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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이 실종된 교회와 사회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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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10월 16일 (수) 10:59:35
최종편집 : 2020년 01월 20일 (월) 02:12:41 [조회수 : 1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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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우리가 지켜야 할 바람직한 도덕적 행동 규범을 중시했다. 겸손해야 한다고, 위선적인 삶을 살면 안 된다고, 소외된 자들을 도우라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했을 뿐 아니라,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몸소 자신을 희생하면서 도덕적인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법적인 죄(crime)뿐 아니라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를 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죄(sin)로 규정했다. 따라서 우리는 범법 행위는 물론,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나 주일을 지키지 못한 것 같은 도덕적인 영역의 죄까지 회개하면서 용서해달라고 기도한다. 한 마디로 기독교는 도덕의 보루다.

서구에서는 기독교가 쇠퇴하면서 사회를 이끌어가는 동력을 잃었기 때문에, 도덕이 실종되어 간다고 말한다. 그래서 한때 도덕재무장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덕의 기준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도덕재무장 운동을 벌인다고 해서 도덕의식이 회생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도덕의 근간이 되어야 할 교회에서 도덕이 실종되어 가고 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실제로 한국교회는 도덕은 고사하고 법조차도 지키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참으로 개탄할 만한 일이다. 이런 탈법적인 일이 일부 교인이나 한두 교회의 지도자들의 일탈적 행동이 아니고 교회의 대표자들이 너도나도 나서서 저지르는 것이라면 이것은 정말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계속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명성교회의 경우를 보면, 예장 통합총회에서는 1천 명이 넘는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서 세습을 금하는 헌법을 잠재하고 그 교회의 세습을 인정하기 위한 수습위원회를 결성했다고 한다. 이런 초헌법적인 일은 사회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일인데, 교회에서 이런 일을 자행하고 있으니 오늘날 교회에서 도덕은 고사하고 법조차도 힘을 잃은 것이 분명하다.  그 총회에 모인 법조차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도덕을 강조한 예수의 제자라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목사와 장로들이 이런 짓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것을 보면 교회가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기보다는 세상보다도 더 어둡다는 말이 사실인 것이 분명하다. 도대체 그들은 누구를 믿는 사람들인가? 하나님을 믿는가 아니면 김삼환을 믿는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악한 일을 획책하고 교회를 해치는 무리들을 사탄의 세력이라고 한다면, 그들이야말로 사탄의 세력 아닌가?

그들이 왜 이토록 타락했을까? 그 이유를 우리는 칼빈의 이중예절설에서 찾을 수 있겠다. 칼빈의 이중예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자와 멸망할 자가 모두 예정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구원받을 사람은 만세 전에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가 노력하지 않아도 결국 구원받도록 운명지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인간의 의지적 노력을 배제하는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하시기 때문에 도덕이란 필요 없다고 주장해왔다. 그들의 말대로,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해주신다면, 우리가 도덕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도덕무용론이 나왔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의 노력을 요구했다. 예수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했다. 이렇게 온전하여지고 의를 구하려면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산상수훈의 결론부에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행함을 강조했다.

바울 역시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한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의 내부에서 육신의 법이 끊임없이 영의 법과 싸운다고 말했는데, 이런 싸움에서 의지적인 노력 없이 육신의 법을 이길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육신의 법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했다. 육신의 법을 벗어나려고 노력한 바울은 푯대를 향해 온 힘을 다하여 달려간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언급했다.

