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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물과 같은 영성운동을 꿈꾸며–서울연회 5-day 영성형성 아카데미를 다녀와서
조진호  |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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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9월 30일 (월) 18:30:27
최종편집 : 2019년 10월 04일 (금) 16:05:43 [조회수 : 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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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물과 같은 영성운동을 꿈꾸며
–서울연회 5-day 영성형성 아카데미를 다녀와서


한국 교회에서 '영성'이라는 화두가 등장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대부분 영성이 무엇인지 몰랐고 관심도 없었지만 신대원 시절 수업이나 특강마다 영성이란 이름이 붙여지면 뭔가 고상한 느낌이 묻어났다. 이후 여러 모습으로 영성목회를 표방하는 목사들도 적잖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렇게 교계 여기저기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동안 영성은 어느덧 실체가 불분명하고 적잖이 피로한 용어가 되어버렸다.

 

   
 


영성의 길을 가로막는 선입관들

영성은 우리에게 익숙한 신앙성장과 매우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나 역시 영성이 무엇이냐고 물어 본다면 뭐라 확실한 대답을 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영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신앙적 선입관을 제거해야 하며 영성이 다른 곳에서 들어온 새로운 신앙적 트렌드가 아니라 기독교 역사 가운데 도도하게 흐르고 있지만 성공과 성장에 경도된 한국교회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신앙적 흐름임을 인식해야 함은 분명히 말해 두고 싶다. 기존의 신앙적 익숙함 속에서 영성을 추구할 때 많은 오해와 부작용이 일어난다.

먼저, 영성은 교회성장이나 목회의 도구가 아니다. 교회 성장을 꿈꾸며 한국교회에 가득한 수많은 세미나 프로그램 중의 하나로서 영성을 생각한다면 일찌감치 포기하기를 바란다. 아니 부디 영성만큼은 제발 그대로 두라고 빌고 싶다. 성도들이 제대로 된 영성의 길로 들어서면 아멘소리도 줄어들 것이고 교회가 더 조용해지고 침체되는 것처럼 느끼게 될 것이다. 성도들이 그 안에서 뭘 하는지는 몰라도 점점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아질 것이다. 영성은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성장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러니 제발 그만 두라. 다른 거 다 팔아도 좋다. 그러나 영성만큼은 제발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

다음으로 영성은 자기를 더 멋지고 고상한 신앙인으로 만들어 주는 도구가 아니다. 여기저기에서 ‘영성 영성’ 하다 보니 진짜 영성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분하는 신기한 능력이 생겼다. 그들은 우선 말이 없다.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웬만하면 늘 혼자 있다. 수줍어한다. 외적으로 화려하지 않다. 눈동자가 잘 움직이지 않아 인간관계나 세상물정에 둔감하다. 그 눈동자에는 눈물이 늘 고여 있는 것 같다.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가 않는다... 영성의 길을 걷다 보면 이렇게 된다.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 두라.

셋째, 영성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신앙은 드라마틱한 신앙적 경험과 급작스런 변화를 추구한다. 긍정적인 변화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영성은 이 모든 것을 거부한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무가 자라나듯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 열매가 어쩌다가 맺히게 된 것인지 도통 모른다. 그 변화와 열매에 대해 뭐라 할 말이 없다. 아니, 말하는 순간 더 이상 영성이 아니게 된다. 나무는 씨앗일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이 지상에서 완전히 산화되고 나서도 계속 나무일뿐이다.

마지막으로 영성은 침묵을 배경으로 한다. 베토벤의 마지막 심포니는 마치 우주를 가득 채우는듯한 멜로디와 화음으로 가득하다. 그에 비하면 고작 피아노 한 대로 연주되는 바흐의 평균율은 너무나 작아 보인다. 그러나 내게는 바흐의 평균율, 특히 스비아토슬파프 리히터가 연주하는 바흐의 평균율이 베토벤의 9번 교향곡 보다 더 무게감 있게 들린다. 우주적으로 광대한 침묵의 배경을 느끼지 못하고서는 바흐의 평균율을 제대로 들을 수 없다. 침묵을 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소리를 제대로 만날 수 있다. 우리네 예배 순서를 떠올려 보라. 온갖 소리로 가득하다. 소리가 없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우리는 소리에 안정을 느끼고 침묵에 불안을 느낀다. 그런 상태에서 영성을 추구해 봤자 답답해질 뿐이다.

