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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이 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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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11월 03일 (일) 13:03:23 [조회수 : 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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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이 없는 사랑
호11:1-4
(2019/11/03, 창조절 제10주, 감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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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그러나 내가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갔다. 짐승을 잡아서 바알 우상들에게 희생제물로 바치며, 온갖 신상들에게 향을 피워서 바쳤지만, 나는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죽을 고비에서 그들을 살려 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

∙참담한 현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다가올 겨울을 내다보며 떠날 준비에 여념이 없는 나뭇잎들이 아름답습니다. 철새들도 떠나온 곳을 향해 날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삶도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또는 철새처럼 홀가분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져야 하는 데, 세상은 도무지 그럴 여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가끔 전도서의 말씀을 새김질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닫지는 못하게 하셨다”(전3:11). 이 말을 붙들고 살려고 애써보지만 그래도 어수선한 세상이 안겨주는 비애까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엊그제 우리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때 벌어진 참담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바다에서 발견된 단원고 학생 임경빈 군이 저산소증으로 심각한 상황에 처해 긴급 치료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근처에 헬기가 3대나 있었지만 단 한 대도 응급상황에 대처하지 않았습니다. 해경 청장과 서해청장을 태우고 기자 브리핑장에 가느라 바빴을 뿐입니다. 임군은 헬기로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배를 다섯 번이나 바꿔 타며 4시간 41분 만에 병원에 도착했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생명보다 의전을 중시하는 관료주의가 얼마나 악마적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윗사람은 자기들이 특권을 누리는 게 당연하다 여기고,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동안 소중한 생명이 죽어간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생명 중심적 사고로 전환하기까지는 선진 사회라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스스로 우상이 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과대평가합니다. 그들이 거들먹거리며 살 수 있는 것은 숭배할 우상을 찾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공허를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돈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두려움과 공허함에 시달립니다. 그래서인지 마음의 탄력성이 줄어들면서 이웃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아낌, 돌봄, 고마움, 따뜻함이 사라지고 낭비와 배척, 원망과 차가움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삶이 고단한 것은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마음을 내려놓을 곳을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루 일을 마치는 인사
박노해 선생의 사진집을 보았습니다. 제 눈길을 끈 사진은 티베트의 농촌 마을의 한 순간을 담은 사진이었습니다. 산 아래 들판에서 농부 한 사람이 말의 목을 가만히 안고 있습니다. 마치 대지에게 절을 하듯 농부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습니다. ‘하루 일을 마치는 인사’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사진에 작가는 이런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중국의 급격한 경제 개발로 티베트에도 경운기와 트랙터가 보급됐지만 많은 티베트인은 여전히 말이 끄는 쟁기를 쓴다. 동력 기계를 쓰면 땅이 굳을 뿐 아니라 빚을 지게 되고 무엇보다 오랜 세월 식구처럼 동행해온 말이 있기에. 종일 땅을 쟁기질한 농부가 가만히 말을 안아준다. ‘이 하루도 고생 많았네. 우리 서로 수고했네. 자네가 없이는 나도 오늘 일을 못 했을 것이네. 오늘도 장하고 고맙네.’ 고단한 말도 슬며시 주인에게 기댄다.“(박노해 사진에세이 01, <하루>, 느린걸음, 2019년, p.98)

서로 의지하고 있는 말과 주인의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사람과 동물의 종차가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평화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런 평화로운 순간과 마음결이 우리에게서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대인들 문제가 없는 시대가 있었겠습니까?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께서 에덴 이후에 제 욕심껏 사느라 사뭇 폭력적으로 변한 사람을 보시며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말합니다.

창조자와 피조물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습니다. 공들여 지은 존재가 지으신 분의 뜻에 어긋나는 처신을 합니다. 이탈리아 작가인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의 모험>은 시장 바닥에서 굴러다니던 나무토막을 주워다가 목각인형을 만든 제페토 영감이 말썽꾸러기 피노키오 때문에 고생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메리 셸리가 열아홉 살에 쓴 소설 <프랑켄슈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은 빅토르라는 신비학도가 시체조각을 조합하여 생명력을 불어넣었는데, 그 괴물 때문에 결국 목숨을 잃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참 많이 벌어집니다. 인간이 만든 제도와 과학 기술이 인류에 큰 위협이 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핵폭탄, 핵시설, 인공지능, 유전자 조작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갈지 알 수 없는 세상입니다. 함께 수고한 말의 목을 껴안고 ‘오늘도 장하고 고맙네’라고 말하는 농부의 그 마음이 절실히 필요한 나날입니다.

∙고마움을 알지 못하면
오늘 본문은 반역한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의인화하여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아직 어린 아이였을 때 그를 이집트에서 불러내셨습니다. 그러나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습니다. 자기 욕심에 이끌려 우상들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창조주의 슬픔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탐욕이 제도화된 세상에서 벗어나 모두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여기며 사는 세상을 만들어보자고 이스라엘을 부르셨지만, 그들은 이방 나라의 풍요로움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입니다. 복을 준다는 우상들에게 희생제물을 바치고, 온갖 신상들 앞에 향을 피워서 바치기도 했습니다. 욕심을 하나님으로 섬긴 결과가 참담합니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사랑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저주와 사기와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다. 살육과 학살이 그칠 사이가 없다”(호4:1b-2)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만 있습니다. 기막힌 뒤집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백성들을 ‘더럽다‘, ‘못났다‘ 하며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신실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들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끔은 가시나무로 길을 막고, 담을 둘러쳐서 그 허망한 길을 찾지 못하게 하셨지만(호2:6), 그들에 대한 사랑을 끝내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죽을 고비에서 그들을 살려 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호11:3-4)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 고마움을 모릅니다. 다함이 없는 사랑을 받아 누리면서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혼자 난관을 헤쳐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 분의 은혜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이들처럼 가련한 이들이 또 있을까요? 사람이 고마움을 알지 못하면 사람 구실하기 어렵습니다.