예수뿐 아니라 바울도 우리가 육신의 법을 벗어나서 영의 법에 따르기 위해서 끊임없이 그리고 힘써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의지적 노력은 무가치하다고, 도덕은 무시해도 된다고 말해서 되겠는가? 그런 주장이 성경적일 수 있겠는가?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회개하라고 가르친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쳤다.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맨 처음 외친 것도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는 죄사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개는 의지적인 결단이 요구되는 행위다. 예수가 승천하면서 성령을 보내겠다고 말한 것을 감안하면, 요한과 예수가 회개하라고 말했을 때의 회개는 전적으로 인간의 의지적 결단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바울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했으니 예수를 믿으면 죄인인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된다고 가르쳤다. 신학자들은 이 말을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신분은 의인이 되지만 우리의 죄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한다. 루터의 말대로 우리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은 후에도 우리는 계속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끊임없이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칼빈의 이중예정론을 추종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의 말을 곡해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해주신다고, 인간의 노력은 의미가 없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는 루터의 주장과도 상통하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예수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 예수의 가르침을 중시하는 온건한 복음주의자들은 성령이 회개하도록 우리를 도우시지만, 회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지적인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어느 신학자의 주장이 아니고 예수의 가르침이다. 신학자는 자기의 편견에 의해서 오판할 수도 있고 그가 처한 상황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예수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직시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급속도로 변하는 21세기에 와서 1천 년이나 5백 년 전에 활동한 어느 신학자의 말을 금과옥조로 삼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그를 예수의 자리에 앉혀놓는, 즉 우상화하는 일이다. 우리의 판단기준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복음이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시고 내게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말하다 보면,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내게는 아무 책임도 없다. 그런 생각을 밀고 나가다 보면, 구원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가 나의 죄를 모두 사해주어서 구원받았으니 구원받은 후에 저지르는 죄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김삼환 목사를 비롯해서 교단의 헌법을 무시하고 명성교회의 세습을 인정하기로 한 예장 통합총회 총대들은 구원파적 신앙을 견지하는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미 죄사함을 받았으니 이제 무슨 짓을 해도 상관이 없다고 믿지 않고서야 어떻게 1천여 명의 교회지도자들이 모여서 헌법을 잠재하고 김삼환에게 면죄부를 주는 일을 감행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이야말로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딤전 4:1-2) 거짓을 일삼는 자들이다.

이렇게 구원파 같은 이단의 세력이 한국의 장자 교단을 장악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노하실 일이다.

이러한 도덕의 부재를 요즘 우리는 정치권에서도 본다. 여당과 야당은 막말을 하면서 서로를 비방하고 생사를 건 쟁투를 일삼고 있다. 정당들은 완전히 깡패 집단 같이 보인다. 그들에게서는 상대를 배려하는 일말의 예의도 도덕의식도 찾을 수 없다. 그렇게 행동하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일하라고 뽑아준 국회의원들이 날마다 제 밥그릇 챙기기 위한 아귀다툼만 일삼고 있으니 그들에게는 책임의식도 염치도 없다.

엊그제까지 나라를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조국의 경우, 그가 한 달 이상 버텼던 것을 보면 그에게는 책임감도 도덕의식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가 장관직에 임명되기 전부터 그의 후배며 제자인 서울대 학생들을 비롯해서 여러 대학의 학생들은 그가 강의시간이나 글을 통해서 말한 것과 그의 행위가 너무도 다르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서, 그가 위선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그가 장관직을 사퇴하면서 ‘상처받은 젊은이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그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면 대학생들이 외치는 말을 들었을 때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바로 후보직을 사퇴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의적으로 장관직을 사퇴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실제로 그는 타의에 의해서 밀려났다. 따라서 그의 언행은 시종 위선적이었다.

게다가 한때 문 대통령이 나서서 구체적인 범법행위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한 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고위공직자의 경우 부도덕해도 된다는 말인가? 도덕이란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인데, 고위공직자가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외면해도 된다면, 앞으로 이 나라는 인간다운 나라가 될 수 없다는 말 아닌가?

그러나 법을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 문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교단의 헌법조차 무시하는 교회지도자들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인들이 도덕불감증에 빠져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법은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교회의 지도자들은 도덕은 물론 법까지도 무시한다. 그렇다면 교인들은 정치인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교회의 정화를 위해서 목소리를 높여야 할 판에 교인들이 무슨 낯으로 나라를 온통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정치권을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치인들은 교인들에게 말할 만하다. ‘너희나 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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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열사 (67.135.148.12)
2019-10-17 03:09:03
굳이 잘 알지도 못하는 조국 얘기는 왜넣었을까
x나는 이 글에서 웨슬리안적 선민의식, 혹은 그냥 영적엘리티즘 밖에 읽을 수가 없다. 논리적 비약도 심하고, 무슨 지금 일어나는 일이 다 이중예정설이 문제인냥.

일하라고 뽑아준 국회의원이라고 표현했다. 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 국회의원들이 일하도록 당신은 무엇을 했나?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로 생명을 얻는다. 정치혐오나 불러일으키면서 무슨 옳은 소리인양 써놨는지, 글쓴분이 민주주의에 대해서 아주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잘 알겠다.

특히 조국 장관 사퇴에 대해 쓴 부분이 백미다. 그저 가짜 뉴스 찌라시 수준으로 알면서 왜 여기에 썼을까? 나는 공평무사하고 모든 것을 공명정대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이 기사를 보는 사람들은 그냥 쉰내나는 유튜브중독자들밖에 없다고 생각하는걸까? 혹시 본인이 그런가?