기존의 신앙적 틀 속에 갇혀 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 자체가 아닌 비판적, 대안적 관점으로 이용하고자 했을 때 많은 부작용이 일어났다. 참된 영성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 순간과 상황 그리고 마주하고 있는 대상에 집중하기 때문에 비판적 대안적 관점으로서의 영성은 그 자체로 반영성적인 것이었다. 또한 영성이 몇몇 사람들에 의해 영적 고상함 또는 영적 허영의 도구로 사용 되는 경우를 보면서 작금의 영성적 분위기에서 한 걸음 물러나 최대한 요란하지 않게 개인적, 개 교회적 영성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영성은 무엇일까? 존 덴버는 그의 노래 ‘Perhaps Love’에서 사랑이 무엇인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누군가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구름 같은 것이라 하고 다른 누군가는 강철같이 강한 것이라 한다. 사랑은 누군가에게는 삶의 방식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느낌의 방식이다. 누군가는 사랑은 붙들어야 하는 것이라 하고 다른 누군가는 사랑은 놔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시인은 사랑이 무언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사랑에 관한 내 기억 속에는 당신이 있을 것/My memories of love will be of you’이라고 노래한다.

영성도 마찬가지 아닐까? 영성이 무언가에 관한 이야기가 많고 가르치려 드는 사람도 많지만 참된 영성적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무조건 적이고 비목적적인 깊은 사랑의 기억들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영성이란 세상의 그 어떤 무엇도 다른 무언가를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모든  신앙적인 시도와 예전들이 하나님 자체를 추구하는 신앙의 결이 아닐까 싶다. 한 마디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다른 목적을 두지 않는 신앙생활, 하나님을 통한 목적 성취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하나님만을 온전히 ‘누리는’ 신앙(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시편 34:8)이 영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들불과 시냇물

부흥 운동이 들불과 같다면 영성 운동은 시냇물과 같은 흐름과 스밈의 역사다. 들불은 뜨겁다. 눈에 잘 띄고 빨리 번지는 만큼 빨리 꺼진다. 그리고 무언가를 태워야만 전진할 수 있다. 그러나 시냇물은 주변과 온도를 같이 한다. 조용하고 잘 보이지 않지만 주변을 살려 내면서 천천히 퍼져 나간다. 너무나 자연스럽다. 영성이 이러하다. 들불은 메마른 곳에서 일어난다. 원죄에 근거한 일종의 네거티브다. 시냇물은 스스로를 나누어 주며 기어이 흐른다. 원복에 근거한 받아들임이다. 그런데 들불과 같이 퍼지는 영성이라면 그 자체로 아이러니 아닌가? 우선 한 걸음 물러서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생각지도 못했던 초청을 받게 되었다. 3년 전 목사 안수를 해 주셨던 목사님을 통해서 전농교회에서 작은 교회 목회자를 서울연회 주최 5-day 영성형성 아카데미에 초청해 주신 것이다. 감사했지만 솔직히 상당히 부담스러운 초청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한 걸음 물러선 상태였고 교회사정도 여의치 않았다. 지하 교회에 다시 물이 차 버렸다. 이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구 교회를 원상복구 해야 하는데 물이 또 다시 차 버렸으니 난감했다.

