 함께 한 단체여행인데 무더위를 감수하며 옛 고도 톨레도 시내를 산책 중이었다. 수백 년 동안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간 공존의 자취를 간직해 온 톨레도는 골목골목 관광객으로 붐볐고, 모든 것이 관광 상품처럼 보일 만큼 고풍스러움이 인상적이었다.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어느 노인의 모습이었다. 그는 분잡한 거리의 가장자리에서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깨끗이 차려입은 백발의 신사는 길 가는 사람들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독서삼매경에 빠져있었다. 구경거리는 그 노인 앞에 놓인 깡통이었다. 그가 맞은 세월과 무관하게 노인은 점잖고 교양 있는 탁발자였다.

  어떤 사람에게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정지된 시간이다. 누구에게 세월은 두루마리 휴지처럼 빠른 속도로 부피감이 줄어들지만, 누구에게 시간은 기다림의 연속처럼 한도 끝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사람이 느끼는 속도감은 절반은 심리적이고, 절반은 사회적인 셈이다. 결국 세월은 금새 다녀갈 손님이 아니라, 결코 오지 않을 불청객일 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간은 느긋느긋 흘러서 문득 대림절이 초롱초롱 눈앞에 다가 왔다. 어느새 하나님의 달력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 바퀴 돌아 종점에 다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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