이런 이들이 교단에서 내가 목사입네 영적지도자입네 하는데 한국교회가 망해가는건 당연하다. 눈도 멀고 귀도 먼이들이 입만 살아있다.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채 끊임없이 소리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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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법규 (122.101.20.21)
2019-10-17 06:04:19
아주 시위적절한 말씀같습니다.
컬럼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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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22.100.38.174)
2019-10-16 13:17:46
명성교회 사태에 관한 다른 시각
1. 명성교회의 교회법 위반에 관하여

명성교회는 분명히 교회헌법을 변칙적으로 적용하였다. 세습 관련하여 헌법을 심히 조롱하면서 변칙세습을 단행했다.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었다면 자기가 속한 조직 즉 예장통합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예장통합을 탈퇴한 후 개별교회자격으로 세습을 단행했었어야 했다. 그러나 욕심이 과한 김삼환 일당은 변칙세습도 먹고 예장통합도 먹길 원했다. 이건 욕심이 지나친 과욕이었고 예장통합까지 김삼환 일당의 욕심에 휩쓸려가 한바탕 홍역을 치르게 하였다.

2. 예장통합의 세습 묵인 결의에 관하여

예장통합은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변칙세습을 인정하였다. 다수결로! 개별교회의 자치권과 교회헌법의 충돌이 일어나자 개별교회의 자치권을 우위에 두는 결정을 하면서 동시에 부대조건을 달았는데 ‘김하나 목사는 당분간 쉬었다가 일정기간이 지난 후 담임목사로 복귀하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김삼환 일당은 이마저도 변칙적으로 수용하여 김삼환이는 대리당회장, 김하나는 설교목사를 맡았다. 변칙세습에 한번 맛을 들인 김삼환 일당은 ‘조건부 면죄부’를 자기 입맛대로 적용하고 있다.

변칙세습 인정은 이미 지나간 버스로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현재 진행 중인 ‘조건부 면죄부’마저 조롱하는 처사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예장통합이 김삼환 일당의 똘마니가 아니라면!

3. 세습은 무조건 배척해야만 하는가?

세습의 정당성 여부는 시대에 따라 변했다.

마태복음 시절에는 예수의 핏줄을 강조하면서 예수님의 肉的세습을 기술하고 있는 등 세습에 관하여 도덕적으로 옳다, 그르다는 개념자체가 있었다고 볼 수 없다. 중세시대에 들어 왕권신수설이 맹위를 떨쳐 부작용이 극에 달하자 이에 대한 반동으로 세습에 대해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차츰 세습반대가 기세를 떨치게 되었다. 성경은 세습에 관해 중립이라면, 중세에는 세습에 관해 찬성이 대세이고, 지금은 세습에 관해 반대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세상에는 소수파가 있다. 지금도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위해 애쓰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중세시대의 정신이 옳다고 믿고 있다. 세습반대파가 다수파라는 이유만으로 소수파인 세습찬성파를 무조건 <비도덕적>이라고 규정하는 건 일종의 마녀사냥이다. 세습을 찬성한다고 해서 <비도덕적>이고, 세습에 반대한다고 해서 <도덕적>이라는 등식에는 동의 할 수 없다.

성경 어디에 세습금지규정이 있는가? 시대에 따라, 사람이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이리저리 변하는 세습에 관한 인식을 <도덕, 비도덕>으로 구분하는 건 구분하는 사람의 자유이나(어느 누구라도 세습을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할 자유가 있다는 뜻이고, 그와는 반대로 세습이 도덕적이라고 생각할 자유가 있다는 뜻이다) 이걸로 소수파를 박해하는 무기로 삼아서는 안 된다.

세습에 찬성하는 사람도 있는 데 이들은 무조건 비도덕적인가? 세습하건 세습 안하건 이런 건 자율에 맡겨야한다. 이건 김삼환 일당의 변칙세습과는 별개의 문제다.

4. 김삼환 일당은 이제라도 예장통합에서 나와 딴 살림을 차리는 게 그나마 정직하다!

교회헌법에 규정된 세습금지규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변칙적으로 세습을 단행했고, 예장통합총회에서 변칙세습에 대해 다수결로 ‘조건부 면죄부’를 주었는데 이마저도 변칙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완전 철면피 수준이다. 예장통합이 명성교회를 버리고 딴 살림을 차리던지 아니면 김삼환 일당이 딴 살림을 차리는 것이 그나마 나은 해법이라고 본다.

또 다른 결의가 나와도 명성교회가 이 결의를 변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면 서로 깨끗하게 갈라서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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