3년 전 성탄절을 하루 앞둔 날, 의정부 가난한 동네 빈 지하 교회에 부임하겠다고 호기롭게 결단을 하고 처음 문을 열었을 때 처음 나를 반긴 것은 예배당 바닥에 가득한 하숫물이었다. 현실은 그러했다. 그렇게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셨다. ‘이곳은 내가 사랑하는 나의 몸 나의 교회란다. 이곳은 작고 낮고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좇아 커지려 하고 높아지려 하고 부자가 되려고만 하는 한국교회의 그림자란다. 네가 이곳을 지켜 다오. 이곳을 보살펴 다오. 어찌 오기도 전에 떠날 생각을 하느냐? 먼저 나의 몸 나의 교회를 닦아주고 보듬어 주거라...’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다시 지하 예배당에 넘친 물을 통해 다른 이에게 넘기고 떠날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워도 다시금 닦아주고 끝까지 정성스레 마무리하라고 가르치고 계신다.

이런 상황 속에서 5일 동안의 일정에 참여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열심히 일을 하러 다니는 아내와 중학생 아들을 챙겨야 하는 것도 내 삶의 중요한 임무였다.

하지만, 안수를 받으면서 다짐한 것이 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있더라도 나에게 안수를 해 주신 목사님의 권면은 기쁨으로, 때로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따르자고 말이다. 그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닮고 싶은 마음으로 안수를 부탁드렸지만 그 분을 향한 순종의 차원만은 아니었다.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항복하고 나의 뜻을 굴복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런 다짐을 세워 뒀던 것이다.


뜻밖의 만남, 뜻밖의 은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참으로 신비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찌하든 참석하고자 할 때 생각지도 못한 큰 은혜를 주셨다.

그 은혜는 다음과 같다. 먼저 교회 크기나 연급, 학연이나 연회에 상관없이 모두 함께 서로를 영접하고 영접 받는 사랑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간 세상보다 더 위계적이고 세상보다 더 속물적인 교회 구성원들의 모습을 많이 보아왔는데 세상과 다른 교회의 참모습이 이런 것이었음을 잠시나마 누리는 귀한 위로의 시간이 되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다 가까운 깊은 사랑함의 경험이다. 10여년 전 처음 침묵기도를 배웠을 때의 경험을 잊지 못한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20분정도 침묵하며 기도를 했는데 기도를 하고 나니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너무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대부분 처음 보는 중년 남성들이었는데 말이다. 아무 말, 아무 생각 없이 침묵하며 하나님 품안에만 머물렀을 뿐인데 그런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그런 경험을 했다.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있는 그대로, 보기에 다 좋았다.

놀라운 사랑받음의 경험도 있었다. 부담스러움을 가질 틈이 없을 정도로 스텝들은 우렁각시처럼 조용하고 부드럽고 섬세하게 모든 참석자들을 섬겼다. 목회 현장에서 늘 자신을 던져 사랑하고 섬겨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닦달해 왔는데 이렇게 돌봄 받고 사랑받는 순간순간들은 그 자체로 깊은 위로가 되었고 새로운 사랑의 에너지가 되었다.

미국에서 오신 피콕 목사님은 실생활에서의 기본적인 영성 수련법을 가르쳐주셨다. 그러나 무릇 진정한 가르침과 배움은 어떤 내용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이의 말과 성품과 태도를 통해 이미 그에게 스며들어 있는 무언가를 영향으로서 주고받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비록 언어의 장벽이 있었고 너무나도 정적인 강의였지만 피콕목사님은 최고의 영성 스승이었다. 영성을 말하는 사람이기 전에 실재로 영성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전농교회 이광섭 목사님은 성찬예배 설교를 통해서 교회 개혁을 말로만, 비판으로만, 냉소로만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부인과 자기희생의 작은 행동으로 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 설교를 통해서 영성이라는 것이 이제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시냇물이 다른 시냇물을 만나 강이 되듯 함께 모여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초청을 받게 되었다. 시냇물들의 작은 행동들이 자기 의에 도취된 개인적, 진영적,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함께 영성의 길을 걷고 영성적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해 나가야 함을 깨달았다. 영성은 결국 함께 나누고 함께 꽃피워야 되는 것이다. 참된 영성이 있는 곳에는 화해가 일어난다. 나와 한국교회의 화해였다! 나와 영성의 화해였다! 이제 우리 모두가 화해해야 한다... 그리고 한 발짝 뒤로 빼 두었던 발걸음을 살포시 내밀었다.