∙나를 비우면
한때 사람들이 즐겨 불렀던 복음성가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최용덕 작사, 작곡)이 기억납니다. 시인은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살고 싶다고 노래합니다.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늘 자아가 문제입니다. 못난 자아와 욕심이 그런 성스러운 바람을 질식시키곤 합니다. 시인은 주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제게 크게 와 닿는 가사는 2절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나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 더욱 좋아하니/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하나/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받을 사랑만 계수’하는 것이 바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받을 사랑만 계수하는 사람은 고마워할 줄 모릅니다. 오히려 원망하거 불퉁거리며 삽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탓입니다. 그들은 자기 권리를 내세우는 데는 재빠르지만, 사람 도리를 하는 일에는 무지하거나 게으릅니다.

저는 매달 ‘전라도닷컴’이라는 잡지를 받아보고 있습니다. 제가 그 잡지를 좋아하는 것은 그 속에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이 들어있고, 따뜻한 정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잡지를 읽을 때마다 저는 오래된 미래를 발견합니다. 농촌 혹은 섬 지역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을 때가 많은 데, 평생 흙이나 바다를 가까이 하고 살아온 분들의 삶의 이야기, 사람들의 손때 묻은 물건 이야기들이 그렇게 정겨울 수 없습니다. 지난 9월 호의 기획 기사는 ‘모십니다, 이 자리’라는 제목으로 마을 곳곳에 놓인 의자나 평상을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그 속에 깃든 삶의 이야기도 듬뿍 담겨 있었습니다. 정읍 덕천면 상학마을 김만순 할매는 칠남매 중의 장남과 결혼했는데, 할머니는 당신의 결혼생활을 유쾌하게 증언했습니다.

“시어무니를 한 사십 년 동안을 모시고 살았제. 그 세월을 시어무니랑 나는 쌈 한번도 안하고 좋게 살았어.“ 그리 살아낸 비결은? “나만 비우문 되야.” 할매의 즉답이다. “시아무니야 시아부지야 시동생들 많은 속에서 나를 채와놓고는 못 살아. 내 마음속 뭐시든지 다 내려놓고 다 비와불어야지. 나를 비와야 그 사람 뜻이나 생각을 받을 수 있제. 내가 꽉 채와져 있으문 싸우기 마련이여.” 그렇게 나는 없었던 세월인가. “아녀. 그러고 살다본게 인자는 내 그릇이 커져불었어, 하하.”(‘욕심없는 면적-큰 팽나무 아래 째깐한 평상’, 전라도닷컴 209호, 2019년 9월, p.24-25)

‘나를 채워놓고는 못 산다‘, ‘나를 비워야 다른 이들의 뜻이나 생각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지혜자의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이것은 배워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삶을 통해 체득한 지혜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비우며 사는 삶이 손해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지나놓고 보니 내가 커지는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난과 고된 노동, 그리고 무거운 책임이라는 수도원에서 얻은 지혜가 이렇게 오달집니다. 할머니는 남편이 사람들이 오며 가며 쉬라고 팽나무 아래 만들어놓은 조그마한 평상을 무척 좋아합니다. 할머니는 푹신하라고 속에 스티로폼을 넣고 테잎으로 꽁꽁 싸매 놓은 그 평상에 할아버지의 따스한 마음이 깃들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마음이면 그만인데, 우리는 너무 냉랭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까?

∙티쿤 올람
바울 사도의 고백이 참 크게 와 닿는 요즘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고전15:10). 이런 고백은 자기를 성찰하며 사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고백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고백은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우리 삶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망가진 세상을 고치고 싶어하십니다. 티쿤 올람(Tikkun Olam)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세상을 고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망가진 세상을 고치는 것이 부름 받은 사람들의 소명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마음 시린 사람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주는 것, 지금 벼랑 끝에 선 사람들에게 다가가 설 땅이 되어 주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고치는 일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하도 소란해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잘 들려오지 않지만 사실은 세상 도처에서 아름다운 실천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시간과 재능을 바쳐 세상을 아름답게 하려는 이들 말입니다. 이악스러운 자본주의 논리로 보면 그들은 자기들의 노동력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위한 그러한 낭비야말로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삼아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돌보고 싶어하십니다. 이 거룩한 직무에 우리를 초대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약하지만 세상을 치유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우리를 바칠 때, 삶의 비애는 줄어들고, 무기력과 무의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둠의 시간을 통과하는 이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평화의 길로 이끄십니다. 그 손에 이끌리면서 덧거친 세상에 평화와 생명의 씨를 뿌리며 살아야 합니다.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져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늘 기뻐하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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