 

   
 

 

부드러운 개혁을 꿈꾸며

5-Day 영성형성아카데미 운동은 너무 귀했다. 요즘 많은 이들이 교회개혁을 부르짖는다. 그리고 저마다 그 개혁의 주체가 되려한다. 하지만 학연 지연 인연으로 사분오열 된 상태로는 불가능하다. 저마다 맞는 말을 한다. 그러나 개혁의 역사 속에서 치열했던 싸움의 DNA를 품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 개혁은 강대강의 싸움을 먼저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왜 부드러운 개혁은 없단 말인가? 왜 한 하나님, 스스로를 사랑이라고 드러내셨던 한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서 이런 싸움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일까? 본질로 돌아가자! 교회는 예배 공동체이다. 교단도 교회들의 예배 공동체이다. 그렇다! 해법은 예배에 있었다.

누구 하나 부각되는 사람 없이 모두가 함께 침묵 하운데 하나가 되며 예배에 참여하고 십자가를 기억하며 빵과 잔을 나누며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영성적 예배야 말로 교회 개혁의 실재적이고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다.

제안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한국교회와 감리회, 자신이 속한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5-day 영성형성 아카데미에 참석했으면 한다. 그리고 절기나 분기마다 영성형성아카데미에 참석한 모든 분들이 모여서 우리가 함께 드렸던 형식 그대로 예배를 드리면 어떨까? 예배만 드리고 사랑의 포옹과 눈인사만 한 뒤 조용히 헤어지면 좋겠다. 설교도 되도록 젊은 목사를 통해 눈감고 들어도 좋을 정도로 부드럽고 간단하게 전하면 좋을 것이다. 영성의 작은 시냇물들이 때로 이렇게 강이 되고 다시 시냇물이 되면서 결국 바다에 이르게 되면 좋겠다는 꿈을 꾼다. 그래! 바다와 같이 가늠할 수 없는 넓고 깊은 하나님의 품으로... 거기서 우리 다시 하나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번 제 8회 서울연회 5-day 영성형성 아카데미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또한 아번 아카데미를 주관한 한국영성형성아카데미와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모든 스텝들, 강사로 수고해 주신 래리 피콕 목사님과 협성대학교 이세형 교수님, 참석하신 모든 분들과 우리 언약그룹 목사님들, 마지막으로 가난한 목사에게 귀한 초청으로 큰 위로와 은혜를 맛보게 해 준 전농교회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시냇물

시냇물은 흐른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스스로를 적시면서
시냇물은 흐른다

시냇물은 흐른다
당연한 듯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기다림과 스밈으로 산을 넘는다

시냇물은 높아지려 하지 않는다
부딪히면 돌아가고
끝내 낮은 곳을 찾아
기어이 흐른다

시냇물은 서둘러 강이 되려 하지 않는다
끝내 약한자리 패인자리 찾아
그 자리를 채워 주며
널리널리 펴져 나간다

누구나 머물 수 있고
누구나 건널 수 있으며
그 아래로 낮은자리 쓰다듬고
그 속에는 생명을 품으며
그 위로는 희망을 띄운다

시냇물소리는
함께 울어주는 흐느낌이 되고
노래하는 벗들을 위한
모차르트의 왼손이 되어준다.
땅에는 경계가 있고 주인이 있어도
시냇물은 모든 단절과 욕심을 뚫고 흐른다
모두가 시냇물의 주인이 된다
모두가 시냇물이 된다

시냇물은 흐른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스스로를 적시면서
시냇물은 흐른다

-의정부 하늘결교회 조진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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